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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번역] 황청직공도-아프리카 노예(黑鬼奴) 사료 번역

황청직공도 권1.


흑귀노(黑鬼奴: 아프리카 노예, 만주어:  he gui nu)



△ <황청직공도>의 흑귀노 남녀

대서양의 오랑캐들이 부리는 흑귀노(黑鬼奴: 아프리카 노예)1, 곧 당대(唐代)의 이른바 곤륜노(崑崙奴)2이며, <명사(明史)>에도 역시 "네덜란드(荷蘭) 사람이 부리는 ‘오귀(烏鬼)’"라고 기재했는데3, 해외의 여러 섬에서 태어난다. 처음 이르러 익힌 음식을 그들에게 주면, 며칠 설사를 하는데, 이를 ‘환장(換腸: 창자를 바꾼다.)한다.’고 하며, 혹 이 과정에서 병으로 죽기도 하지만, 만약 죽지 않으면 오랫동안 부릴 수 있다.


온몸이 매우 검어서 옻칠한 것과 같고, 오직 혀가 붉고 이가 하얗다. 붉은 베 모자를 쓰고, 여러 색이 섞인 짧은 베옷을 입는다. 항상 나무 곤봉을 쥐고 있다. 부인은 목에 채색한 베를 걸며, 가슴을 풀어헤치고 등은 노출한다. 짧은 치마에 바지는 입지 않았다. 손발에 팔찌를 찬다. 남녀 모두 검은 가죽 가닥으로 신을 만들어 신어서, 달려가기 편하다


대서양 오랑캐가 섞어 앉으면, 흑노(黑奴)가 음식을 바친다. 음식이 남으면 말구유와 그릇 1개에 쏟는데, 흑노 남녀들은 손으로 이를 뭉쳐서 먹는다. 오랑캐의 가옥들은 여러 층으로 이루어진 누대가 많은데, 흑노들은 아래에 거처하게 하며, 주인이 그를 미워하면 죽을 때까지 가두고, 배필을 거두지 못하게 하여, 그 족류를 번식하지 못함을 보인다.


각주

1.  흑귀노(黑鬼奴): 아프리카 지역의 흑인 노예를 말한다. 아프리카 노예는 16세기 대항해 시대가 시작되고, 서양인들이 동아시아와 접촉하면서, 함께 소개되었다. 우수한 신체 조건 등으로 명과 일본에서도 용병으로 고용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시기에도 명군의 용병으로 조선에 들어오면서 그 존재가 조선에도 알려졌다.


2. 곤륜노(崑崙奴): 곤륜노(崑崙奴)라는 명칭은 위진남북조 시기 역사를 기록한 <송서>와 <남사> 등에 나온다. 다만 이 시기 곤륜노가 아프리카 흑인 노예를 가리키는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서역이나 동남아 지역에서 들어온 사람들일 수도 있다. <송사>에서는 북송 태종 때 '대식국(아라비아)'에서 사신을 보냈는데,  그 종자가 눈이 깊고, 몸은 검은 색이었고, 이를 곤륜노라고 하였다고 적고 있다. 이를 보아 송대에는 아프리카 흑인 노예를 '곤륜노'라고 부른 듯 하다.


3. <명사> 325. <화란전(和蘭傳)>에 의하면, "그들(화란인)이 부리는 심부름꾼은 '오귀(烏鬼)'라고 부르는데, 물에 들어가도 가라앉지 않고, 바다 수면을 달리는 것이 평지를 달리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사료번역] 황청직공도-폴란드(波羅泥亞國) 사료 번역

황청직공도 권1


폴란드 국((波羅泥亞國, 만주어: bo lo nia gurun)


△ <황청직공도>의 폴란드 국 남녀


대서양의 폴란드 국(波羅泥亞國)1은 게르마니아 국(熱爾瑪尼亞國)의 동쪽에 있다. 그 사람들은 몽고를 방불케 하여서2 코 밑 수염은 있지만 턱수염은 없다. 머리카락은 자르되 정수리를 남겨 묶어서 머리 뒤로 넘긴다. 그 땅은 한랭하여, 초가을부터 초여름에 이르기까지, 모두 여우, , 담비, 쥐의 가죽 같은 가죽으로 만든 가죽 옷을 입는데, 길이가 다리와 머리를 덮을 정도이고, 가죽모자도 쓴다. 격검을 좋아하고, 집에서는 큰 곰을 길러 애완용으로 바친다. 부인들은 능력이 있어서 가정의 일을 전담하며, 내외에서 반듯하다. 그 땅에서는 숲에서 나는 벌꿀(蜂林), 호박(琥珀), , 양 등의 산물들이 난다. 


