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로그


귀자모상(鬼子母像)과 고대 한반도의 기독교 전래문제 미술관&박물관

△일본 온조지 소장 귀자모 상

  최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는 <일본 비와호 지역의 불교미술> 전시회를 다녀왔다. 나라 시대부터 에도 말까지의 일본 비와호 일대의 불교 관련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그 중에서 필자의 관심을 끈 것은 귀자모상이라고 불리는 상이었다. 11세기 가마쿠라 막부 시대에 만들어진 이 신상은 어머니의 자애로운 모습이 느껴져서 감동적인 작품이었다. 헤이안 시대에서 무가 시대로 넘어가는 혼란기 속에 지친 일본인들에게 귀자모상은 종교적 위안이 되었을 것이다. 필자가 귀자모상에 유독 관심을 가진 이유는 엉뚱할 수도 있지만 동방 기독교 전래, 고대 한반도의 기독교 전래 관련 문제 때문이었다.

 
△라파엘로 <대공의 성모>

  비와호의 귀자모 상을 보고 받은 인상은 그 상의 형태가 서구의 성모 마리아 상과 놀랍도록 흡사하다는 점이다. 필자도 귀자모 상을 본 순간 떠오른 생각이 '왠 일본에 성모 마리아 상?'이라는 것이었다. 그 정도로 그 형태가 일치하는 부분이 많다. 그와 함께 떠오른 또 다른 유물이 있었다.

△ 숭실대 측에서 경주에서 발견했다고 주장하는 7~8세기 소조 '성모 마리아 상'

  위의 소조 상은 숭실대학교 기독교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일명 '성모 마리아 상'이라는 것이다. 숭실대 기독교 박물관 측에서는 이를 경주에서 출토된 7~8세기 '성모마리아' 상이라고 소개하면서 1960년 대 김양선 박사가 불국사에서 발견했다는 석재 십자가와 철 십자가와 함께 고대 동방 기독교의 한국 전래를 방증하는 유물이라고 보았다. 고대 기독교의 한국 전래를 주장하는 측에서는 불교에서는 이러한 상을 제작한 예가 없기 때문에 신라에 전래된 성모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문명교류사를 연구하는 정수일 교수 역시 이 상을 언급하면서 고대 동방 기독교의 한국 전래설의 가능성을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 반박하는 측은 이 소조상이 기독교가 본격적으로 유입된 근대에 조작된 유물이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그럴 가능성도 배제하기는 힘들겠지만, 이 상이 설령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상이라고 할 지라도 과연 그것이 성모 마리아 상일지는 의문이 든다. 물론 7세기에 당나라에서 네스토리우스로 추측되는 경교가 전래되었고 이것이 신라에 소개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어떤 형태로 동아시아에 전해졌는지, 마리아 신앙이 동아시아에 전해졌는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또한 기독교 사가들이 불교에서는 여인이 아이를 안고 있는 상을 찾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기독교 사가들이 불교에 대한 관심이 적은 데서 비롯된 오류이다. 그에 대한 방증이 바로 서두에 제시된 일본의 <귀자모 상>이다. 즉 동아시아에 귀자모신(鬼子母神)에 대한 신앙이 존재했다는 점이다.

△ 간다라에서 출토된 귀자모상

  귀자모신에 대한 신앙은 법화경 다라니품에 등장한 10명의 나찰녀와 귀자모에 대한 이야기에서 비롯되었다. 귀자모는 하리테(한자로는 하리제, 하라제)라고 불리는 악신으로 아이들을 잡아먹는 신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유독 자신의 막내 아이는 극진히 아꼈다고 한다. 이에 석가모니는 그녀를 교화시키기 위해 그녀의 막내 아이를 몰래 숨겨두었다. 막내 아이를 잃은 귀자모는 슬퍼하면서 석가모니에게 애원하였고, 결국 석가모니에게 교화되어 아이들을 돌보는 육아의 수호신이 되었다. 이러한 법화경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간다라를 비롯하여 동아시아 지역에서 귀자모상이 제작되었다. 만약 숭실대에서 소장한 '마리아 상'이 만약 통일신라 시대에 제작된 유물이 맞다면 그것은 성모마리아 상이라기 보다는 대승불교의 귀자모 상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섣부른 추측일 수도 있겠지만 만약 그 상이 귀자모상이라면 모자를 둘러싼 8개의 얼굴은 귀자모와 함께 등장하는 나찰들의 얼굴을 형상화한 얼굴이 될 수 있다.

  고대사는 유물이 부족하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특히 한국의 고대사는 말이다. 따라서 어떠한 사료를 볾에 있어서도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될 가능성이 많다. 이런 점을 염두해 두면서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두면서 연구를 해야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문명교류사의 측면도 그러하다. 여기서 언급된 고대 기독교의 한반도 전래 문제도 일부 불확실한 유물들을 가지고 속단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러한 해석은 조심해야할 것이다.

계유정난에 대한 짧은 생각 드라마와 역사

△<공주의 남자>에서 종 임어을운과 김종서의 집을 찾아가는 수양대군, 실록에 의하면 수양대군은 관복을 착용하고 김종서의 집을 방문했다.

    동유럽을 다녀오고 나서 학교에 나가면서 한문 강독 스터디도 듣고 사람들을 만나느라 엄청 바빴다. 이글루에도 글을 못올린 지 한 달이 된 듯하다. 그런 바쁜 와중에 요즘 그나마 한 줄기의 빛이 되는 것이 <공주의 남자>라는 드라마이다. 뭐... 이미 한국 사극의 픽션, 팩션의 문제는 사학과 공부를 하면서 많이 경험한 일이기 때문에 또한 이글루스 역사 벨리 매니아 분들께서 필자보다 전문가이시기 때문에 굳이 언급하고 싶지는 않고, 팩션이냐 픽션이냐의 문제를 떠나 드라마 자체의 스토리 구성과 전개가 흥미로워서 보고 있다. 내가 이 글에서 언급하고 싶은 것은 <공남>의 소재가 된 계유정난이 가지는 역사적 의미이다. 작년에 학교에서 <조선시대사> 강의를 들으면서 상당히 중점적으로 들었던 것이 바로 세조의 왕위 찬탈이었는데 <공남>을 보면서 다시금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계유정난, 세조의 왕위 찬탈은 왜 일어났을까? 직접적인 원인은 너무나도 뻔한 답이 나올 것 같다. 당연히 수양대군의 왕성한 권력욕이다. 물론 세조가 매우 중요한 원인이기는 하지만 계유정난의 책임소재를 그에게만 돌리기는 약간 아쉽기는 하다. 만약 수양대군이 조카를 찬탈하기 힘든 상황이 조성되었다면 당시 시대적 흐름이 바뀔 수도 있었을 것 같다. 내가 조선시대 역사를 전문적으로 전공하는 것이 아니라 내 추측에는 많은 무리가 있겠지만 계유정난이라는 사건은 세종의 시대의 권력구도가 낳은 그림자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해본다.

