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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번역] 황청직공도-문채국(보르네오 브루나이) 사료 번역

황청직공도 권1


문채국(汶菜國, 만주어: wen tsai gurun)


△<황청직공도> 의 문채국 남녀


문채국(汶菜國)1은 당대(唐代)의 파라국(婆羅國)2이다. 동양(東洋)이 끝나고 서양(西洋)이 시작하는 곳이다. 명 영락 연간, 자주 입공(入貢)하였고, 전설에 의하면, 그 두목은 복건 사람(閩人)으로 정화(鄭和)를 따라갔다가, 그 땅을 점거했다고 한다.3 산을 등지고 바다를 앞에 두고 있다. 불교를 숭상하여, 죽이는 것을 싫어하고 보시하는 것을 좋아하며, 돼지를 먹는 것을 금한다.4 그것을 위반하는 자가 있으면 죽을 때까지 나무를 베고 등나무 캐는 것을 생업으로 삼아야 한다. 남자는 머리카락을 잘라 진홍색 비단(絳帛)으로 싸고, 턱수염은 밀고 구레나룻은 남기니, 술루(蘇禄)와 비슷하다. 여자는 머리를 풀어헤쳐 어깨에 드리우며, 정수리에 수건을 묶는다. 치마를 입고 맨발로 다닌다.


*각주


1. 문채국(汶菜國): 지금의 보르네오 섬을 점거했던 브루나이 술탄국이다. 말레이 인들이 뿌리였고, 서기 7세기경에는 말레이반도와 인도네시아의 제해권을 장악한 스리위자야 제국의 속국이었다가. 이후 14세기 마자파힛 왕조의 속국이 되었다. 15세기에 이슬람교가 전파되면서, 브루나이는 독립국이 되었고, 보르네오 섬의 대부분을 점거하여 전성기를 누렸다. 그러나 16세기 이후 스페인과 전쟁을 벌이면서 점차 세력이 쇠퇴하였다.


2.  파라국(婆羅國): 지금의 보르네오 섬이다. <신당서><남만열전>에 의하면, 669년(당 총장 2년) 사신을 보냈다고 한다. 보르네오 사람들은 6~9세기까지 중국과 해상 교역을 하면서 자신들을 '푸니(Puni, 婆利, 渤泥)'라고도 칭하였다고 한다.


3. 실제 정화의 남해 원정 이후 많은 복건성 출신 화교들이 보르네오 섬에 정착하였다. 이 기사는 이러한 사실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4.  브루나이는 15세기 이후 이슬람을 받아들였다. 따라서 주민들이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것은 이슬람 관습을 따른 것이다. 



[사료번역] 황청직공도-마진국 사료 번역

황청직공도 권1


마진국(馬辰國, 만주어: macen gurun)


△ <황청직공도>의 마진국 남녀


마진국(馬辰國)1, 곧 문랑마신(文郎馬神)으로, 동남 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 전설에 의하면 마원(馬援)2이 남정할 때의 사졸들의 후예라고 한다. 그 땅은 물이 많은데, 오직 두목만이 육지에 거처할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은 물 위에 뗏목을 얽어매서 판을 올려 집으로 삼는다. 풍속은 불교를 숭상하지만, 성격은 강하고 사납다. 남녀는 감히 사사로이 결합하는 일이 없고 등나무를 벌채하고 산초를 줍는 것을 생업으로 삼는다. 남자는 머리를 자르고, 붉은 비단으로 묶으며, 허리는 붉은 융단으로 감싼다. 출입할 때에는 반드시 도검을 차고, 항상 대바구니를 등에 지고 산초를 채운다. 여인들은 웃통을 벗고 맨발이며, 베 치마를 묶어 무릎 사이를 지나게 하고, 넓은 비단은 가슴과 배에 걸친다. 물을 길면 항아리를 머리에 인다.


*각주


1. 마진국(馬辰國) : 현재 인도네시아의 반자르마신(Banjarmasin). 인도네시아 칼리만탄슬라탄 주의 주도로, 바리토 강마르타푸라 강이 합류하는 삼각주 지대에 위치한다. 고무, 후추, 목재 등이 산출되며, 고대부터 인도양 무역을 통해 성장하였다. 


