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아버지 밑에서....
출생의 비밀에도 주치는 비교적 평탄한 유년 시절을 보낸 것 같다. 테무진 역시 주치를 자신의 장자(長子)로 인정하였고, 몽골 부락 내에서도 암묵적으로 주치가 테무진의 장자라는 것이 인정되었던 것 같다. 주치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남아있는 기록이 그다지 없다. 주치의 유년기는 몽골 초원사회가 통일된 구심점이 없이 서로 투쟁하던 혼란기로 주치 역시 그 혼란기 속에서 몽골의 전사로 성장했을 것이다. 주치의 유년기에서 특기할 만한 사건은 주치의 결혼 문제를 두고 테무진과 케레이트 부가 대립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 케레이트 부 옹 칸 토그릴(허영만 웹툰 <말에서 내리지 않는 무사>)
케레이트 부의 옹 칸 토그릴은 테무진의 아버지 예수게이와 의형제를 맺었고, 테무진도 아버지처럼 믿었던 존재이다. 테무진은 케레이트 옹 칸의 지배권을 인정하면서 그의 신하로서 충성을 다했다. 또한 옹 칸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위기에서 구출해주었다. 하지만 테무진의 세력이 점차 확장되면서 옹 칸과 케레이트 사람들은 그를 경계하기 시작하였고 케레이트와 테무진의 갈등도 점차 커졌다. 그러한 케레이트와 테무진의 관계가 회복불능의 상태로 전환된 중요한 계기 중 하나가 바로 주치의 결혼 문제였다.
1202년 경 테무진은 주치와 토그릴의 아들 셍굼의 딸을 결혼시키고 셍굼의 아들 토사카에게는 주치의 누나인 코진 베키를 주겠다고 청혼하였다. 케레이트와 몽골 부락의 대립을 최소화 시켜 케레이트와의 동맹을 확고히 하는 동시에 옹 칸이 죽은 이후 자신이 케레이트 부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계기를 만들고자 한 것이다. 하지만 셍굼은 "우리의 일가가 그들에게 가면 문 옆에 서서 항상 상석을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그들의 일가가 우리에게 오면 상석에 앉아 문 쪽을 바라볼 것입니다."(<몽골비사>. 165)라면서 결혼 동맹을 거부하였다. <집사>에 의하면, 주치가 옹 칸의 조카딸 벡투트미시와 결혼했다고는 하지만 셍굼과의 결혼 동맹 실패로 케레이트 부와 몽골은 결정적으로 반목하는 계기가 되었다.
1206년 몽골의 대부분을 통일한 테무진은 몽골제국의 칭기즈 칸으로 즉위하였고 이어 자신의 가족들과 몽골 통일의 공신들에게 봉토를 나누어준다. 대체적으로 주치와 차가타이 우구데이에게는 몽골 서부의 영역을 분봉하였고, 대흥안령 일대를 포함한 몽골 동부는 카사르 벨구테이, 테무게 등 아우들에게 분봉하는 한편, 몽골 중부의 핵심지역은 대칸인 자신과 막내아들 톨루이의 차지가 되었다. 영토와 함께 인구도 분배되었는데, <몽골비사>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나라를 모으며 고생하신 것은 어머니다. 내 아들 가운데 맏이는 주치이다. 내 아우들 가운데, 가장 어린 것은 막내이다."(......) 주치에게 9,000의 백성을 주었다. 차가타이에게는 8,000의 백성을 주었다. 우구데이에게는 5,000의 백성을 주었다. 톨루이에게는 5, 000을 주었다. (.....)"(<몽골비사>.242)
당시 칭기즈 칸은 천호를 95개로 조직하였고, 대략 천호조직을 바탕으로 병사로 쓸 수 있는 인원을 9만 5000으로 잡을 때 테무진 자신은 5만 500명을 취하고 나머지는 자식들과 동생들에게 분배했는데, 여기서 의문이 드는 것은 각자에게 분배된 천호의 수이다. 당시 몽골 사회는 대체적으로 막내아들이 부친의 재산과 권력을 승계하는 말자상속제(末子相屬制)인데 막내인 테무게의 경우에는 이러한 상속 원칙에 따라서 아우들 중에서 가장 많은 수의 천호가 배정되었지만 자신의 아들의 경우엔 달랐다.