 
   
   세종의 시대는 조선이 유교국가의 기반을 닦은 시대라고 인식되고 있다. 그런데 참으로 아이러니컬하다. 유교적인 가치관이 확립되어 나갔던 세종의 시대 직후에 가장 비유교적인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숙부가 조카를 몰아내고 왕이 되었다. 더군다나 신하가 주군을 몰아내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이것은 조선이 국시로 삼은 유교적인 가치관에서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 그러한 비정상적인 일이 유교적 가치관이 확립되어 가는 시점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물론 수양대군은 당시로써는 상당히 돌출적 인물이었지만 그가 왕위를 찬탈할 수 있었던 데에는 세종시대의 정치적 역학구도를 살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세종 시대, 특히 세종 후반부에 이르면 세종을 중심으로 한 중앙 정치의 권력구도는 크게 3개의 축으로 이뤄졌다. 우선은 의정부를 중심으로 한 대신 세력이었다. 세종은 부왕인 태종이 승하한 이후, 의정부의 대신들과 조화롭게 정치를 이끌어나갔다. 그 결과 세종 후반부까지 황희나 김종서 등을 대표로 하는 의정부를 중심으로 한 대신 세력들의 권한이 상당히 컸다. 그러는 동시에 세종은 자신의 여러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위해서 집현전을 중심으로 한  신진 관료 계층을 양성하였다. 이들의 존재는 세종의 정책구상을 실현시키는 동시에 의정부를 중심으로 한 대신 세력에 대한 견제의 역할도 하였을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세종의 왕자들과 종친세력이다. 이들은 비록 직접 정치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세종을 도와 여러 편찬 사업에 참여하였다.

  세종  후반까지는 세종을 중심으로 이 3가지의 권력 축들이 균형을 이루면서 정국이 운영되었다. 그런데 세종 후반부로 갈 수록 세종의 건강이 약화되면서 권력 구도의 축에 변화가 가해진다. 물론 세종이 죽을 때까지 이 세 축의 균형은 어느정도 맞았지만 점차 대신 세력들의 권력이 약해지고 왕자와 종친세력이 강해지는 모습을 보인다. 세종은 재위 말년 부분은 병으로 인해 세자(문종)에게 대리청정을 맡기고  정치 일선에서 물러난 모습을 보인다. 그럼에도 훈민정음 창제 등의 사업 등은 자신이 직접 진행한다. 비록 문종에게 대리청정을 맡겼지만 결과적으로는 세자와 세종 이중 권력구도가 생긴 것이다.

△ 세종의 명으로 수양대군이 편찬한 석보상절

  이러한 이중 권력 구도에서 점차 성장한 세력이 바로 세종의 왕자들이었다. 특히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은 병든 세종의 옆을 지키면서 세종의 명으로 여러 서적들을 편찬하고 조정에 세종의 어명을 전하는 등 실질적인 세종의 측근이 되었다. 물론 이들이 맡은 사업이 당시 정치적으로는 덜 중요했더라도 세종의 깊은 신임을 받으며 세종의 여러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이들의 행보에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을 중심으로 한 대군 세력들의 정치 권력 또한 성장할 수 밖에 없었고 그 속에서 야심가 수양대군의 경우 정치적인 야망을 키웠을 것이다.


 
△<공주의 남자>에서 수양과 김종서

  대신 세력, 왕자 종친 세력, 그리고 집현전 세력 이 3분된 권력구도의 아슬아슬한 균형은 세종이 죽고 문종 대까지도 유지된다. 하지만 문종이 재위 3년만에 승하하고 10세의 나이의 단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이러한 균형은 파탄이 난다. 세종의 시대부터 줄곧 성장해 온 왕자, 종친들의 세력은 수양의 세력과 안평의 세력으로 분화되었다. 그런 와중에서 더욱 두드러진 것은 수양대군 측 세력이었다. 이에 반해 김종서를 중심으로 한 대신 세력의 경우는 물론 여전히 단종을 보필하면서 권력을 유지하였지만 수양대군에 비해서 상당히 수세적인 입장이 되었다. 이들은 단종을 보호하고 수양대군의 권력 확장을 견제하기 위해서 안평대군과 손을 잡았다고 볼 수 있겠다. 결국 세종 후반기에 비정상적으로 성장한 왕자들, 특히 수양대군의 세력과 의정부를 중심으로 한 대신 세력 간의 충돌이 계유정난으로 나타난 것이다. 

△ 집현전으로 사용된 경복궁 수정전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또 하나의 권력 축이었던 집현전 관료들의 태도이다. 이들은 수양대군의 계유정난에 대해서 동의를 보였다. 신숙주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사육신이라고 불리는 성삼문, 하위지 등의 경우에도 수양대군의 계유정난에 대해서 긍정적인 표시를 보였다. <단종실록>의 기록을 살펴보면, 하위지의 경우 김종서와 황보인 등의 대신들의 자제가 고위직에 오르자 사직을 하면서 "늙은 여우가 없어지면 다시 돌아오겠다." 고 불만을 표출했고 성삼문의 경우 계유정난 직후에 3등 공신으로 책봉되고 안평대군에게 죄줄 것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를 볼 때 집현전 출신 관료들은 수양대군의 쿠데타에 동조했다고 볼 수 있는데, 이는 김종서 황보인 등의 대신 세력들의 권력에 대한 이들의 불만이 표출된 것으로 보인다.

 

  계유정난으로 인한 김종서의 죽음으로 세종 시대 형성되었던 대신 세력들의 축이 무너지게 되었다. 그 결과 수양대군의 독주를 막을 수 있는 견제장치가 없어지게 되었다. 수양대군의 권력은 비정상적으로 비대해졌고 결국 단종의 폐위라는 유교국가인 조선왕조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수양대군, 세조의 집권은 후대에 크나큰 그림자를 드리우게 되었다. 우리가 잘 아는 4대 사화 역시 그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세조의 집권이 낳은 잔재들과 세조 집권에 대한 후대의 평가로 인해 발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계유정난을 낳은 세종 후반의 권력구도가 낳은 그림자는 상당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공남>을 보면서, 세조 대의 역사를 공부하면서 들었던 짧은 생각을 적어본다. 

