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로그


Borderline, Borderland, Frontier: '변경'의 개념 History? 歷史?

Borderline, Borderland, Frontier

전공이 청대 '변경사'이니만큼, '변경'에 대한 여러 개념들을 고민할 수 밖에 없다. 청대 만주어에도 'jase', 'jecen'이란 단어들이 있는데, 우리 번역에서는 모두 '변경'으로 번역하지만, 분명히 만주인들은 'jase'와 'jecen'의 의미를 다르게 보았다. 용례를 살펴보면 jase는 '界'라는 '선'적인 의미가 강한 것 같고, jecen은 '境'이나 '疆'이라는 '면'적인 의미가 강한 것 같지만, 둘 다 혼효되어 쓰이는 듯 하여 확실하지 않다.

요즘 영미권 학계에서도 청대 '변경사' 연구가 많이 나오다 보니, 영미권 연구도 많이 보는 편인데, '변경'을 의미하는 단어가 border, borderline, borderland, frontier 등 상당히 많다. 비영어권 연구자다 보니, 확실히 이런 단어들이 어떠한 맥락에서 쓰이는 지 와닿지가 않는다. 사전을 봐도 감이 잘 안 잡힌다. Border History/ Borderland history/ Frontier History 이 세 가지 단어는 한국에서는 퉁쳐서 '변경사'로 번역되기는 하지만, '변경'을 보는 관점에서 미묘한 차이점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동안 영어권 연구서들을 보면서 '변경'이란 의미 단어들의 개념들에 대해서 내 나름대로 정리해 보았다.


1. Border/Borderline: 경계선, 국경 '선' 그 자체를 의미한다. 

2. Borderland: '변경 지역'을 의미하지만, '변경 지역'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 같다. 즉 Borderland는 어느 한 편으로 귀속되지 않는다. 예컨대 19세기 두만강 변경 지역을 보자면 'Borderland of Tumen river'은 두만강을 둘러싼 청-조선-러시아 이 세 지역의 변경 지역을 모두 포괄하는 의미인 것이다. 만약 내가 'Borderland history'를 공부한다고 한다면 일국사적 관점에서 변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변경 지역 자체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다.

3. Frontier: Borderland와 Frontier는 정말 헛갈린다. 둘다 한국어 번역에서는 '변경지역'으로 번역되는 것이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Frontier는 Borderland보다 훨씬 폐쇄적이다. Frontier는 전방을 의미하는 Front에서 유래되었을 것이다. '전방'이라는 의미에는 '나'라는 주체가 포함된다. '나의 앞', 즉 '나'라는 주체가 어떤 상대를 맞이할 때 맞닿는 면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본다면 'Frontier'는 어떤 국가가 다른 국가와 경계를 접할 때 맞닿는 면을 의미하고, 한 국가에 귀속되는 '변경'의 개념인 것이다. 어쩌면 중국어의 '변강(邊疆)'의 의미에 가까울 듯 하다.

이러한 변경 개념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을 바탕으로 위 그림 같이 개념을 도식화 해 보았다. 내가 영문학 전공자가 아니라, 내가 정리한 개념이 정확한 건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변경'을 의미하는 다양한 영어 단어의 개념들을 나름대로 정리해보고 도식화해 보았다. 

조선시대 사화(士禍) 다시보기 동아시아사



1. 사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

  조선시대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기준으로 크게 조선 전기와 조선 후기로 나뉜다. 조선 전기를 대표할만한 사건을 꼽자면 연산군 때부터 명종 때까지 벌어진 4대 사화라고 할 수 있다. 사화라는 것은 말그대로 '사대부들이 입은 화'인데, 이 4대 사화를 통해서 주자학적 유교 윤리에 투철한 양반 사대부들이 본격적으로 관료 사회로 진출하게 되었고, 이후 조선 사회는 주자학에 입각한 윤리질서가 사회 전반을 지배하게 되었다.

 조선 전기의 4대 사화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많은 연구가 진행되었다. 그 중에서도 학계를 지배해 왔던 담론 중 하나는 사화를 '훈구'와 '사림'의 대립구도 속에서 설명하는 방식이었다. 즉 '훈구'는 대체로 고려 후기부터 중앙정계에 진출하여 조선 건국을 주도한 '관학파'로 보고, '사림'은 조선 건국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않고 중소지주로써 지방에서 영향력을 행사한 사족 집단으로 보면서, 사림 집단이 4대 사화를 통해 훈구의 핍박을 받았으나, 16세기 중엽 훈구파를 정계에서 몰아내고 조선의 정계를 장악했다는 이론이다. 이러한 고전적인 담론은 2000년 대 들어서 새로운 도전을 받았다. 그 도전의 근거는 '훈구'와 '사림'의 구분이 실제로는 상당히 모호하다는 것이었다. 특히 '사림'으로 분류된 관료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물론 지방 사대부 출신도 있었지만, 상당수가 이미 조부나 부부친 대부터 중앙관료로 진출한 양상도 보인다는 점에서, 훈구-사림의 구분은 더욱 모호해진다. 그래서 최근에는 '훈구'는 조선 세조의 왕위찬탈에 협력한 관료층을 가리키는 개념, '사림'은 세조의 왕위찬탈에 반발한 세력으로 규정하거나, 혹은 '사림'을 '성리학적 원리원칙'에 입각하여 관료 사회를 정화시키려는 '운동권' 인사들로 인식하기도 한다.