말자상속의 원칙에 의하면 원칙상으로 톨루이에게 가장 많은 수의 천호가 배정되어야 하지만 도리어 장자인 주치에게 많은 수의 천호가 돌아갔다. 이는 칭기즈 칸이 자신의 황금씨족 내에서는 당시 유목사회의 전통을 무너뜨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 물론 말자상속의 원칙을 따를 경우 칭기즈 칸의 급서 이후 칭기즈 칸이 거느린 천호는 톨루이에게 돌아갈 수도 있겠지만, 톨루이에게 이미 5,000의 인구를 분배했다는 것은 당시 칭기즈 칸이 톨루이를 후계자로 생각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방증하지 않을까?
오히려 당시 칭기즈 칸이 자신의 후계로 염두에 둔 것은 주치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이후에도 드러나지만 칭기즈 칸은 주치가 '맏이'라는 것을 계속 강조하였다. 이는 주치가 자신의 혈통임을 강조하여 주치에 대한 논란을 일단락 시킨 후, '장자'로 자신의 뒤를 잇게 하려는 의도일 가능성도 있다. 더군다나 칭기즈 칸 자신도 말자계승의 사회에서 예수게이의 '장자'로 보드지긴 가문의 가장이 되었던 것을 감안하면 칭기즈 칸이 장자인 주치를 자신의 계승자로 염두해 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1207년 몽골이 통일이 된 직후 칭기즈 칸은 몽골초원 주변부에 대한 정복전을 단행한다. 그 대상은 몽골 서북부의 키르기즈의 유목민들과 시베리아 일대의 "숲의 사람들"이라고 불리는 세력이었다. 숲의 사람들에 대한 전쟁을 총책임진 것은 바로 주치였다. 이 무렵 주치의 나이는 대략 20대 중후반이었을 것이라 짐작되며 <몽골비사>에서 최초로 등장하는 주치의 활약이었다. 주치의 원정은 성공적이었다. 키르기즈 인들을 비롯하여 숲의 사람들은 주치에게 항복하여 흰 송골매, 흰 거세마, 검은 담비들을 바쳤다.
주치가 숲의 사람들에 대한 원정을 성공적으로 마치자, 칭기즈 칸은 크게 기뻐하여 상을 내리며, "내 아들들의 맏이, 너는 처음으로 집을 떠나 먼 길을 무사히 가서 인마를 해치지 않고 괴롭히지 않고 상서로운 숲의 사람들을 귀순시키고 왔다. 그 백성을 너에게 주겠다!"(<몽골비사>. 239)라고 말했다. 여기서에서도 칭기즈 칸은 주치를 자신의 장남으로 강조를 하고 있는데, 주치에 대한 지위를 공고히 해주고자 한 발언이 아닐까 싶다. 또한 숲의 사람들에 대한 원정을 통해 주치는 몽골 서북부와 시베리아 초원지대를 기반으로 한 자신의 영지를 확보하게 되었고, 이는 훗날 금장칸국의 형성에 기초적 틀을 마련했다.
4. '사생아'라는 멍에
1206년 몽골통일 이후, 칭기즈 칸의 몽골제국은 당시로는 유래없는 광범위한 전쟁을 수행하기 시작한다. 서하와 금을 공격하여 중원 화북지역과 요동 지역을 장악한데 이어 1218년 오트라트에서 몽골 사신단이 살해된 일을 계기로 서방원정을 단행하기 시작한다. 1218년까지만 해도 주치를 비롯한 칭기즈 칸의 아들들은 묵묵히 아버지 밑에서 전쟁을 수행하며 전사로써 삶을 살았다. 그런데 오트라트 사건으로 호라즘 원정을 결의하고자 쿠릴타이를 소집하면서 자식들 간에 불화가 터져나왔다. 주치의 위기이자 주치와 아버지가 반목하는 계기가 되는 사건이었다.