중국정사24史 外夷, 外國항목 표 동아시아사


中國正史24史-外夷, 外國表

書名

記載部分

勢力(國家)名稱

史記

110. 匈奴列傳

匈奴

113. 南越列傳

南越

114. 東越列傳

東越

115. 朝鮮列傳

朝鮮

116. 西南夷列傳

西南 諸夷

124. 大宛列傳

大宛 等 西域 諸國

漢書

94. 匈奴傳

匈奴

95.西南夷兩粤朝鮮傳

西南夷, 閩粤, 南粤, 朝鮮

96. 西域傳

婼光, 鄯善國, 且末國, 小宛國, 精絶國, 戎盧國, 扞彌國, 渠勒國于闐國, 皮山國, 烏秅國, 西夜國, 蒲黎國, 依耐國, 無雷國, 難兜國, 罽賓國, 烏戈山離國, 安息國, 大月氏國, 康居國, 大宛國, 桃槐國, 休循國, 揖毒國, 沙車國, 疏勒國, 尉頭國, 烏孫國, 故墨國, 溫宿國, 龜玆國, 烏墨國, 渠黎, 尉黎國, 危須國, 烏食離國, 卑陸國, 卑陸後國, 郁立師國, 單桓國, 蒲類國, 蒲類後國, 東且彌國, 西且彌國, 劫國, 狐胡國, 山國, 車師前國, 車師後國

後漢書

85. 東夷列傳

夫餘, 挹婁, 高句麗, 東沃沮, 濊, 三韓, 倭

86. 南蠻西南夷列傳

南蠻: 巴郡南郡蠻, 板楯蠻夷

西南夷: 西南夷, 夜郞, 滇, 哀牢, 邛都, 莋都冉駹, 白馬氐

87. 西羌傳

羌無弋爰劍, 滇良, 東號子麻氏, 湟中月氏胡

88. 西域傳

拘彌, 于蒖國, 西夜 , 子合, 德若, 條支, 安息, 大秦, 大月氏

高附, 天竺, 東離, 粟弋, 嚴, 奄蔡, 沙車, 疏勒, 焉耆, 蒲類, 移支, 東且彌, 車師

89. 南匈奴列傳

(南)匈奴

90. 烏桓鮮卑列傳

烏桓, 鮮卑

三國志

30. 魏書. 30

烏桓, 鮮卑

東夷: 夫餘, 高句麗, 東沃沮, 挹婁, 濊, 韓, 倭

晉書

97. 列傳69. 四夷

東夷: 夫餘國, 馬韓, 辰韓, 肅愼氏, 倭人, 裨離 等 十國

西戎: 吐谷渾, 焉耆國, 龜玆國, 大宛國, 康居國, 大秦國

南蠻: 林邑國 扶南國

北狄: 匈奴

宋書

95. 列傳55

索虜: 芮芮, 槃槃, 趙昌, 粟特

96. 列傳56

鮮卑吐谷渾

97. 列傳57

夷蠻: 林邑國, 扶南國, 訶羅陁國, 媻皇國, 媻達國 闍婆婆達國

師子國, 天竺迦毗黎國, 蘇摩黎國, 斤陁利國, 婆黎國

高句麗國, 百濟國, 倭國, 荊雍州蠻, 豫州蠻

98. 列傳58

氐胡: 略陽, 淸水氐 楊氏, 胡大沮渠蒙遜

南齊書

57. 列傳38

魏虜

58. 列傳39

蠻, 東南夷

59. 列傳40

芮芮虜

梁書

54. 列傳48

海南諸國

林邑, 扶南, 盤盤, 丹丹, 于陁利, 狼牙修, 婆利, 中天竺

東夷

高句麗, 百濟, 新羅, 倭, 文身, 扶桑

西北諸戎

河南, 高昌, 滑, 周古柯, 呵跋檀, 胡密丹, 白題,

龜玆, 于闐, 渴盤她, 末, 波斯, 宕昌, 鄧至, 武興, 芮芮

晉書

 

 

魏書

100. 列傳88

高句麗, 百濟, 勿吉, 失韋, 豆莫婁, 地豆于, 庫莫奚, 契丹, 烏洛侯

101. 列傳89

氐, 吐谷渾, 乙弗勿敵(阿蘭, 女王國), 宕昌羌, 高昌, 鄧至, 蠻, 獠

102. 列傳90. 西域

鄯善, 且末, 于闐, 蒲山, 悉居半, 權於摩, 渠莎, 車師, 且彌, 焉耆, 龜玆, 姑默, 溫宿, 尉頭, 烏孫, 疏勒, 悅般, 者至拔, 迷密, 悉萬斤, 忸密, 洛那, 粟特, 波斯, 伏盧尼, 色知顯, 伽色尼, 薄知, 牟知, 阿弗太汗, 呼似密, 婼色, 波羅, 旱伽知, 伽不單, 者舌, 伽倍, 折薛莫孫, 鉗敦, 弗敵沙, 閻浮謁, 大月氏, 安息, 罽賓, 吐呼羅, 副貨, 南天竺, 疊伏羅, 發豆, 嚈噠, 朱居, 渴槃陁, 鉢和, 波知, 賖彌, 烏萇, 乾陀, 康國

103. 列傳91.

蠕蠕, 匈奴宇文莫槐, 徒何段就六眷, 高車, 吐突隣, 紇突隣, 侯呂隣, 薛干, 破多蘭, 黜弗, 素古延, 越勒倍泥

北齊書

 

 

周書

49. 列傳41. 異域 上

高麗, 百濟, 蠻, 獠, 宕昌, 鄧至, 白蘭氏, 稽胡, 高莫奚

50. 列傳42. 異域 下

突厥 吐谷渾, 高昌, 鄯善, 焉耆, 龜玆, 于闐, 嚈噠

隋書

81. 列傳46. 東夷

高麗, 百濟, 新羅, 靺鞨, 流求, 倭國

82. 列傳47. 南蠻

林邑, 赤上, 眞臘, 婆利

83. 列傳48. 西域

吐谷渾, 党項, 高昌, 康國, 安國, 石國, 女國, 焉耆, 龜玆, 疏勒, 于闐, 鏺汗, 吐火羅, 揖怛, 米國, 史國, 曹國, 何國, 烏那曷, 穆國, 波斯, 漕國, 附國