  그동안 학계에서의 이러한 다양하고, 활발한 논쟁으로 조선시대 사화에 대한 연구는 매우 풍성해졌다. 하지만 기존 연구들은 공통적인 맹점을 갖고 있다. 즉 '사화'를 '사대부 관료사회' 내부의 투쟁으로만 본다는 점이다. 이러한 시각 속에서 배제된 중요한 존재는 바로 조선왕조의 최정점에 있던 '국왕'이라는 존재였다. 

2. 사화의 실질적 주인공, 국왕

  조선의 국왕은 많은 역사학자들이 지적해 왔던 것처럼, 절대적 왕권을 휘둘렀던 명청 시대 황제들에 비해서 상당히 제한된 왕권을 가지고 있었다. 조선의 국왕들은 사상적으로 유교적 성군이 되기 위해 경연 등의 제도를 통해 관료 사회로부터 끊임없이 교육받아야 하였고,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즉 '삼사'라는 기관을 통해 왕권을 견제받았다. 하지만 이러한 제약에도 불구하고 조선 국왕은 관료 사회의 최정점에 위치한 존재였고, 제도적으로는 국가의 모든 안건은 그의 결재를 통해서야 시행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조선의 정치적 흐름은 국왕의 의중을 배제하고서는 설명할 수 없고, 4대 사화도 철저히 당시 국왕이었던 연산군, 중종, 명종(혹은 문정왕후)의 의도에 따라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즉 사화의 실질적 주인공은 국왕이었던 것이다.

△ MBC 드라마 <역적: 백성을 훔친 도적> 속의 연산군
 

  연산군 때 일어난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를 살펴보자. 우선 무오사화는 당시 사림파의 중심이었던 김종직의 제자이자, 사관이었던 김일손이 <세조실록>의 사초에 세조의 집권에 대해서 비판적인 글을 실은 것이 연산군에게 발각되어 일어났던 사건이다. 이 사건은 표면적으로는 훈구파인 이극돈과 유자광 등이 주도한 사건이었지만, 사건을 적극적으로 확대하고 사림파 관료들을 철저히 숙청한 것은 어디까지나 연산군이었다. 연산군은 즉위 초부터 아버지 성종 대부터 비대해진 관료들, 특히 '삼사'를 중심으로 한 언관들의 권력을 축소하는 데에 심혈을 기울였다. 연산군이 즉위 초부터 지속적으로 강조해 왔던 단어가 '능상(凌上)' 즉 '윗사람을 능멸한다.'는 것이었다. 연산군은 언관들의 '능상'을 누누이 지적하면서 언관들의 활동을 제약하려고 했다. 젊은 언관들의 비판 대상에는 연산군 뿐만이 아니라, 세조 대부터 집권했던 훈구파 관료들도 포함되었기 때문에, 훈구파 관료들도 연산군에 협력하였고, 그 협력의 일환으로이극돈과 유자광은 김일손의 사초를 연산군에게 보고하였다. 연산군은 훈구파의 협력을 통해서 무오사화를 일으켰고, '능상'을 일삼았던 언관들을 대거 숙청하였다. 무오사화만 본다면 사림과 훈구 양대 세력의 파벌 싸움처럼 보이지만, 이 역시도 실상은 '능상의 폐단'을 일소하려던 국왕 연산군이 주도한 것이었다. 

  연산군 대 2번째로 일어난 갑자사화는 국왕 주도의 친위쿠데타 성격이 더욱 강하다. 갑자사화는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 사사사건이 빌미가 되었던 사건이다. 무오사화에서는 언관직을 담당하던 사림파 사대부들이 주요 타겟이 되었지만, 갑자사화에서는 훈구 대신들도 연산군의 공격목표가 되었다. 연산군은 모친의 폐위에 찬성하거나 방조했다는 이유를 들어 관료들을 대거 숙청하였다. 연산군은 이를 통해 왕권을 제약하는 관료사회 전체를 억누르고, 자신의 독재체제를 강화하고자 하였다. 갑자사화를 보더라도 사림과 훈구의 대립이라기 보다는 전제왕권을 구축하려는 연산군과 관료사회 전체의 갈등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사대부 관료 사회도 연산군의 무제한적인 권력행사를 두고 보지 만은 않았다. 그들은 반정을 일으켜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그의 동생 진성대군을 옹립한다. 이것이 바로 중종반정이었다.

△ 조광조 영정

  중종은 자신이 정변을 주도하여 왕위를 쟁취한 왕이 아니라, 반정을 주도한 관료들에 의해 옹립된 왕이었다. 따라서 즉위 초반기에는 소위 반정공신들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었다. 중종이 숨통이 조금이나마 트일 수 있었던 것은 연산군의 폐단을 반성하자는 움직임이 사회에 불었다는 점이다. 반정공신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연산군의 측근이 대다수였지만, 그들도 연산군에게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이러한 조정의 분위기 속에서 성리학적 원리 원칙으로 충실히 무장한 신진 관료들이 다시금 언관직으로 나아가 조정으로 들어오게 되었는데, 이들 신진관료들의 대표 주자가 바로 조광조였다. 