각주

1. 폴란드 국(波羅泥亞國): 지금의 폴란드. 스페인어로 폴란드를 'Polonia'라고 하며, 이를 한자로 음차하여 '波羅泥亞'라고 한 것이다.

2. 폴란드도 헝가리와 마찬가지로 몽골의 침입을 받았고, 몽골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전술적인 측면에서도 몽골기병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19세기 무렵까지 폴란드의 '후사르' 기병은 헝가리 마자르 기병과 함께 유럽 최정예기병으로 꼽힌다.


예수회 수사가 전하는 청의 티베트 및 준가르 정벌 이야기(2) 내륙아시아사

중국 황제에 의해서 새롭게 정복된 티베트와 오이라트 인의 왕국에 대한 서한 및 이들에 대한 정복의 이야기

2. 강희제 시대의 티베트에 대한 정치 개입과 준가르와의 전쟁


강희제

  1693년, 즉 유명한 강희제의 치세 33년에, 황제는 대라마를 대신하여 티베트를 통치하고 있는 젯파, 즉 집권(상게 갸초)에게 은상을 주고자 하였습니다. 그는 이 남자를 티베트의 공작으로 부르고, 금도장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젯파는 어째서인지 황제를 위해서 일을 하지 않으려 한 것입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그는 황제를 배신한 배신자이자, 만주 타타르인에 대하여 공연한 적수였던 오이라트(준가르)의 왕 갈단에게 완전히 충성을 바쳤던 것입니다. 그는 강희제에게 호출되었던 대라마의 북경행을 몰래 반대하기도 하였습니다. 달라이라마가 죽자, 그는 이 일을 비밀로 하고, 감쪽같이 황제에게 숨겼습니다. 그러나 1705년에 그의 범죄는 폭로되어 버렸습니다.

  구시 칸의 손자로, 달라이라마를 지키기 위해 티베트에 잔류하고 있던 오이라트(호쇼트) 인의 왕 라짱 칸은 젯파를 살해했습니다. 그리고 황제는 이 기회에 이 대신의 배신행위의 사실을 알고, 라짱 칸을 포상하고, 조정에서 대관(駐藏大臣, 만주어로는 암반)을 티베트로 파견하여, 오이라트 인의 이 군주와 협력하여 티베트를 다스리게 하였으며, 제6대 달라이라마(창양 갸초)를 임명했습니다.

준가르의 군주 갈단 보쇽투 칸

   1714년에 준가르가 티베트에 침입했습니다. 준가르라는 단어는 오이라트 사람들의 으뜸가는 왕의 칭호입니다. 이것은 몽골 타타르어로 "동쪽의 손"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는 것은 '춘' 혹은 '준'은 동쪽을 의미하고, '가르'라는 말은 손의 의미를 가지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자신들의 가족이나 군대를 동쪽과, '파룬탈'이라고 부르는 서쪽으로 나누는 것은 대부분의 타타르 군주들의 습관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유명한 칭호는 '동쪽의 손', 혹은 '동쪽 날개'였습니다. 그런데 준가르는 광대한 영역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코코노르, 티베트, 카쉬가르의 서부와 아울러 시베리아 국경 사이에 있는 모든 나라들의 주인이었습니다. 그는 불교를 신봉하고 있었지만 이수겐, 아스콘, 카쉬가르, 투르판 등 여러 나라의 그의 신하들은 거의 모두가 회교도들이었습니다. 강희제 때 준가르는 자신이 타메를란(티무르)가 낳은 모굴(몽골) 왕가의 출신이라고 칭했습니다. 가장 최근(1754년)에 통치했던 남자는 동서의 타타르 여러 왕 중 진정한 후계자라고 주장했습니다. 일반적으로 그가 진짜 칭기즈 칸의 자손의 하나라는 것은 사실이라고 믿어지고 있습니다.  