84. 列傳49. 北狄

突厥, 西突厥, 鐵勒, 奚, 契丹, 室韋

南史

78. 列傳68. 夷貊 上

海南諸國

林邑國, 扶南國

西南夷

訶羅陁國, 阿羅單國, 婆皇國, 婆達國, 闍婆達國, 槃槃國, 丹丹國, 于陁利國, 狼牙修國, 婆利國, 中天竺國, 天竺迦毗黎國, 師子國

79. 列傳69. 夷貊 下

東夷

高句麗, 百濟, 新羅, 倭, 文身, 大漢, 扶桑

西域

河南王, 宕昌, 鄧至, 武興

諸蠻

荊雍州蠻, 豫州蠻

西域

高昌, 滑, 阿跋檀, 白題, 龜玆, 于闐, 渴盤陁, 末, 波斯

北狄

蠕蠕

北史

94. 列傳82

高麗, 百濟(耽牟羅國), 新羅, 勿吉, 奚, 契丹, 室韋, 豆莫婁, 地豆于, 烏洛侯, 流求, 倭

95. 列傳83

蠻, 獠, 林邑, 赤土, 眞臘, 婆利(丹丹, 盤盤)

96. 列傳84

氐, 吐谷渾(乙弗勿敵, 契翰, 可蘭, 女王國), 宕昌, 鄧至(赫羊), 白蘭, 党項, 附國, 稽胡

97. 列傳85

鄯善, 且末, 于闐, 蒲山, 悉居半, 權於摩, 渠莎, 東師, 高昌, 且彌, 焉耆, 龜玆, 姑默, 溫宿, 尉頭, 烏孫, 疏勒, 悅般, 者至拔, 迷密, 悉萬斤, 忸密, 破洛那, 粟特, 波斯, 伏盧尼, 色知顯, 伽色尼, 薄知, 阿弗太汗, 呼似密, 婼色, 波羅, 旱伽至, 伽不單, 者舌, 伽倍, 折薛莫孫, 鉗敦, 弗敵沙, 閻浮謁, 大月氏, 安息, 條支, 大秦, 阿銁羌, 小月氏 ,罽賓, 吐呼羅, 副貨, 南天竺, 疊伏羅, 發豆, 嚈噠, 朱居, 渴槃陁, 鉢和, 波知, 賖彌(鉢盧勒), 烏萇, 乾陀, 康國, 安國, 石國, 女國, 鏺汗, 吐火羅, 揖怛, 米國, 史國, 曹國, 何國, 烏那曷, 穆國, 漕國

98. 列傳86

蠕蠕, 匈奴宇文莫槐, 徒何段就六眷, 高車, 吐突隣, 紇突隣(紇奚), 侯呂隣, 薛干, 破多蘭, 黜弗, 素古延, 越勒倍泥

99. 列傳87

突厥, 西突厥, 鐵勒

舊唐書

194. 列傳144. 突厥

突厥

195. 列傳145. 廻紇

廻紇(回紇, 回鶻)

196. 列傳146. 吐蕃

吐番

197. 列傳147.

南蠻, 西南蠻

南蠻

林邑, 盤盤, 陁怛, 隋和羅, 東謝蠻, 䍧柯蠻, 東女國, 驃國

西南蠻

婆利, 眞臘, 訶陵, 墮婆登, 西趙蠻, 南平獠, 南詔蠻

198. 列傳148. 西戎

泥婆羅, 高昌, 党項羌, 吐谷渾, 焉耆, 龜玆, 疏勒, 于闐, 天竺, 罽賓, 康國, 波斯, 拂箖, 大食

199. 列傳149.

東夷, 北狄

東夷

高麗, 百濟, 新羅, 倭國, 日本

北狄

鐵勒, 契丹, 奚, 室韋, 靺鞨, 渤海靺鞨, 霫, 烏羅渾

新唐書

215. 列傳140. 突厥

突厥

216. 列傳141. 吐蕃

吐番

217. 列傳142. 回鶻

廻紇(回紇, 回鶻)

218. 列傳143. 沙陀

沙陀(突厥)

219. 列傳144. 北狄

契丹, 奚, 室韋, 黑水靺鞨, 渤海靺鞨

220. 列傳145. 東夷

高麗, 百濟, 新羅, 日本, 流鬼

221. 列傳146. 西域

泥婆羅, 党項, 東女, 高昌, 吐谷渾, 焉耆, 龜玆, 疏勒, 于闐, 天竺, 摩擖陀, 罽賓, 康國, 寧遠, 大勃律, 吐火羅, 謝䫻, 識匿, 笸失密, 骨咄, 蘇毗, 師子, 波斯, 拂箖, 大食

222. 列傳147. 南蠻

南詔, 環王, 盤盤, 扶南, 眞臘, 訶陵, 投和, 聸博, 室利佛逝, 名蔑, 單單, 驃, 兩爨蠻, 南平獠, 西原蠻

舊五代史

137. 外國列傳 一

契丹

138. 外國列傳 二

吐蕃, 回鶻, 高麗, 渤海靺鞨, 黑水靺鞨, 新羅, 党項, 昆明部落, 于闐, 占城, 牂牁蠻

新五代史

72. 四夷附錄 第一

契丹

73. 四夷附錄 第二

東丹

74. 四夷附錄 第三

 

奚, 吐渾, 達靼, 党項, 突厥, 吐蕃, 回鶻, 于闐, 高麗, 渤海, 新羅, 黑水靺鞨, 南詔蠻, 牂牱蠻, 昆明, 占城

宋史

485. 外國 一

夏國(西夏)

486. 外國 二

487. 外國 三

高麗

488. 外國 四

交止, 大理

489. 外國 五

占城, 眞臘, 蒲甘, 邈黎, 三佛齊, 闍婆, 南毗, 勃泥, 汪輦, 丹眉流

490. 外國 六

天竺, 于闐, 高昌, 回鶻, 大食, 層檀, 龜玆, 沙州, 拂林

491. 外國 七

流求國, 定安國, 渤海國, 日本國, 党項

492. 外國 八

吐蕃, 唃廝囉, 董氊, 阿里骨, 瞎征, 趙思忠

493. 蠻夷 一

西南溪峒諸蠻 上

494. 蠻夷 二

西南溪峒諸蠻 下, 梅山峒, 誠徽州, 南丹州

495. 蠻夷 三

撫水州, 廣原州, 黎洞, 環州

496. 蠻夷 四

西南諸夷, 黎州諸夷, 敍州三路蠻, 威茂渝州蠻, 黔涪施高徼外諸蠻, 瀘州蠻

遼史

115. 二國外記

高麗, 西夏

金史

134. 外國 上

西夏

135. 外國 下

高麗

元史

208. 列傳95 外國

高麗, 日本, 耽羅

209. 列傳96 外國

安南

210. 列傳97

緬, 占城, 暹, 爪哇, 瑠求, 三嶼, 馬八兒 等 國

明史

320. 外國 一

朝鮮

321. 外國 二

安南

322. 外國 三

日本

323. 外國 四

琉球, 呂宋, 合貓里, 美洛居, 沙瑤(吶嗶嘽), 雞籠, 婆羅, 麻葉甕, 古麻刺郞, 馮嘉施蘭, 文郞馬神

324. 外國 五

占城, 賓童龍, 眞臘, 暹羅, 爪哇, 闍婆, 蘇吉丹, 碟里, 日羅夏治, 三佛齊

325. 外國 六

浡泥, 滿刺加, 蘇門答刺, 修文達那, 蘇祿, 西洋瑣里, 瑣里, 覽邦, 淡巴, 百花, 彭亨(作湓亨又作彭坑), 那孤兒, 黎伐, 南渤利, 阿魯, 柔佛, 丁機宜, 巴喇西, 佛郞機, 和蘭