  중종은 조광조를 통해서 반정 공신들을 견제하고, 자신이 연산군과는 다른 임금임을 보이고자 하였다. 중종의 각별한 신뢰 속에서 조광조는 1515년 조지서 사지로 조정에 입사한 이후, 4년만인 1519년 사헌부의 수장 대사헌으로 임명되었다. 실로 파격적인 승진이었다. 조광조와 그를 위시한 신진 관료들은 중종의 신뢰를 믿고 주자학적 이상론에 입각한 급진적인 개혁들을 추진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개혁들은 기존 관료들과 중종의 심기를 불편케 했다. 그 중 조광조와 중종이 가장 심각하게 대립한 것은 반정공신에 대한 위훈 삭제와 소격서 철폐였다.

  반정공신 위훈삭제 문제는 중종의 정통성까지 건드릴 수 있는 민감한 사안이었다. 물론 관료들 사이에서 반정공신 책봉에 대한 부당성은 상당부분 공유된 문제였다. 반정공신의 대다수는 연산군 대에 권력을 누리던 사람들도 많았고, 실질적인 공로가 없는 관료들도 많았다. 조광조와 신진 관료들의 입장에서는 이들 반정공신들은 청산해야 할 '적폐'였다. 하지만 중종으로서는 이들을 완전히 청산하기에는 매우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좋든 싫든 자신이 권력을 잡을 수 있도록 지원해 준 집단이었고, 이들을 청산하게 되면 자신의 중요한 우군을 잃는 셈이었다.

  소격서 문제는 어떻게 보면 상당히 지엽적인 문제였다. 소격서는 왕실의 안녕을 위한 도교나 무속 의례를 관장하던 기관이었고, 조선 관료 사회에서도 비중을 그다지 차지하고 있지 않던 관청이었다. 소격서에서 관장하던 의례는 왕실 소관이었기 때문에 관료들도 이 관청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하지만 조광조가 보기에 도교와 무속 신앙을 다루는 소격서는 성리학을 기반으로 한 조선에서는 결코 존재하지 않아야 할 기관이었고, 이에 강력히 소격서의 철폐를 주장하였다. 중종은 이것은 어디까지나 왕실의 문제이고, 성군이라 칭송되는 세종대왕도 철폐하지 않았다고 맞섰지만, 조광조는 소격서를 보전시킨 것은 '세종의 유일한 잘못'이라고 주장하면서, 소격서 철폐를 끝까지 주장하였다. 결국 소격서 철폐가 윤허됐지만, 이를 계기로 중종은 왕실의 일까지 들추어내는 조광조를 정적으로 보게 되었고 그 결과 '기묘사화'라는 사화가 발생하였다.

 기묘사화에 대해서 혹자는 중종이 남곤, 심정, 홍경주 등의 훈구파들의 강압에 의해 조광조 등 사림을 제거할 수 밖에 없었던 사건으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중종실록>의 기록을 보면 실상은 그러지 않은 듯 하다. 오히려 기묘사화는 중종의 적극적이고 치밀한 계획 하에서 일어난 사건이라는 인상이 강하다. 중종은 야밤에 몰래 남곤, 심정 등에게 밀지를 보내 조광조 일파를 일거에 계획할 의도를 내비치고 우선 이들을 궁궐로 불러 구체적 논의를 한 후, 새벽에 관료들을 소집하여 조광조 일파가 붕당을 결성하여 임금을 업신여긴 중죄를 저질렀음을 공표했다. 조광조에 대한 처결에서도 중종은 매우 적극적으로 그를 처형해야 함을 주장하였다. 오히려 기묘사화의 주동자로 알려진 남곤이나 심정은 조광조의 처형은 가혹하다고 주장하였다. 기묘사화에서 보여준 중종의 태도에 대해 실록의 사관은 "마치 한 사람에게서 나온 행동이 아닌듯 하였다."라고도 평가하였다. 이렇듯 기묘사화는 중종의 주도면밀한 계획 하에 일어난 일종의 '친위쿠테타'였고, 남곤, 심정 등은 그러한 중종의 명을 충실히 수행한 관료들일 뿐이었다.

  마지막으로 명종 시기 일어난 을사사화도 훈구-사림의 대립이라기 보다는 중종 사후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벌어진 외척들의 정치 투쟁에 가깝다. 중종에게는 두 번째 왕비 장경왕후의 소생 인종과 세 번째 왕비 문정왕후의 소생 명종이 적자로 있었는데, 중종 사후 인종이 즉위하였으나 8개월만에 죽고 문정왕후의 아들 명종이 그 뒤를 이었다. 어린 명종을 대신하여 수렴청정을 하게 된 문정왕후(성렬대비)는 명종과 자신의 정통성과 권력을 확고히 하기 위하여 인종의 외숙부 윤임 일파를 제거하였다. 이것이 을사사화라고 할 수 있는데, 이 때 윤임의 일파로 분류된 여러 사대부들이 희생되긴 하였지만 이것도 훈구파에 의한 사림파 탄압이라기 보다는 문정왕후가 권력을 공고히 하는 과정 속에서 단행한 관료 사회에 대한 친위쿠데타 성격이 강하다.