  어쨌든 위에 기록한 티베트 침입을 행했던 준가르는 체왕 랍탄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강력한 군대를 이끌고 이 나라에 들어와서, 여기에서 대약탈을 행했습니다. 전력을 다하여 싸우고자 했던 라짱 칸은 살해되고, 포탈라 사원은 불타서 거의 아무 것도 없는 상태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준가르는 이 사원과 이 나라의 모든 사원으로부터 금, 은, 동, 보석, 직물 기타 물건들로 이루어진 막대한 유물들을 약탈해 갔습니다. 그는 많은 장소에서 만주 타타르인의 편이 되었던 다수의 라마들과 많은 오이라트 인들을 살해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티베트의 진정한 왕이라고 주장하면서, 라마들이 이때까지와 같이 인민에 대해서는 어떠한 권위를 갖지 말 것, 그리고 승원 안에서 오로시 무병장수의 기원과 병든 사람을 보살피는 일에 몰두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티베트를 둘러싼 준가르와 청의 각축, 1715~1720년.(김호동, <아틀라스중앙유라시아사>, 사계절, 2016, p.203)

  그로 인해 라마들은 도망 가서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달라이라마는 강희제에게 도움을 구걸하여, 그 보호 하에 몸을 의탁하였습니다. 이 군주(강희제)는 당시 그의 통치 52년째에 이르고 있었습니다. 오이라트 인들의 추장들도 그에게 구원을 바랐고, 준가르가 티베트와 코코노르 국에 비밀리에 당여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한 빨리 도와달라고 구걸하였습니다. 강희제는 그들의 열렬한 성원을 거절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몽골 타타르인, 코코노르의 오이라트 인, 만주 타타르인, 아울러 중국(한인) 병사들로 이루어진 대군을 즉시 모았습니다. 그는 중국인과 타타르 인 중 노련한 관리를 뽑아서, 총사령관으로 그의 아들 중 1명과 손자 중 1명을 삼았습니다. 군대는 코코노르 국으로 진격하여, 이 땅에서 준가르 군을 추격하였고, 티베트에 깊이 들어갔습니다. 한편 중국군 별동 부대는 사천성에서 티베트로 들어갔습니다. 달라이라마와 다른 라마들은 사원에 숨었습니다. 준가르 밑에 남아 있던 자들은 산악의 험로를 따라 도망가서, 티베트는 황제의 보호 하에 평화를 회복하였습니다. 황제는 자신을 대신하여 이 토지를 다스리고, 준가르의 행동을 감시하기 위해 몇 명의 타타르 인 고위관리에게 라싸와 코코노르 국에 주둔할 것을 명령하였습니다.

  강희제의 자식이자, 후계자인 옹정제는 긴급한 경우에 오이라트 인들의 왕의 군대가 진출하는 것을 막기에 족한 군대를 유지하려고 생각하여, 이를 위해 뼈를 깎을 정도로 각오했습니다. 그러나 1727년 티베트에서 몇 명의 추장들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은 이 나라의 통치자라고 선언하고, 큰 혼란을 불러일으켰고, 옹정제가 티베트의 장군 및 지사로 임명해 두었던 제 4등급의 신분(버이서, 貝子)의 타타르의 한 공자를 죽였습니다. 그러나 반란은 계속 되지 않았습니다.  현재 황제(건륭제)는 선제가 티베트 총독으로 임명한, 실제로 모든 행정능력을 가지고 있는 한 사람을 제2등급의 자격(郡王)으로 승격시킴으로써, 어떠한 일이 있어도 준비를 충분히 갖췄습니다. (계속)

예수회 수사가 전하는 청의 티베트 및 준가르 정벌 이야기(1) 내륙아시아사

들어가면서

다음 글은 18세기 중국에 있던 예수회 선교사들이 프랑스 파리 예수회로 보낸 서한들을 모아서 편집한 <예수회 서간집(Lettres edifiantes et curieuses, ecrites des Missions Etrangeres)> 중에 청의 티베트 및 준가르 정벌에 관한 서한을 번역한 것이다. 이 <예수회 서간집>의 편지들은 1974년 야자와 토리히코(矢沢李彦)에 의해 일본어로 번역되어 총 5권의 <예수회 수사 중국 서간집>으로 출간되었고, 이 글은 그 중 5권 '기행편'의 8번째 서한을 번역한 것이다.