326. 外國 七

古里, 柯枝, 小葛蘭, 大葛蘭, 錫蘭山, 榜葛剌, 沼納樸兒, 祖法兒, 水骨都束, 不剌哇, 竹步, 阿丹, 刺撒, 麻林, 忽魯謨斯, 溜山, 比剌 孫剌, 南巫里, 加異勒, 甘巴里, 急蘭丹, 沙里灣泥, 底里, 千里達, 失刺比, 古里班卒, 剌泥, 夏剌比, 奇剌泥, 窟察泥, 捨剌齊, 彭加那, 八可意, 烏沙剌踢, 坎巴, 阿哇, 打回, 白葛達, 拂箖, 意大里亞

327. 外國 八

韃靼

328. 外國 九

瓦刺, 㭆安, 福餘, 泰寧

329. 西域 一

哈密衛, 柳城, 火州, 土魯番,

330. 西域 二

西番諸衛, 西寧河州洮州岷州等番族諸衛, 安定衛, 阿端衛, 曲先衛, 赤斤蒙古衛, 沙州衛, 罕東衛, 罕東左衛, 哈梅里

331. 西域 三

烏斯藏大寶法王, 大乘法王, 大慈法王, 闡化王, 贊善王, 護敎王, 闡敎王, 輔敎王, 西天阿難功德國, 西天尼八剌國, 㭆甘烏斯藏行都指揮使司, 長河西魚通寧遠宣慰司, 董卜韓胡宣慰司

332. 西域 四

撒馬兒罕, 沙鹿海牙, 達失干, 賽藍, 養夷, 渴石, 迭里迷, 卜花兒, 別失八里, 哈烈, 俺都淮, 八答黑商, 于闐, 失剌思, 俺的干, 哈寶哈兒, 赤思弗罕, 火剌札 乞力麻兒, 白松虎兒, 答兒密, 納失者罕, 敏眞, 日落, 米昔兒, 黑婁, 討來思, 阿速, 沙哈魯, 天方, 默德那, 坤城, 哈三等二十九部, 魯迷

淸史稿

153. 志128. 邦交一

俄羅斯

154. 志129. 邦交二

英吉利

155. 志130. 邦交三

法蘭西

156. 志131. 邦交四

美利堅

157. 志132. 邦交五

德意志

158. 志133. 邦交六

日本

159. 志134. 邦交七

瑞典那, 丹墨, 和蘭, 日斯巴尼亞, 比利時, 義大利

160. 志135. 邦交八

奧斯馬加, 秘魚, 巴西, 葡萄牙, 墨西哥, 剛果

526. 屬國 一

朝鮮, 琉球

527. 屬國 二

越南

528. 屬國 三

緬甸, 暹羅, 南掌, 蘇祿

529. 屬國 四

廓爾咯, 浩罕, 布魯特, 哈薩克, 安集延, 瑪爾喝朗, 那木干, 塔什干, 巴達克山, 博羅爾, 阿富汗, 坎巨提

(明史의 土司, 淸史稿의 土司, 藩部는 外夷에서 제외함)


  이글루스 유저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랜만입니다.

  동유럽 갔다와서 여유가 생길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더군요. 대학원 선배님과 한문 강독 하느라, 사람들 만나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아직 제 공부가 미진한 점이 많아서 역사벨리에 글을 올리기도 힘들더라구요. 그래서 이번 방학에는 이글루스를 방치했습니다. 그래도 역사벨리를 보면서 제가 부족한 부분을 조금씩 배워나가고 있습니다.
 
  이 표는 제가 한문강독 스터디를 하면서 중국 24사에서 외이, 외국들의 리스트를 추려내서 만든 표들입니다.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19세기까지의 동아시아의 국제질서, 중국의 四夷,  外國 개념의 변화를 살펴볼 수 있을 것 같아서 올려봅니다. 확실히 이렇게 표로 만들고 나니까 깔끔하게 정리가 되는 것 같더군요. 관심이 있는 이글루스 여러분께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공부를 더 한 다음 좋은 글로 다시 이글루스에 나타나겠습니다.

홀로코스트 관련 서적들을 읽고 있습니다. History? 歷史?


  6월 29일날부터 7월 10일까지 학교 해외문화탐방을 떠나게 되어 독일 뮌헨- 체코, 슬로바키아-헝가리- 폴란드를 돌아다니게 됐는데 이놈의 학교는 학기 중에도 모자라서 해외여행 중에도 조별 과제를 시키고 있습니다. 조별 과제로 지쳐있지만 그래도 그것도 나름 지역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괜찮은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홀로코스트' 조에 들어가서 동유럽 지역의 홀로코스트를 집중적으로 조사하게 되었는데, 가기 전에 몇몇 책들을 읽고 있고, 읽고자 구입했습니다. 역사를 좋아하시는 분들께서도 흥미로운 주제일 것 같아 일단 제가 확보한 책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1. 마르틴 보르사트, <히틀러 국가>, 문학과 지성사, 2011.



2. 로버트 S 위스트리치, <히틀러와 홀로코스트>, 을유문화사, 2004

 
3. 볼프강 벤츠, <홀로코스트>, 지식의 풍경, 2001.


4. 최호근, <서양 현대사의 블랙박스, 나치대학살>, 푸른역사 2006.


  물론 홀로코스트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히틀러의 <나의 투쟁>이나 라울 힐베르크의 <홀로코스트, 유럽 유대인의 파괴>도 읽고 싶었는데, 시간도 안되고 라울 힐베르크 저서는 너무 분량이 많고 비싸서 구입을 포기했습니다. 일단 지금 확보한 4권 정도를 가기 전, 비행기 안에서 읽으려고 합니다. 제 주요 관심사가 전근대 동아시아사이다 보니 사실 서양 현대사에 대한 지식은 짧습니다. 혹시 서양사에 관심이 많으신 분들은 홀로코스트에 대한 좀더 좋은 책들을 알려주시길 바랍니다.


"좋은 책 좀 알려달란말이야!!!!!!!!"

주치, 사생아로 낙인찍힌 늑대의 아들(下) 초원유목사


 3. 아버지 밑에서....  