3. 사화를 새롭게 보기: 왕권과 신권의 구도, 그리고 친위쿠데타


  지금까지 조전 전기 벌어진 4대 사화에 대해서 '국왕'의 시각에서 정리해 보았다. 기존의 연구에서는 대체로 사화를 훈구-사림이라는 구도 속에서 벌어진 사대부 관료들 간의 투쟁으로 그렸지만 '훈구'와 '사림'이라는 개념도 명확하지 않을 뿐더러 왕조 국가에서 가장 핵심인 왕의 역할은 제대로 해명되지 않았다. 하지만 '국왕'을 주체로 두고 사화를 살펴보면, 그 실상은 국왕은 사화를 주도한 주인공이었고, 국왕은 사화를 통해 신권을 억제하고 왕권을 신장시키려는 면모를 볼 수 있다.

  조선 건국부터 16세기 중엽까지 조선의 역사는 왕권과 신권의 줄다리기라고 볼 수 있다. 사대부 관료들은 국왕이 유교적 성군이 되기를 꿈꾸면서 제도적으로 끊임없이 왕권을 제약하려고 하였고, 국왕은 그러한 관료 사회의 움직임을 통제하며 좀더 국왕 주도의 정치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결국 그러한 양자의 충돌이 심각해져서 숙청과 유혈사태로까지 번진 것이 사화라고 할 수 있다. 국왕은 사화를 통해 관료 사회를 자신의 입맛에 맞게 재편하려고 했기 때문에 상당히 적극적으로 또한 치밀하게 사화를 주도해 나갔다. 이렇게 본다면 '사화'는 관료 집단 간의 정치투쟁, 파벌 다툼이기 보다는 왕권과 신권의 대립 구도 속에서 일어난, 사대부 관료 사회에 대한 국왕의 친위쿠데타로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사료 번역] 황청직공도-여송국(루손, 필리핀) 사료 번역

황청직공도 권 1


여송국(呂宋國, 만주어: lioi sung gurun)



△ <황청직공도>의 여송국 남녀


여송(吕宋, 루손, 필리핀)1은 남해(南海) 가운데에 있고, 복건성(閩省)의 장주(漳州)에서 매우 가깝다. 명 초에 조공하였다. 만력 연간에 불랑기(佛郎機, 스페인)2에게 합병 당하였으나, 그 나라 이름을 계속 사용한다. 불랑기는 점성(占城)의 서남쪽에 있었지만, 먼저 만라가(滿剌加)3를 멸하고, 또한 홍모(紅毛)4와 미락거(美洛居)5를 가운데로 나누었으며, 이때에 이르러서 여송을 격파하여, 더욱 부강해졌다. 그 중 다수가 향산(香山)의 오문(澳門, 마카오)에 건너와 살면서 무역한다


오랑캐들 중 여송에 사는 자들은 신장이 크고 코가 높으며 고양이의 눈동자에 매부리와 같다. 복식과 장신구는 대, 소서양과 대략 같다. 부인들은 넓고 크게 상투를 틀며 비녀와 귀고리를 꽂고, 네모난 옷깃에 가슴을 노출한다. 짧은 옷에 긴 치마를 입고, 치마 안에 속옷을 두 세 겹 두른다. 항상 수건을 쥐고서 머리를 가린다


*각주


1. 여송: 지금의 필리핀 루손섬을 이르는 단어, 여송은 '루손'을 음차하여 쓴 것이다.

2. 불랑기: 불랑기는 '프랑키'를 한자로 음차한 것으로, 동남아시아 이슬람 교도들이 유럽인들을 지칭한 데에서 유래하였다. 명조 말기에는 포르투갈과 스페인을 지칭하는 용어로 쓰였다.

3. 만라가: 지금의 말레이 반도와 싱가포르를 포함했던 믈라카 술탄국을 말한다. 명대에는 '만라가(滿剌加)'로 표기했으나, 청대 이후에는 '마륙갑(馬六甲)'으로 표기하였다.

4. 홍모(紅毛): 네덜란드 인들을 지칭한다. 홍이(紅夷), 홍모이(紅毛夷)라고도 한다.

5. 미락거: 지금의 인도네시아 말루쿠 제도를 지칭한다. 