<예수회 수사 중국 서간집>은 청대 중국의 정치, 문화 사회 등의 정보 뿐만이 아니라, 청의 주변국들에 대한 풍부한 정보를 담고 있고, 당시 서구인들의 중국에 대한 인식을 알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여기에서 번역하는 편지는 당시 <예수회 서간집>을 번역했던 파튀에 수사가 아미오의 수사의 서한을 기반으로 하여 그 글들을 편집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글은 청의 티베트 및 신강 지역 정복 과정을 매우 상세히 다루고 있고, 티베트와 신강의 역사와 문화 정보도 담은 귀중한 자료이다.


중국 황제에 의해서 새롭게 정복된 티베트와 오이라트 인의 왕국에 대한 서한 및 이들에 대한 정복의 이야기

1. 강희제 이전의 티베트


라싸의 포탈라궁 전경(위키피디아)


  중국인이 티베트를 부르는 보통의 명칭은 장(藏)입니다. 그들은 또한 이 나라를 서장(西藏)이라고 부르는 데, '西'라는 것은 서쪽이라는 의미이고, 실제로 티베트는 중국의 서쪽, 운남, 사천 두 성의 저쪽에 있습니다. 옛날에는 이 나라는 융(戎)이나 강(羌)이나 서번(西蕃)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여기는 또한 '팔룬타라' 혹은 '발랑도르', 및 탕구트라는 이름으로도 불립니다.

  이 나라의 너비는 동서 6,400리, 즉 640뤼(1뤼는 4km), 남북은 6,500리, 즉  650뤼입니다. 200리는 1위도 내지, 20해리의 거리입니다. 동쪽으로 티베트는 사천의 변경까지 펼쳐져 있습니다. 그리고 티베트에서 중국으로 보낸 물품은 모두 먼저 사천성에 있는 타전로(打箭爐)로 가져오고 거기에서 북경으로 올라옵니다. 타전로는 매우 큰 무역시장이어서, 여기에는 토착의 한 가문이 중국 황제의 보호 하에서 세습적인 통치를 하고 있습니다.

  남쪽으로는 티베트는 운남의 변경과 접해있습니다. 서방으로 이 나라는 "대사해(大沙海)" 즉 모래가 많은 나라, 내지는 모래의 바다까지 펼쳐져 있습니다. 이렇게 말한 것은 이 3가지의 중국어들이 이러한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북쪽으로는 청해(靑海), 즉 코코노르의 나라까지 미칩니다.

  티베트에 관해서 무언가 명확한 것이 역사에 기록된 것은 겨우 진(晉) 왕조 이후, 크리스트 기원 420년 이후의 일입니다. 이 당시 토번이라고 불리는 군주가 있어서, 강(羌)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종족을 따라서, 함께 티베트의 주인이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와 그 후계자들은 1세기 이상 걸쳐서 이 토지를 지배하였지만, 중국과 어떠한 관계도 갖지 않았습니다.