  출생의 비밀에도 주치는 비교적 평탄한 유년 시절을 보낸 것 같다. 테무진 역시 주치를 자신의 장자(長子)로 인정하였고, 몽골 부락 내에서도 암묵적으로 주치가 테무진의 장자라는 것이 인정되었던 것 같다. 주치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남아있는 기록이 그다지 없다.  주치의 유년기는 몽골 초원사회가 통일된 구심점이 없이 서로 투쟁하던 혼란기로 주치 역시 그 혼란기 속에서 몽골의 전사로 성장했을 것이다. 주치의 유년기에서 특기할 만한 사건은 주치의 결혼 문제를 두고 테무진과 케레이트 부가 대립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 케레이트 부 옹 칸 토그릴(허영만 웹툰 <말에서 내리지 않는 무사>)
 
  케레이트 부의 옹 칸 토그릴은 테무진의 아버지 예수게이와 의형제를 맺었고, 테무진도 아버지처럼 믿었던 존재이다. 테무진은 케레이트 옹 칸의 지배권을 인정하면서 그의 신하로서 충성을 다했다. 또한 옹 칸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위기에서 구출해주었다. 하지만 테무진의 세력이 점차 확장되면서 옹 칸과 케레이트 사람들은 그를 경계하기 시작하였고 케레이트와 테무진의 갈등도 점차 커졌다. 그러한 케레이트와 테무진의 관계가 회복불능의 상태로 전환된 중요한 계기 중 하나가 바로 주치의 결혼 문제였다. 

  1202년 경 테무진은 주치와 토그릴의 아들 셍굼의 딸을 결혼시키고 셍굼의 아들 토사카에게는 주치의 누나인 코진 베키를 주겠다고 청혼하였다. 케레이트와 몽골 부락의 대립을 최소화 시켜 케레이트와의 동맹을 확고히 하는 동시에 옹 칸이 죽은 이후 자신이 케레이트 부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계기를 만들고자 한 것이다. 하지만 셍굼은 "우리의 일가가 그들에게 가면 문 옆에 서서 항상 상석을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그들의 일가가 우리에게 오면 상석에 앉아 문 쪽을 바라볼 것입니다."(<몽골비사>. 165)라면서 결혼 동맹을 거부하였다. <집사>에 의하면, 주치가 옹 칸의 조카딸 벡투트미시와 결혼했다고는 하지만 셍굼과의 결혼 동맹 실패로 케레이트 부와 몽골은 결정적으로 반목하는 계기가 되었다.

 
    1206년 몽골의 대부분을 통일한 테무진은 몽골제국의 칭기즈 칸으로 즉위하였고 이어 자신의 가족들과 몽골 통일의 공신들에게 봉토를 나누어준다. 대체적으로 주치와 차가타이 우구데이에게는 몽골 서부의 영역을 분봉하였고, 대흥안령 일대를 포함한 몽골 동부는 카사르 벨구테이, 테무게 등 아우들에게 분봉하는 한편, 몽골 중부의 핵심지역은 대칸인 자신과 막내아들 톨루이의 차지가 되었다. 영토와 함께 인구도 분배되었는데, <몽골비사>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나라를 모으며 고생하신  것은 어머니다. 내 아들 가운데 맏이는 주치이다. 내 아우들 가운데, 가장 어린 것은 막내이다."(......) 주치에게 9,000의 백성을 주었다. 차가타이에게는 8,000의 백성을 주었다. 우구데이에게는 5,000의 백성을 주었다. 톨루이에게는 5, 000을 주었다. (.....)"(<몽골비사>.242)

  당시 칭기즈 칸은 천호를 95개로 조직하였고, 대략 천호조직을 바탕으로 병사로 쓸 수 있는 인원을 9만 5000으로 잡을 때  테무진 자신은 5만 500명을 취하고 나머지는 자식들과 동생들에게 분배했는데, 여기서 의문이 드는 것은 각자에게 분배된 천호의 수이다. 당시 몽골 사회는 대체적으로 막내아들이 부친의 재산과 권력을 승계하는 말자상속제(末子相屬制)인데 막내인 테무게의 경우에는 이러한 상속 원칙에 따라서 아우들 중에서 가장 많은 수의 천호가 배정되었지만 자신의 아들의 경우엔 달랐다. 

  말자상속의 원칙에 의하면 원칙상으로 톨루이에게 가장 많은 수의 천호가 배정되어야 하지만 도리어 장자인 주치에게 많은 수의 천호가 돌아갔다. 이는 칭기즈 칸이 자신의 황금씨족 내에서는 당시 유목사회의 전통을 무너뜨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 물론 말자상속의 원칙을 따를 경우 칭기즈 칸의 급서 이후 칭기즈 칸이 거느린 천호는 톨루이에게 돌아갈 수도 있겠지만, 톨루이에게 이미 5,000의 인구를 분배했다는 것은 당시 칭기즈 칸이 톨루이를 후계자로 생각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방증하지 않을까?

  오히려 당시 칭기즈 칸이 자신의 후계로 염두에 둔 것은 주치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이후에도 드러나지만 칭기즈 칸은 주치가 '맏이'라는 것을 계속 강조하였다. 이는 주치가 자신의 혈통임을 강조하여 주치에 대한 논란을 일단락 시킨 후, '장자'로 자신의 뒤를 잇게 하려는 의도일 가능성도 있다. 더군다나 칭기즈 칸 자신도 말자계승의 사회에서 예수게이의 '장자'로 보드지긴 가문의 가장이 되었던 것을 감안하면 칭기즈 칸이 장자인 주치를 자신의 계승자로 염두해 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1207년 몽골이 통일이 된 직후 칭기즈 칸은 몽골초원 주변부에 대한 정복전을 단행한다. 그 대상은 몽골 서북부의 키르기즈의 유목민들과 시베리아 일대의 "숲의 사람들"이라고 불리는 세력이었다. 숲의 사람들에 대한 전쟁을 총책임진 것은 바로 주치였다. 이 무렵 주치의 나이는 대략 20대 중후반이었을 것이라 짐작되며 <몽골비사>에서 최초로 등장하는 주치의 활약이었다. 주치의 원정은 성공적이었다. 키르기즈 인들을 비롯하여 숲의 사람들은 주치에게 항복하여 흰 송골매, 흰 거세마, 검은 담비들을 바쳤다.