[사료 번역] 황청직공도-간포채(지금의 캄보디아)

청직공도 권1


간포채(柬埔寨, 만주어: dung bu jai gurun)



△ <황청직공도>의 동포채 남녀


간포채(柬埔寨)1는 곧 진랍국(真臘國)으로, 안남(安南)과 섬라(暹羅) 사이에 끼어있으며, 수·당과 송대(宋代)에 모두 조공하였다. 명 초에도 일찍이 왔는데, 처음에는 감패지(甘孛智)라고 칭하다가, 만력 연간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사람들의 성정은 유약하고 코끼리를 다루는 데에 능숙하여, 코끼리를 펼쳐 진을 만들어 적을 막는데에 이용한다. 항상 검을 하고 산에 들어가서 무소 뿔(犀角)을 취하여, 두목에게 바친다. 남자는 머리를 자르되 머리를 덮을 정도이고, 몸은 옷으로 겨우 하체를 가릴 정도이다. 여자는 머리를 끌어올려서 팔을 노출하고 오직 그 가슴만 가린다. 치마를 두르고 맨발이며, 뽕을 키워서 누에를 키우는 데에 능하고, 또한 자리를 짜는 데에 능하다.


*각주 

1. 간포채(東埔寨): 지금의 캄보디아이며, 진랍으로도 불렸다.


[사료 번역] 건륭제 "어제라마설(御製喇嘛說)" 사료 번역

건륭제의 어제라마설


만주인의 청조의 다원적인 측면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티베트와의 관계이다. 청조는 중원으로 들어오기 전부터 티베트와의 우호 관계를 수립하고자 했는데, 그 까닭은 16세기부터 몽골 유목사회에서 티베트 황교(겔룩파 불교)가 주요 신앙으로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몽골을 장악하여 중앙유라시아 초원사회의 패권을 잡고자 했던 청조는 티베트 황교를 우대하는 정책을 펴면서 초원사회를 문화적으로 장악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청조 황제들은 달라이라마나 판첸라마 등 티베트의 고승들을 북경이나 열하로 초청하여 그들을 황제의 스승으로 존숭하고 우대하는 모습을 종종 보였다.

그러나 청조가 티베트 황교에 대해서 마냥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청조의 초대 황제 태종 홍타이지나 강희제 등은 몽골인들이 티베트 불교에 깊이 빠져 그들의 상무적 기풍과 기강을 잃었다면서 만주인들이 티베트 불교를 신봉하는 것을 경계하였다. 청조는 티베트 불교를 몽골과 티베트 사회를 통제하는 하나의 문화적 통치 도구로 이용하였다.

청조는 티베트 불교 사회 자체도 통제하려고 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가 '금병제첨' 제도이다. 티베트 불교 사회는 고승들의 '환생'을 통하여 불법의 계통이 전승된다고 믿었다. 그래서 달라이라마 등의 고승이 입적하면, 그 제자와 문도들은 고승이 자신의 환생이라고 지명한 아이(이를 티베트에서는 후비르한)를 데려와 교육시키고, 아이가 장성하면 정식으로 '활불(티베트어로 쿠툭투)'로 삼는다. 그런데 1792년 청조의 건륭제는 이 티베트의 환생제도에 개입하여 청조가 만든 금병에 후비르한 후보들의 이름을 적은 산가지를 보관하고, 청조의 주장대신(청조 티베트 통치의 최고 책임자) 감독 하에 달라이라마나 판첸라마 등 고승들이 산가지를 추첨하여 후비르한을 선발하는 제도를 만들었다. 명목상으로는 특정 가문이 후비르한 배출을 독점하는 것을 막는다는 것이지만, 청조가 직접 후비르한 선출에 관여하여 티베트 불교 사회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려는 목적이었다.

이러한 건륭제의 의도를 잘 드러낸 것이 1792년 건륭제가 직접 지은 <어제라마설>이다. 건륭제가 '라마설'을 직접 지은 것은 두 차례 네팔 구르카와의 전쟁이 계기가 되었다. 네팔의 구르카는 히말라야 일대의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티베트 남부 시카체를 침공하여 판첸라마가 거주하던 타쉬룬포 사원을 불태웠다. 청조는 푸강안(福康安)을 파견하여 구르카 군을 티베트 밖으로 몰아냈지만, 이를 계기로 티베트에 대한 청조의 영향력을 강화해야겠다는 결심을 세우고, 티베트 통치 강화를 모색한다. 건륭제의 어제라마설도 이러한 상황 속에서 나온 것이었다. 건륭제의 <어제라마설>은 북경의 티베트 사원인 옹화궁(건륭제의 아버지 옹정제가 황제로 즉위하기 전 거주하던 저택이었지만, 이후 건륭제가 티베트 불교 사원으로 개조함) 불전 앞의 비석에 만주문자, 몽골문자, 티베트 문자, 한문 4개 문자로 새겨졌다.

건륭제는 <어제라마설>을 통해, 청조가 금병제첨 제도를 통해서 티베트 통치를 강화하는 정당성을 피력하였고, 아울러 청조가 티베트 황교를 우대하는 정책은 어디까지나 몽골을 안정시키기 위한 수단이지, 결코 진심으로 승려를 존중해서가 아님을 피력하고 있다. 또한 티베트 불교를 지나치게 숭상하다가 국정까지 망친 몽골의 원 왕조를 비교대상으로 언급하면서, 황교를 지나치게 우대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한인 관료들의 의구심을 불식하려고도 하였다. 이렇듯 건륭제는 자신을 티베트 불교의 보호자인 문수보살이나 전륭성왕으로 자처하면서도 티베트 불교 승려를 청조의 통제 하에 확실히 묶어두려는 '야누스'적인 태도를 보인다. 이러한 '야누스'적인 건륭제의 모습은 방대하고 다원적인 제국의 영역을 효과적으로 통치하려 하였던 대청제국의 통치전략을 보여준다.  