문제의 발단은 칭기즈 칸이 총애하던 3번째 부인이었던 예수이의 진언에서 비롯되었다. 예수이는 쿠릴타이에서 만약 "큰 나무 같은 그대의 몸이 기울어 가면 난마같은 당신의 나라를 누구에게 맡기시렵니까?(<몽골비사>.254)"라고 칭기즈 칸에게 물었다. 비록 예수이의 입에서 나왔지만 이러한 예수이의 발언은 호라즘 원정 직전 후계구도를 확실히 하려는 칭기즈 칸의 정치적 계책에서 나온 가능성이 크다. 칭기즈 칸 역시 제국이 점차 확장되고 자신의 나이가 점점 들어감에 따라 자신의 사후 제국을 안정적으로 이끌 수 있는 후계자를 정하고자 했을 것이고, 호라즘 원정이라는 기회를 틈타 그러한 정치적 작업을 완성시키고자 했을 가능성이 높다.
칭기즈 칸이 염두에 둔 후계자는 누구였을까? 개인적인 추측으로는 주치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 까닭은 칭기즈 칸이 예수이의 말에 호응하면서, ""내 아들들의 맏이는 주치다. 주치야. 너는 무슨 말을 하겠느냐?(<몽골비사>.254)"라고 했기 때문이다. 칭기즈 칸은 주치를 다시 한번 자신의 맏아들이라고 강조하면서 주치를 자신의 후계자로 발탁하고자 한 것 같다. 하지만 이러한 아버지의 의도에 제동을 건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그는 둘째 아들 차가타이였다.
주치가 무슨 소리도 내기 전에 차가타이가
"주치가 말하라고 하실 때에는 주치에게 맡기고자 말씀하시려는 것입니까? 우리가 어찌 이 메르키드 잡놈에게 통치를 받겠습니까?'
하고 뱉어 버렸다.
주치가 일어나서 차가다이의 옷깃을 틀어쥐고
"칸 아버지께서도 달리 말씀하신 적이 없다. 네 놈이 어떻게 나를 차별하느냐? 네 놈이 무슨 재주로 나보다 더 나으냐? 너는 단지 괴팍스러운 것만 나보다 더할 뿐이다. 멀리 활을 쏴서 네게 떨어지면 내 엄지 손가락을 잘라 버리겠다. 씨름을 해서라도 네게 지면 넘어진 자리에서 안 일어나겠다. 칸 아버지의 분부를 알게 하소서."
하고 말했다. 주치와 차가타이가 서로 옷깃을 틀어쥐고 다투고 있을 때 주치의 팔을 보르추가 잡아 끌고 차가타이의 팔을 무칼리가 잡아 끌었지만 칭기즈 칸은 듣고서도 잠자코 앉아 있었다. (<몽골비사>.254)
차가타이는 주치의 출생에 대한 논란을 제기하면서 주치가 후계자가 되는 것을 막고 주치와의 불화에 불을 지폈다. 칭기즈 칸이 지속적으로 주치를 장자로 인정하는 발언을 했지만 주치의 탄생에 대한 논란은 은밀하게 황금가문과 몽골 귀족 사회 내에서 공유된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차가타이가 공공연하게 주치를 '메르키드 잡놈'이라 모욕할 수 있던 것이 아닐까? 그럼 차가타이가 이 시점에서 주치의 탄생에 대한 논란을 제기한 것은 무엇때문이었을까? 당연히 자신도 후계자로의 정당성을 보이고자 한 것이다. 주치를 '사생아'라고 낙인찍는다면 자연스럽게 후계구도에서 차남인 자신이 유리해질 것이 분명했다. 차가타이의 발언은 몽골제국의 후계구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칭기즈 칸의 태도이다. 그는 아들들의 싸움이 격렬해짐에도 불구하고 잠자코 앉아 있었다. 여러 사람들이 이러한 칭기즈 칸의 태도에 대해서 여러 해석을 내놓고 있다. 혹자는 분노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라고 주장하기도 하고, 혹은 주치가 메르키드 출신이라는 것을 암묵적으로 인정했다는 표현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보기에는 칭기즈 칸의 후계구도에 대한 복잡한 속내를 함축적으로 표현한 문구가 아닌가 생각한다. 칭기즈 칸은 후계구도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후계자 문제를 제기했지만 도리어 그것이 자식들 간의 불화를 초래하고 더 나아가서는 몽골제국의 분열을 초래할 수 있었다. 따라서 칭기즈 칸은 자식들의 다툼을 가만히 앉아 지켜보면서 후계구도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다시 정리했을 것이다.