  주치가 숲의 사람들에 대한 원정을 성공적으로 마치자, 칭기즈 칸은 크게 기뻐하여 상을 내리며, "내 아들들의 맏이, 너는 처음으로 집을 떠나 먼 길을 무사히 가서 인마를 해치지 않고 괴롭히지 않고 상서로운 숲의 사람들을 귀순시키고 왔다. 그 백성을 너에게 주겠다!"(<몽골비사>. 239)라고 말했다. 여기서에서도 칭기즈 칸은 주치를 자신의 장남으로 강조를 하고 있는데, 주치에 대한 지위를 공고히 해주고자 한 발언이 아닐까 싶다. 또한 숲의 사람들에 대한 원정을 통해 주치는 몽골 서북부와 시베리아 초원지대를 기반으로 한 자신의 영지를 확보하게 되었고, 이는 훗날 금장칸국의 형성에 기초적 틀을 마련했다.


  4.  '사생아'라는 멍에



  
  1206년 몽골통일 이후, 칭기즈 칸의 몽골제국은 당시로는 유래없는 광범위한 전쟁을 수행하기 시작한다. 서하와 금을 공격하여 중원 화북지역과 요동 지역을 장악한데 이어 1218년 오트라트에서 몽골 사신단이 살해된 일을 계기로 서방원정을 단행하기 시작한다. 1218년까지만 해도 주치를 비롯한 칭기즈 칸의 아들들은 묵묵히 아버지 밑에서 전쟁을 수행하며 전사로써 삶을 살았다. 그런데 오트라트 사건으로 호라즘 원정을 결의하고자 쿠릴타이를 소집하면서 자식들 간에 불화가 터져나왔다. 주치의 위기이자 주치와 아버지가 반목하는 계기가 되는 사건이었다.

  문제의 발단은 칭기즈 칸이 총애하던 3번째 부인이었던 예수이의 진언에서 비롯되었다. 예수이는 쿠릴타이에서 만약 "큰 나무 같은 그대의 몸이 기울어 가면 난마같은 당신의 나라를 누구에게 맡기시렵니까?(<몽골비사>.254)"라고 칭기즈 칸에게 물었다. 비록 예수이의 입에서 나왔지만 이러한 예수이의 발언은 호라즘 원정 직전 후계구도를 확실히 하려는 칭기즈 칸의 정치적 계책에서 나온 가능성이 크다. 칭기즈 칸 역시 제국이 점차 확장되고 자신의 나이가 점점 들어감에 따라 자신의 사후 제국을 안정적으로 이끌 수 있는 후계자를 정하고자 했을 것이고, 호라즘 원정이라는 기회를 틈타 그러한 정치적 작업을 완성시키고자 했을 가능성이 높다.

  칭기즈 칸이 염두에 둔 후계자는 누구였을까? 개인적인 추측으로는 주치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 까닭은 칭기즈 칸이 예수이의 말에 호응하면서, ""내 아들들의 맏이는 주치다. 주치야. 너는 무슨 말을 하겠느냐?(<몽골비사>.254)"라고 했기 때문이다. 칭기즈 칸은 주치를 다시 한번 자신의 맏아들이라고 강조하면서 주치를 자신의 후계자로 발탁하고자 한 것 같다. 하지만 이러한 아버지의 의도에 제동을 건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그는 둘째 아들 차가타이였다.



  주치가 무슨 소리도 내기 전에 차가타이가
  "주치가 말하라고 하실 때에는 주치에게 맡기고자 말씀하시려는 것입니까? 우리가 어찌 이 메르키드 잡놈에게 통치를 받겠습니까?'
   하고 뱉어 버렸다.
   주치가 일어나서 차가다이의 옷깃을 틀어쥐고
   "칸 아버지께서도 달리 말씀하신 적이 없다. 네 놈이 어떻게 나를 차별하느냐? 네 놈이 무슨 재주로 나보다 더 나으냐? 너는 단지 괴팍스러운 것만 나보다 더할 뿐이다. 멀리 활을 쏴서 네게 떨어지면 내 엄지 손가락을 잘라 버리겠다. 씨름을 해서라도 네게 지면 넘어진 자리에서 안 일어나겠다. 칸 아버지의 분부를 알게 하소서."
  하고 말했다. 주치와 차가타이가 서로 옷깃을 틀어쥐고 다투고 있을 때 주치의 팔을 보르추가 잡아 끌고 차가타이의 팔을 무칼리가 잡아 끌었지만 칭기즈 칸은 듣고서도 잠자코 앉아 있었다. (<몽골비사>.254)

   차가타이는 주치의 출생에 대한 논란을 제기하면서 주치가 후계자가 되는 것을 막고 주치와의 불화에 불을 지폈다. 칭기즈 칸이 지속적으로 주치를 장자로 인정하는 발언을 했지만 주치의 탄생에 대한 논란은 은밀하게 황금가문과 몽골 귀족 사회 내에서 공유된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차가타이가 공공연하게 주치를 '메르키드 잡놈'이라 모욕할 수 있던 것이 아닐까? 그럼 차가타이가 이 시점에서 주치의 탄생에 대한 논란을 제기한 것은 무엇때문이었을까? 당연히 자신도 후계자로의 정당성을 보이고자 한 것이다. 주치를 '사생아'라고 낙인찍는다면 자연스럽게 후계구도에서 차남인 자신이 유리해질 것이 분명했다. 차가타이의 발언은 몽골제국의 후계구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칭기즈 칸의 태도이다. 그는 아들들의 싸움이 격렬해짐에도 불구하고 잠자코 앉아 있었다. 여러 사람들이 이러한 칭기즈 칸의 태도에 대해서 여러 해석을 내놓고 있다. 혹자는 분노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라고 주장하기도 하고, 혹은 주치가 메르키드 출신이라는 것을 암묵적으로 인정했다는 표현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보기에는 칭기즈 칸의 후계구도에  대한 복잡한 속내를 함축적으로 표현한 문구가 아닌가 생각한다. 칭기즈 칸은 후계구도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후계자 문제를 제기했지만 도리어 그것이 자식들 간의 불화를 초래하고 더 나아가서는 몽골제국의 분열을 초래할 수 있었다. 따라서 칭기즈 칸은 자식들의 다툼을 가만히 앉아 지켜보면서 후계구도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다시 정리했을 것이다. 

△ 우구데이

    쿠쿠 초스가 차가타이를 설득시키면서 주치와 차가타이의 다툼은 끝났다. 칭기즈 칸은 자식들에게 엄명을 내려 주치가 자신의 맏아들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각인시켰지만 차가타이의 발언으로 인해 황금가문에서의 주치의 위상은 추락했고, 후계구도에서도 밀려나게 되었다. 결국 칭기즈 칸은 셋째 우구데이를 후계자로 선택하고 주치와 차가타이도 이에 대해 인정하면서 결국 후계자 문제는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주치로써는 큰 타격을 입었다. 자신은 몽골제국의 차기 칸 자리에서도 밀려났을 뿐만 아니라 칭기즈 칸의 장자라는 확고한 위치에서도 밀려나 도리어 '사생아'라는 굴레를 지게 되었다. 결국 이 일을 계기로 주치와 그의 가족들 사이의 불화가 계속되었다.