△ 건륭제는 자신을 티베트 불교를 보호하는 전륭성왕, 문수보살 등으로 자처하며 이를 묘사한 탕카(탱화)를 그리도록 하였다. 

○ 어제라마설 본문

불법은 천축에서 시작하여 동으로 서번(탕구트 부로, 그 땅은 삼짱이라 한다.)으로 흘러들어왔고, 번승들은 불법을 대대로 전하니, 그들을 라마라고 칭하였다. ‘라마라는 글자는 <한서>에는 실려 있지는 않고, <원사>와 <명사> 안에 喇馬라고 와전되어 기재되어 있다.(도종의의 <철경록>에서는 원과 명의 제사들의 칭호를 刺馬라고 칭하고, 명의 <무종외기>에서는 刺麻라고 칭하고 있는데, 모두 뜻에 따라 음을 대칭시킨 것이어서, 글자가 각기 다른 것이다.)

내가 곰곰이 그 뜻을 생각건대, 모두 서번어로 ()’을 말하고, ‘없음()’를 말하니, ‘라마라는 것은 無上을 말하며, 한어로 승려를 높은 사람으로 대우한다.’는 뜻이다. ‘라마는 또한 황교(黃敎)’라고도 칭한다. 서번의 고승 팍스파가 원대에 처음으로 일으키고, 명대에 이르기까지, 그 승려들을 제사(帝師)나 국사(國師)로 봉했다.(원 세조가 처음으로 팍스파를 국사로 봉했고, 이후 다시 대보법왕으로 봉하면서 제사로 존칭하였다. 동시에 담바라는 자도 제사에 봉하였으니, 하나로도 부족하였던 것이다. 명의 홍무 연간 초, 국사와 대국사로 봉한 것이 불과 4~5명이었고, 영락 연간에 이르러 법왕과 서천불자로 봉한 것이 각기 2, 이외 관정대국사로 봉한 것이 18명이었으며, 경태와 성화 연간에 이르러서는 이루 기록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우리 왕조에서는 강희 연간에 장기야쿠툭투 1명만을 국사로 봉하여 지금까지 세습하여 왔다. 우리 왕조에서 비록 황교를 부흥케 하였으나, 제사의 봉호를 더해준 적이 없었고, 오직 강희 45년 장기야쿠툭투를 관정국사로 봉하였고, 그가 입적한 후인 옹정 12년에 국사의 칭호를 그 후계자들이 칭하게 하였다. 달라이라마와 판첸에르데니라는 칭호는 원과 명의 구례를 따라 세습하도록 하는 데에 지나지 않다. 황교가 흥기한 것은 명대부터였는데, 번승 총가파는 영락 15년 정유년에 태어나서 성화 14년 무술년에 입적하였고, 그의 2대 제자를 달라이라마, 판첸라마라고 불렀다. 달라이라마는 황교의 수령으로, 그 이름은 로룬갸초라고 했고, 그 화신은 대대로 황교를 관장하였다. 1대는 건둔주바이고, 2대는 건둔갸초, 3대는 소남갸초로, 이 사람이 명대에 활불 소남갸초라고 하는 자였다. 4대는 운단갸초, 5대는 롭짱갸초였다. 우리 왕조 숭덕 7년에 달라이라마가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쳤고, 숭덕 8년에 달라이라마와 판첸쿠툭투에게 책서를 하사했으니, 원과 명의 옛 칭호를 잇게 한 것이었다. 우리 왕조가 입관한 후, 달라이라마에게 칙서와 인새를 하사하여, 중외의 황교를 총괄하도록 하였다. 대체로 중외 황교는 달라이라마와 판첸라마 이 두 사람에게 맡겼는데, 그 까닭은 몽골의 각 부가 한마음으로 그들에게 귀의하니, 황교를 부흥시키면 몽골을 안정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목적이 결코 작지 않았기 때문에 황교를 보호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지, 결코 원조의 전례처럼 번승들을 비호하며 존경해서가 아니었다.

 

원 왕조가 라마를 존중하여 정사에 장애가 있었던 폐단은 매우 많아서 물을 수 없다. 제사의 명령은 황제의 조칙과 함께 조회에서 백관이 늘어선 조회에서 행해졌고, 조회에서 제사는 왼쪽 모퉁이에 홀로 좌석이 있었다. 그 제자들의 호칭은 사공, 사도, 국공이었고, 금과 옥으로 된 인장을 찬 자가 매우 많았으며, 그 방자하고 하늘 높은 기세로 인해 사방에 해가 된 것이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서번의 승려들 중에는 심지어는 물품을 백성들에게 강매하며, 사람을 때리면서 머물게 하거나, 왕이나 후비와 길을 다투며 수레를 모는 일도 매우 심각하였고, 아울러 백성 중에 서번 승려를 구타하여 손을 부러뜨리는 경우에는 혀를 자르는 율에 처하기도 하였다. 우리 왕조도 황교를 부흥시켰지만, 원 왕조와는 크게 다르다. 몽골에서 불교를 받들고, 라마를 가장 믿으니, 그들을 보호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 왕조가 황교를 부흥시키는 것은 회유의 방법일 뿐이다.