△ 우구데이
쿠쿠 초스가 차가타이를 설득시키면서 주치와 차가타이의 다툼은 끝났다. 칭기즈 칸은 자식들에게 엄명을 내려 주치가 자신의 맏아들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각인시켰지만 차가타이의 발언으로 인해 황금가문에서의 주치의 위상은 추락했고, 후계구도에서도 밀려나게 되었다. 결국 칭기즈 칸은 셋째 우구데이를 후계자로 선택하고 주치와 차가타이도 이에 대해 인정하면서 결국 후계자 문제는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주치로써는 큰 타격을 입었다. 자신은 몽골제국의 차기 칸 자리에서도 밀려났을 뿐만 아니라 칭기즈 칸의 장자라는 확고한 위치에서도 밀려나 도리어 '사생아'라는 굴레를 지게 되었다. 결국 이 일을 계기로 주치와 그의 가족들 사이의 불화가 계속되었다.
5. 끊이지 않는 불화, 그리고 의문스러운 죽음
△ 우르겐치 시가지
우구데이가 후계자로 지목되면서 잠시 멎어들었던 주치와 형제들의 갈등은 칭기즈 칸 서방 원정 중 다시 터졌다. 문제의 발단은 우르겐치 공격이었다. 우르겐치는 아랄 해 인근의 호라즘 제국의 옛 수도로 호라즘 제국의 주요도시 중 하나였다. 칭기즈 칸은 우르겐치 공략을 세 아들에게 일임하였다. 결국 우르겐치 공략을 계기로 해서 다시 형제들 간의 불화가 표출되었다. 애초에 우르겐치는 칭기즈 칸이 주치의 영지로 주기로 약속한 지역이었고 주치는 자신의 영지를 보호하기 위해서 군대의 약탈과 학살을 막고자 하였고, 차카타이는 이에 대해 크게 반발하였다. 결국 주치와 차가타이의 불화로 인해 우르겐치 공성전은 지체되었고 이로 인해 칭기즈 칸의 노여움을 샀다.
우르겐치 사건에 대해서 <집사>는 주치와 차가다이의 불화로 인해 7개월 동안 몽골군이 우르겐치를 함락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칭기즈 칸이 분노하여 톨루이를 대신 보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몽골비사>의 경우는 성을 함락시킨 이후 전리품과 성의 사람들을 나누는 과정에서 세 아들이 자신의 몫만 챙기기 급급하여 칭기즈 칸의 몫은 챙기지 않아 칭기즈 칸이 분노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기록마다 내용에 다소 차이가 있지만 우르겐치 공격을 계기로 형제들, 특히 주치와 차가타이 간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이 틀어져 버렸고, 뿐만 아니라, 주치와 아버지 칭기즈 칸의 관계도 어그러졌다.