2. 마원(馬援): BC. 14년 ~ AD. 49년. 후한의 정치가로 자는 문연이다. 장안 우부풍 사람으로, 본래 왕망과 외효 밑에서 관직을 역임하다가 후한 광무제 밑에서 태중태부와 농서태수를 역임하면서 강인(羌人)들을 토벌하고, 복파장군(伏波將軍)이 되어, 교지(交趾)를 쳐서 신식후(新息侯)에 봉해졌다. '복파장군'으로 널리 알려졌고 그가 원정했던 감숙, 청해, 사천과 운남 일대의 종족 중에는 마원과 그의 사졸들을 조상으로 인식하는 부락들이 몇몇이 있으며, 후한 말, 서량 지역 군벌인 마등(馬騰)과 마초(馬超)의 조상으로 알려져 있다.


[사료번역] 황청직공도-일본 사료 번역

황청직공도 권1.


일본(日本, 만주어: dzi ben gurun)


△ <황청직공도>의 일본 남녀


일본(日本)은 옛날의 왜노국(倭奴國)으로, 당대에 일본으로 고쳤는데,1 가까운 동해(東海)에서 해가 뜬다고 하여 이름한 것이다. 땅은 바다로 둘러싸여 있으며, 5기(畿)·7도(道)·3도(島)가 있다. 송대 이전에는 모두 중국과 통하였다. 명의 홍무(洪武) 초기에 자주 표를 올리고 방물을 바쳤으나, 본성이 교활하여, 때때로 연해의 주현(州縣)을 약탈하면서 배반했다가 복종하는 것이 정해진 것이 없었다.2


그 풍속에서는 불교를 숭상하고 무당을 믿으며, 술을 좋아하고 생명을 가볍게 여긴다. 또한 중국 문자를 익히는데, 그곳 토착 음으로 읽는다. 법을 세운 것이 자못 엄하여 송사를 다투거나 훔치고 도적질하는 일이 드물다. 거처와 음식은 옛 법이 있고, 그 기물은 제조하는 것이 정교하다. 물산 역시 풍부하다. 남자는 정수리를 밀고 맨발이며, 네모난 깃의 옷을 입고 베 허리띠를 묶으며, 출입할 때마다 도검을 찬다. 여자는 머리를 끌어 올려 비녀를 꽂고, 넓은 옷에 긴 치마를 입고 붉은 신발을 신는다. 견포(絹布)를 짤 수 있다.


*각주


1. 일본과 중화왕조가 최초로 외교관계를 맺은 것은 서기 3세기 조위(曹魏) 때 왜왕 히미코가 낙랑군을 통해 사절을 보내온 후로, 이후 수대까지 '왜노국(倭奴國)', '왜(倭)'로 불려지다가 당대 이후부터 '일본(日本)'으로 불렸다.


2. 명대 가정년간부터 중국 동남부 해안에서 왜구의 폐해가 극심해졌고, 만력 연간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공 등이 있었기 때문에, 명과 청의 조정의 일본 인식은 부정적이었다. 청과 일본은 19세기 중엽까지 정식 외교 관계를 맺은 적은 없었고, 나가사키와 절강 해관 등을 통한 통상(通商) 관계를 유지했다.   


자료번역을 하면서 느끼는 번역의 즐거움과 중요성 History? 歷史?

요즘은 청대와 관련하여 재미있는 자료들을 번역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박사논문 관련 공부하는 것이 조금은 지친 게 크죠. 숨도 좀 돌릴 겸 블로그에 자료들을 조금씩 번역하여 올리고 있습니다.

석사 시작할 때는 사실 한문도 많이 서툴고 일본어, 중국어도 더듬더듬 읽는 수준이었는데
아직도 많이 부족하지만 석사 과정을 거치고 박사과정을 거치면서
한문, 중국어, 일본어도 그럭저럭 읽고 번역할 수 있고, 만주어도 읽고 번역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언어를 많이 알게 된다는 것은 역사학도에게 시야가 넓어진다는 의미입니다.
여러 언어를 익히니, 확실히 제가 볼 수 있는 자료도 훨씬 많아졌습니다.
물론 그 자료들을 어떻게 활용해서 어떤 논의를 할 것인가도 매우 중요한 문제이지만, 일단 그것은 또 다른 문제이고요.
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많아지니, 자연스럽게 번역하고 싶은 자료들도 많아졌고요. 그래서 틈틈이 재미있는 자료들을 번역하고 있습니다.