 

쿠툭투가 세습하는 것은 승려들이 자식이 없어서 제자가 이어받는 것이니, 이 제자와 자식이 어찌 다른 바가 있겠는가? 그리하여 반드시 총명하고 복스러운 관상을 지닌 자를 찾아서 후비르한(한어로는 대대로 환생하는 사람이란 의미이다.)이라고 부른다. 이 후비르한을 어린 시절부터 교육시키고, 장성하게 되면 쿠툭투라고 부른다. 이 역시 어떻게 하지 못하는 와중에 나온 교묘한 임시방편일 뿐인데, 그 내력이 이미 오래되었으니, 여기서 다 말할 수는 없다. 요즘 세대를 곰곰이 생각건대, 그 풍속이 나날이 내려오면서 새롭게 탄생한 후비르한이 대체로 어떤 일족에서 배출되며, 이것이 세습하여 작위와 봉록을 받는 귀족들과 무엇이 다른가라고 하는데,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부처는 본래 태어남이 없는데, 어찌 전생이 있겠는가? 다만 지금 환생하는 쿠툭투가 없다면, 수만 명의 번승들은 귀의할 데가 없으니, 부득이 하게 이처럼 하는 것이다. 이전에 달라이라마가 입적한 후, 환생하여 후비르한이 되었다고 하는데, 1대 달라이라마는 후짱 지역의 샵도트 지역에 있었고, 2대 달라이라마는 후짱의 대 나트도르지담 지역에 있었고, 3대 달라이라마는 전짱의 두이롱 지역에 있었으며, 4대 달라이라마는 몽골 알탄 칸의 가문에 있었고, 5대 달라이라마는 전짱의 쫑차이 지역에 있었고, 6대 달라이라마는 리탕 지역에 있었으며, 현재 7대 달라이라마는 후짱 톱잘라리캉 지역에 있었다. 달라이라마가 태어난 지역이 1개 지역이 아닐진데, 하물며 일족에서만 태어나겠는가?

 

전대 판첸에르데니가 입적한 후부터 현재의 달라이라마와 판첸에르더니의 후비르한 및 칼카의 4부에서 받드는 젭준쿠툭투는 모두 형제, 숙질, 인척끼리 번갈아가며 세습한다. 이와 같이 황교를 관장하는 대라마의 후비르한은 모두 일가에서 배출되니, 친족 몇 명이 봉작을 세습하는 것과 다를 바 없어졌다. 몽골의 내외 각 자사크들이 받드는 대 후비르한도 근래에는 각 왕공의 자제들 중에서 전세화신을 뽑는 경우가 있고, 시레투 쿠툭투는 칼카의 친왕이자 구룬 어푸인 라왕 도르지의 숙부이다. 닥바쿠툭투는 아라샨의 친왕 롭장 도르지의 아들이고, 노이초르지쿠툭투는 사자부락의 군왕 라시얀비르의 아들이며, 칸부노몬칸 잠바르도르지의 후비르한은 투시예투 칸 처덩도르지의 아들이다. 이와 같은 일들이 열거하기가 힘들 정도이다.

 

또한 이전에 젭준담바 쿠툭투가 입적한 후, 투시예투 칸의 푸진이 임신했는데, 무리들은 임신한 태아를 젭준담바 쿠툭투의 후비르한으로 삼았다. 그런데 해산달이 되자 결국 여자 아이를 낳았으니, 웃음거리가 될 만 하였고, 몽골인들은 이를 이야깃거리로 삼고, 비판이 끓어오르는 데에 이르러서, 진심으로 귀의하고 믿지 못하였다. 심지어는 홍모파의 라마 사마르바가 타쉬룬포의 재산을 탐내면서, 스스로를 전대의 판첸에르데니 및 총파쿠툭투의 친형제이고, 재산의 소유권이 있다하면서 구르카를 부추겨서 변경을 혼란스럽게 하고 후짱지역을 약탈하였다. 지금은 비록 우리 왕조에서 크게 병위를 떨쳐서 구르카가 죄가 두려워 귀순하고 설설 기면서 목숨을 구걸하였지만, 만약 이러한 적폐를 없애지 않는다면, 장차 사사로이 후비르한의 지위를 주고 받을 것이니, 그렇게 되면 황교는 진흥하지 못할 것이고, 몽골과 번인들은 황교를 의심하고 경시하여, 혹여 사단이 일어날 것이다.

이로 인해 짱 지역에 유지를 내렸으니, 다음과 같았다.