  토번의 왕 농찬(송첸캄포)가 중국에 사절을 보낸 최초의 사람입니다. 이것은 크리스트 기원 624년, 당 왕조의 두 번째 황제인 태종의 치세 8번째 해의 일입니다. 이 사절 파견 7년 후, 이 농찬은 황제의 딸인 문성공주와 결혼했습니다. 이 결혼은 그를 매우 유력한 존재로 만들어 주어서, 그 결과 그는 코코노르 지방에 있던 토욕혼 왕국을 무너뜨리고, 중국의 서쪽에 있던 전 종족을 지배하에 거두어 들이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토번의 왕, 즉 티베트 왕의 세력은 거의 200년 간 유지되었습니다. 그러나 후에는 꽤 그 세력이 약해져서, 당 왕조의 말기, 즉 크리스트 기원 907년 경에는 거의 무력해져버렸습니다. 실제로 당 왕조의 최후의 몇 황제들의 시대에 이 토지에는 다수의 소국들이 분립했습니다. 크리스트 교도였을지도 모르고, 혹은 우상숭배자였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수도사 혹은 사제들이 큰 영지를 갖기 시작하였고, 여러 사원들의 지도자들이 조금씩 강력한 존재가 되어, 결국 군주와 같은 위치를 갖게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티베트 왕이라는 칭호를 가진 한 명의 왕이 언제나 존재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송 왕조 하에서 중국에 대한 조공자였습니다.

  이 쇠퇴는 그 후로도 점점 계속되어, (원 왕조의) 세조 쿠빌라이가 티베트 국을 많은 성(省), 즉 지역으로 나눌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이들 지역 중에서 중심이 된 지역이 오사장(烏斯藏)이었습니다. 이 곳은 티베트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이었고, 가장 평온한 분위기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이 곳에 티베트 전역의 수도인 라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조라는 사람은 코친 차이나 지역의 기록에서 '쿠빌라이'라는 이름이로 이야기되는 타타르의 황제 바로 그 사람입니다. 그는 형 뭉케의 사후 타타르의 황제가 되어 크리스트 교 기원 1280년에 전 중국 지역의 주인이 되고, 자기의 왕조에 원이라는 이름을 부여한 사람입니다. 당시 티베트에는 파스파라는 방주 내지 수도사가 있었습니다. 세조는 그에게 왕이라는 칭호를 주었습니다. 이 허락을 얻으면서, 파스파는 금으로 된 인장을 얻고, 티베트의 오사장, 기타 여러 지역에 재판소를 세웠습니다. 그는 게다가 황제의 스승, 국가의 박사, 법사라는 칭호 외에, 왕 내지 번왕(혹은 제 1급, 혹은 제 2급의 군주라는 의미)이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그의 후계자들도 이 큰 칭호를 받았고, 그와 마찬가지로 중국 황제에게 종속하였습니다.

  약 100년 후, 즉 1373년에 해당하는 홍무 6년에 남갸파라는 사람이 파스파를 대신하여 새로운 칭호를 이었습니다. 그는 파스파처럼 금색 인장을 얻고, 황제의 보호 하에 라싸와 티베트, 그 외 지방을 통치했습니다. 1428년에 시작한 선덕연간에 티베트의 방주들은 '대라마'라는 칭호를 얻었습니다. 그들 중에서도 유명한 사람인 총카파는 라싸에 수도원을 지었습니다. 그는 전 라마들의 수장이었습니다. 황모(黃帽)의 불교를 우세하게 만든 것도 그입니다. 대저 라마에는 두 종류 즉, 황모파와 홍모파가 있다는 것에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총카파의 뒤를 겐둔 추파(1391~1475)가 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젯파, 즉 집정직을 임명한 최초의 인물입니다. 그 뒤를 이어 소남(1542~1588)이 지도자가 되었는데, 그는 다른 라마들을 능가하는 최고의 칭호인 '달라이라마'라는 칭호를 쓴 최초의 사람입니다. 달라이라는 것은 물질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넓고 커서 끝이 없다는 의미에서 나온 것입니다.