  5. 끊이지 않는 불화, 그리고 의문스러운 죽음

△ 우르겐치 시가지
 

   우구데이가 후계자로 지목되면서 잠시 멎어들었던 주치와 형제들의 갈등은 칭기즈 칸 서방 원정 중 다시 터졌다. 문제의 발단은 우르겐치 공격이었다. 우르겐치는 아랄 해 인근의 호라즘 제국의 옛 수도로 호라즘 제국의 주요도시 중 하나였다. 칭기즈 칸은 우르겐치 공략을 세 아들에게 일임하였다. 결국 우르겐치 공략을 계기로 해서 다시 형제들 간의 불화가 표출되었다. 애초에 우르겐치는 칭기즈 칸이 주치의 영지로 주기로 약속한 지역이었고 주치는 자신의 영지를 보호하기 위해서 군대의 약탈과 학살을 막고자 하였고, 차카타이는 이에 대해 크게 반발하였다. 결국 주치와 차가타이의 불화로 인해 우르겐치 공성전은 지체되었고 이로 인해 칭기즈 칸의 노여움을 샀다.

  우르겐치 사건에 대해서 <집사>는 주치와 차가다이의 불화로 인해 7개월 동안 몽골군이 우르겐치를 함락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칭기즈 칸이 분노하여 톨루이를 대신 보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몽골비사>의 경우는 성을 함락시킨 이후 전리품과 성의 사람들을 나누는 과정에서 세 아들이 자신의 몫만 챙기기 급급하여 칭기즈 칸의 몫은 챙기지 않아 칭기즈 칸이 분노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기록마다 내용에 다소 차이가 있지만 우르겐치 공격을 계기로 형제들, 특히 주치와 차가타이 간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이 틀어져 버렸고, 뿐만 아니라, 주치와 아버지 칭기즈 칸의 관계도 어그러졌다.

  주치와 칭기즈 칸의 갈등을 보여주는 것이 1223년에 열린 사냥대회였다. 칭기즈 칸은 서방 원정이 거의 마무리되자 몽골 초원으로 돌아와서 거대한 사냥대회를 개최하였다. 그동안 원정에서 노고가 큰 장군들과 군사들의 사기도 높일 겸, 후계 문제로 인해 소원해 진 가족관계를 회복하고자 한 것으로 생각된다. 많은 장수들과 칭기즈 칸의 가족들이 사냥에 참가했지만 한 사람만은 보이지 않았다. 바로 칭기즈 칸의 맏아들인 주치였다. 사냥 대회가 열렸을 때 주치는 호라산 지역에서 자신의 영지를 경영하고 있었다. 결국 아버지와 아들은 영영 만나지 못했다. 그리고 사냥대회가 열린 지 얼마 안 되서 주치의 사망 전보가 칭기즈 칸에게 전달되었다. 이 때 주치의 나이 대략 40세, 그리고 4년 후 칭기즈 칸 역시 서하에 대한 원정 도중 세상을 떴다.

  1223년 주치의 사냥 불참과 그에 뒤이은 주치의 죽음에 대해서는 석연치 않은 부분도 많다.  주지아니는 주치는 우르겐치 공성전 이후 부터 아버지에 대한 증오가 깊어졌고 호라즘 술탄인 무함마드와 공모하여 아버지가 사냥하는 틈을 타서 암살하고자 했지만 차가타이가 이를 알고 칭기즈 칸에게 보고 하였고 칭기즈 칸이 몰래 주치를 독살시켰다고 한다.  하지만 주지아니의 기록에는 다소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주치가 칭기즈 칸을 암살하고자 한 1223년에는 술탄인 무함마드는 이미 죽었다. 따라서 칭기즈 칸이 주치를 독살했다는 주지아니의 기록은 다소 과장되고 왜곡된 기록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주치의 죽음이 아버지 칭기즈 칸과 깊은 연관이 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1223년 주치가 칭기즈 칸이 개최한 사냥에 불참했다는 사건은 이미 형제 사이 뿐만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감정의 골이 깊어졌음을 의미하고 주치가 아버지 밑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것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칭기즈 칸이 주치의 행동에 두려움을 품은 것은 당연한 일이고 자신의 사후 몽골제국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주치의 희생은 불가피했을 것이다. 따라서 칭기즈 칸이 아들의 의문스러운 죽음에 어느 정도 개입했을 것이란 추측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나 추측일 뿐 주치의 의문스러운 죽음과 아버지와의 관계는 여전히 제대로 풀리지 않는 미스테리다. 결국 주치는 태어날 때처럼 죽어서도 의문을 남기고 떠났다.

 
  6. 결론

   지금까지 칭기즈 칸의 아들 주치의 삶을 살펴보았다. 칭기즈 칸이라는 세계적으로 걸출한 인물의 맏아들로 태어났지만 그의 삶은 사실 불운한 삶이었다. 어쩌면 그는 태어날 때부터 원치 않는 운명의 소용돌이에 빠졌다. 복수와 약탈이 뒤엉킨 13세기 몽골초원에서 복수와 원한의 결과로 세상에 나왔다. 그의 아버지는 몽골초원을 통일하고 유라시아 대륙의 대부분을 지배한 영웅이었고 그 역시 아버지 밑에서 용맹한 전사로 거듭났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사생아'라는 명예롭지 못한 꼬리표 아버지와  형제들의 냉대였다. 결국 최후 역시 베일에 쌓인 채 '손님'처럼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그의 삶은 어쩌면 비극이었다.

  주치의 비극은 주치 개인의 비극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칭기즈 칸 가문의 비극이자 크게는 몽골 제국의 비극이었다. 주치를 비롯한 형제들의 갈등과 불화는 칭기즈 칸의 생애에서는 조용히 무마되었다. 하지만 칭기즈 칸이라는 구심점이 무너지면서 황금가족 간의 갈등과 분열은 더욱 심화되었다. 결국 하나의 통합된 제국을 꿈꿔왔던 칭기즈 칸의 꿈은 물거품이 되고 그의 대제국은 4개의 칸국으로 분열되었다. 물론 주치의 삶이 4개 칸국의 분열을 초래했다는 것은 상당한 논리적인 비약일 것이다. 하지만 주치와 그의 형제들 간 갈등이 드리운 그림자가 몽골제국의 분열을 초래한 근본적이고 중요한 요인이었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그 갈등의 중심이 된 주치의 삶을 살펴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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