사료와 자료들을 번역하면서 느낀 점은
자료 번역 작업도 자신만의 글을 쓰는 작업만큼, 아니면 그 보다도 더 많은 공력이 필요하다는 점입니다.
내 글이 아니라, 남의 생각을, 거기에다가 내가 쓰는 언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쓰인 글을
나의 언어로 바꿔서 남에게 확실히 전달하는 작업은 정말 어렵습니다.
언어에 대한 지식만이 아니라, 원저자에 대한 이해, 그 자료에 대한 폭넓은 지식, 자료가 쓰인 시대적 상황에 대한 지식 등도 요구됩니다.

번역하면서 저도 확실히 공부가 많이 되었습니다. 번역하는 글 외에 다른 자료들도 많이 봐야 되고 어떻게 하면 문장이 매끄러운가 같은 고민도 하게 됩니다. 확실히 번역도 역사학도에게 중요한 공부이자, 연구입니다. 또한 정말 좋은 번역서는 그에 따라 파생되는 다양한 연구 성과들을 낳게 됩니다.

다만 그러한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는 번역에 대한 시각이 그렇게 좋지는 않은듯 합니다. 특히 역사학계에서는 말이죠.
확실히 번역보다는 연구서, 논문 성과에 더 비중이 큽니다. 그리고 요즘은 덜하지만 예전 같은 경우에는 번역한다고 하면 괜히 시간 낭비하지 말고 연구를 하라는 시각도 많았습니다. 번역을 상대적으로 등한시 하는 편이죠.

물론 번역이란 게 개인의 독창적 연구성과 보다 사람들에게 다소 임펙트가 적긴 합니다. 블로그 같은 경우도 확실히 번역한 글보다는 제 생각을 던지는 글들이 사람들의 시선을 많이 끌더라고요. 아마도 번역 저작은 뭔가 2차 창작물이라는 느낌이 강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이런 풍토 때문일지 몰라도 확실히 번역 사업은 시장의 규모가 너무 작고, 번역서의 수도 상당히 적은 것 같습니다. 특히 역사학 쪽은 좀 번역서가 부족한 인상입니다. 물론 최근 들어서 중국사 등에서도 좋은 자료들이나 외국의 연구 동향들이 수준 높게 번역되고 있습니다. 번역이란 것이 지식의 공유와 유통의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작업이란 점에서, 역사학에서도 앞으로 보다 양질의 번역 작업들이 진행되어, 많은 외국의 연구성과들이 국내에 소개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요즘 여러 번역서를 읽고 자료번역을 하다 보니까 사료나 전문 연구서의 번역은 전문번역가보다는 전공 연구자들이 하는 것이 좀더 낫다고 봅니다. 전문번역가들은 문장을 좀더 보기 좋게 풀어낼지 몰라도, 배경지식의 정확성, 글의 맥락 전달 측면에서는 전공 연구자들에 비해서는 조금은 부족한 측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요즘 자료 번역을 하면서 드는 생각들을 끄적여 봤습니다.

 

[사료번역] 황청직공도-스웨덴 사료 번역

황청직공도 권1


스웨덴(口+瑞國, 만주어: shui gurun)


<황청직공도>의 스웨덴 남녀


스웨덴(口+瑞國)1 역시 네덜란드의 속국(屬國)으로 광동(粤)에서 무역을 한다. 그 모자를 벗는 것을 예로 여기는 것도 네덜란드와 서로 비슷하다. 짧은 옷을 입고 가죽 신을 신고, 항상 등나무 채찍을 들고 다니면서 몸을 보호한다. 오랑캐 부인들은 네모난 옷깃에 가슴을 옷 밖으로 노출하며, 치마를 묶고, 소매를 접어 팔을 드러나게 한다. 가죽으로 신을 만들어 신는데, 바닥에는 네모난 나무를 박아서 마치 나막신 같다.  금실로 짠 주머니에 코담배를 넣고 때때로 피는 것을 즐긴다.


*각주


1. 스웨덴: <황청직공도>에서는 口+瑞國이라고 하였으나,  瑞國, 瑞典이라고도 한다.

2. 스웨덴이 청과 교역하기 시작한 것은 1732년 부터이다. 1731년 스웨덴은 자국의 동인도회사를 설립하고, 1731년부터 1831년까지 약 130번 정도 중국과 교역하였고, 이들은 다른 유럽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광주의 공행(公行)을 통해 교역하였다.(李國榮, 이화승 옮김, <제국의 상점>, 소나무, 2008, pp.144~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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