  소남의 뒤를 윰덴(1588~1614)이 이었고, 그 뒤를 롭짱(1614~1708)이 이었습니다. 이 지도자의 때에, 장파 칸은 라싸의 서쪽, 갠지스 강의 하원 지대까지의 티베트의 상당한 부분과 갠지스 강 하반의 시리니갈 국까지 지배권을 뻗쳤습니다. 1624년 장파 칸의 궁정에 있던 예수회 수사 드 안드라드(Antonio de Andrade) 수사는 이 군주가 크리스트 교의 대보호자였다고 확언하고 있습니다. 당시의 타타르 역사는 그에게 상당한 페이지를 할애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타타르 역사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가르쳐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장파 칸은 불교, 즉 라마교를 방기해 버렸다는 것, 그는 이 종교를 없애고자 했다는 것, 민중을 학대했다는 것, 그 때문에 젯파와 달라이라마는 코코노르의 오이라트 사람들(호쇼트 부)의 군주 구시 칸에게 다수의 병력을 이끌고 티베트로 올 것을 명했다는 것, 유혈의 전투가 행해져서, 장파 칸은 패하고, 전장에서 죽은 것 등입니다. 이 타타르의 역사의 기사와 드 안드라드 수사의 기사를 대비해보면, 장파 칸은 크리스트 교도가 되었거나, 혹은 크리스트 교에 귀의하려고 희망한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됩니다. 구시 칸은 군대와 함께 티베트에 남았습니다. 그의 보호를 받은 달라이라마는 그에게 칸, 즉 왕의 칭호를 주었습니다.

순치제를 알현하는 제5세 달라이라마

  1642년에 달라이라마는 요동 지역(만주)의 숭덕제(崇德帝, 홍타이지), 즉 현재 중국을 지배하는 만주 타타르 왕조의 초대 황제(청 세조 순치제)의 아버지 측에 사절단을 파견했습니다. 달라이라마는 이 황제의 보호 아래에 몸을 두고, 공물을 바쳤습니다. 10년 후에(1652년), 달라이라마는 직접 북경에 찾아 와서 황제에게 신하가 될 것을 서약했습니다. 그는 여러가지 명예를 부여받아서, 황제에게 금도장과 호화스러운 증여품을 받았고, 그의 달라이라마라는 칭호를 인정받았습니다.(계속)

  

[사료번역] 황청직공도-헝가리(翁加里亞國) 사료 번역

황청직공도 권1


헝가리 국(翁加里亞國, 만주어: ung giya li ya gurun)




△ <황청직공도>의 헝가리 국 남녀 


대서양의 헝가리 국(翁加里亞國)1은 보스니아 국(波斯泥亞國, 실제로는 폴란드라고 추정)2의 남쪽에 있다. 그 사람들은 몽고를 방불케 하여서,3 의복이 매우 짧고, 바지 버선((袴襪)을 묶어서 신는 것이 각반이 있는 것 같다. 매우 지혜롭고 예절(禮貌)를 숭상한다. 어린 시절부터 말달리는 것을 익히는데, 그 말은 목이 짧지만 잘 달린다. 항상 굽은 칼(彎刀)를 차는데, 길이가 4척이다. 매번 말 위에서 기교를 시험한다. 부인들은 문자에 능통하며, 수를 놓는 것이 공교롭다. 문을 나서면 반드시 비단 천(紗綾)을 펼쳐 얼굴을 가린다. 물산은 매우 풍부하여, 소와 양은 다른 주(州)의 쓰임으로 바쳐진다. , , 구리, 철 등의 물건은 취하는 것이 고갈되지 않는다.


각주


1. 헝가리 국(翁加里亞國): '翁加里亞國'은 지금의 헝가리를 가리킨다. 혹은 우크라이나 지역을 표기하였다고 하는 주장도 있다.(줄리오 알레니, 천기철 옮김, <직방외기>, 일조각, 2005, p.186)

2. 보스니아 국(波斯泥亞國): ' 波斯泥亞國'은 '보스니아'를 한자음으로 음차한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헝가리, 혹은 우크라이나는 보스니아 북쪽에 있지, 남쪽에 있지 않다. <직방외기>나 <청조통전> 등의 유사한 기록에는 '波斯泥亞國' 대신  폴란드를 지칭하는 波羅尼亞國'으로 기재되어 있다. 아마 <황청직공도>의 오기가 아닌가 생각된다.

3. 헝가리는 유목민인 마자르 족이 기반이 된 나라다. 또한 폴란드와 함께 12세기~13세기 몽골제국의 침입을 직접적으로 받은 지역이다. 몽골 침입 이후 몽골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몽골의 기병 전술을 많이 흡수했다고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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