 

만일 대라마가 후비르한을 정하는 일이 있으면, 기존의 풍속에 따라 람취쫑 4명에게 신내림을 받으며 경전을 외면서 각기 후비르한의 이름을 지목하게 한 후, 산가지에 그 이름을 적고, 경사(북경)에서 가져온 금으로 된 붐바 병 안에 이를 넣고 부처 앞에서 경전을 외게 한다. 달라이라마 혹은 판첸에르데니로 하여금 주장대신과 함께 산가지 하나를 뽑아, 후비르한을 정하도록 한다. 이렇게 하면 그 폐단을 완전히 제거하지는 못하더라도 이전에 각기 사사로운 뜻으로 후비르한을 지정하던 것과 비교하면 큰 차이가 있을 것이다. 또한 몽골의 대 후비르한에 대해서도 역시 이번원을 통해 공문을 보내서, 새로 정한 짱 지역의 예와 같이, 보고받은 후비르한의 이름을 옹화궁의 부처상 앞에 보관케 하고, 이번원의 관리가 인장을 관리하는 자삭다 라마 등과 함께 산가지를 뽑아서, 진정으로 환생한 이가 맞으면 후비르한 선발 경쟁을 멈추게 하라.”

 

지난해 구르카가 사마르바의 말을 듣고 짱 땅을 겁략하였으나, 그 명험함으로 비록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 왔으나, 그는 즉시 죄가 두려워 투항을 청했고, 짱 지역은 편안해졌다. 하지만 환생하는 후비르한이 일족에서 나오는 것은 사사로운 것이니, 부처가 어찌 사사로울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이를 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나는 금병 하나를 만들어서 서장으로 보내니, 환생하는 후비르한에 대해서는, 무리들이 몇 사람을 선발하여, 각기 그 이름을 써서 금병 안에 두고, 산가지를 뽑아 후비르한을 정한다. 그 방법이 비록 폐단을 완전히 없애지는 못하겠지만 이전에 한 사람만이 전생의 뜻을 받는 것보다는 대체로 공적일 것이다.

 

무릇 그 일의 시비를 정하는 것은 반드시 그 일을 익히고 그 이치에 밝아야 된다. 내가 만약 번인들의 경전을 익히지 않았다면 이러한 말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처음 번인들의 경전을 익힐 때, 어떤 자들은 황교를 지나치게 부흥시킨다고 하는 자들이 있었다. 가령 내가 헛되이 도태된 허명에 빠졌다면 지금의 신·구 몽골이 위엄을 두려워하고 덕을 품으며 수십 년간 태평한 것이 가능했겠는가? 하물며 후짱에서 반란을 선동한 라마는 즉시 정법되었다. (작년에 구르카가 후짱을 침입했을 때, 총파 쿠툭투는 이미 도망갔고, 대라마, 디쫑, 자창 등은 점복에 기대어 지킬 수 없다고 하여서, 여러 라마들이 뿔뿔이 흩어져 도망갔다. 이에 도적 떼들이 처음으로 약탈을 자행하였다. 그리하여 우두머리인 디쫑을 전짱으로 잡아와 무리들 앞에서 황모를 벗기고 정법하였고, 그 나머지 무리인 자창과 총파쿠툭투는 북경으로 압송하여 죄를 묻고 안착시켰다. 이러한 조처를 원조와 비교하면 원조에서는 라마를 지나치게 숭봉하여 국정에 장애를 끼쳤으니, 하물며 법으로 이들을 붙잡았을 수 있었겠는가? 우리 왕조가 황교를 보호한다고 하더라도 <왕제>에서 말하는 소위 그 가르침을 받들어 그 풍속을 바꾸지 않고, 그 정치를 정돈하면서 그 뜻은 바꾸지 않는다.’에 부합하니, 무리를 현혹시켜 법을 어지럽히는 자는 왕법으로 다스리는 것은 내지의 백성들과 다름이 없다. 묻건대, 팍스파 이래로 원~명을 거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대라마의 황모를 벗기고 정법하고 치죄한 것을 몇 번이나 본 적이 있느냐? 천하와 후세에 어찌 내가 황교를 지나치게 부흥시켰다고 비방할 것인가?)

 

원 왕조가 이러한 적이 있는가? 큰 일을 일으키는 자는 반드시 때와 기회를 가지면서, ()과 명()에 있어야 하니, 때와 기회가 왔어도 공과 명이 없이 결단하면 무언가를 이룰 수 없고, 공명의 결단력을 가지고 있어도 때와 기회가 아니면 먼 바다를 바라보듯 이룰 수 없다. 이번에 구르카를 항복시키고, 후비르한을 정하는 일은 때와 기회를 적절히 만났기에 말소리와 낯빛을 바꾸지 않아도 이룰 수 있었다. 후비르한의 환생을 일족에서 사사로이 결정하는 것을 일소한 일과 내·외 몽고를 합하는 숙원이, 이 늙은이가 정무를 반납할 해에 가까이에 이르러서 겹쳐서 일어나서 짱 지역과 번부가 안정되었으며, 국가가 영원히 평온할 기초가 정해졌으니, 나는 지금 기쁘고 더욱 공경스럽다.

 

건륭 57년 임자년 한겨울 친히 쓰다.

 


1 2 3 4 5 6 7 8 9 10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