주치와 칭기즈 칸의 갈등을 보여주는 것이 1223년에 열린 사냥대회였다. 칭기즈 칸은 서방 원정이 거의 마무리되자 몽골 초원으로 돌아와서 거대한 사냥대회를 개최하였다. 그동안 원정에서 노고가 큰 장군들과 군사들의 사기도 높일 겸, 후계 문제로 인해 소원해 진 가족관계를 회복하고자 한 것으로 생각된다. 많은 장수들과 칭기즈 칸의 가족들이 사냥에 참가했지만 한 사람만은 보이지 않았다. 바로 칭기즈 칸의 맏아들인 주치였다. 사냥 대회가 열렸을 때 주치는 호라산 지역에서 자신의 영지를 경영하고 있었다. 결국 아버지와 아들은 영영 만나지 못했다. 그리고 사냥대회가 열린 지 얼마 안 되서 주치의 사망 전보가 칭기즈 칸에게 전달되었다. 이 때 주치의 나이 대략 40세, 그리고 4년 후 칭기즈 칸 역시 서하에 대한 원정 도중 세상을 떴다.
1223년 주치의 사냥 불참과 그에 뒤이은 주치의 죽음에 대해서는 석연치 않은 부분도 많다. 주지아니는 주치는 우르겐치 공성전 이후 부터 아버지에 대한 증오가 깊어졌고 호라즘 술탄인 무함마드와 공모하여 아버지가 사냥하는 틈을 타서 암살하고자 했지만 차가타이가 이를 알고 칭기즈 칸에게 보고 하였고 칭기즈 칸이 몰래 주치를 독살시켰다고 한다. 하지만 주지아니의 기록에는 다소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주치가 칭기즈 칸을 암살하고자 한 1223년에는 술탄인 무함마드는 이미 죽었다. 따라서 칭기즈 칸이 주치를 독살했다는 주지아니의 기록은 다소 과장되고 왜곡된 기록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주치의 죽음이 아버지 칭기즈 칸과 깊은 연관이 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1223년 주치가 칭기즈 칸이 개최한 사냥에 불참했다는 사건은 이미 형제 사이 뿐만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감정의 골이 깊어졌음을 의미하고 주치가 아버지 밑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것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칭기즈 칸이 주치의 행동에 두려움을 품은 것은 당연한 일이고 자신의 사후 몽골제국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주치의 희생은 불가피했을 것이다. 따라서 칭기즈 칸이 아들의 의문스러운 죽음에 어느 정도 개입했을 것이란 추측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나 추측일 뿐 주치의 의문스러운 죽음과 아버지와의 관계는 여전히 제대로 풀리지 않는 미스테리다. 결국 주치는 태어날 때처럼 죽어서도 의문을 남기고 떠났다.
6. 결론
지금까지 칭기즈 칸의 아들 주치의 삶을 살펴보았다. 칭기즈 칸이라는 세계적으로 걸출한 인물의 맏아들로 태어났지만 그의 삶은 사실 불운한 삶이었다. 어쩌면 그는 태어날 때부터 원치 않는 운명의 소용돌이에 빠졌다. 복수와 약탈이 뒤엉킨 13세기 몽골초원에서 복수와 원한의 결과로 세상에 나왔다. 그의 아버지는 몽골초원을 통일하고 유라시아 대륙의 대부분을 지배한 영웅이었고 그 역시 아버지 밑에서 용맹한 전사로 거듭났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사생아'라는 명예롭지 못한 꼬리표 아버지와 형제들의 냉대였다. 결국 최후 역시 베일에 쌓인 채 '손님'처럼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그의 삶은 어쩌면 비극이었다.
주치의 비극은 주치 개인의 비극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칭기즈 칸 가문의 비극이자 크게는 몽골 제국의 비극이었다. 주치를 비롯한 형제들의 갈등과 불화는 칭기즈 칸의 생애에서는 조용히 무마되었다. 하지만 칭기즈 칸이라는 구심점이 무너지면서 황금가족 간의 갈등과 분열은 더욱 심화되었다. 결국 하나의 통합된 제국을 꿈꿔왔던 칭기즈 칸의 꿈은 물거품이 되고 그의 대제국은 4개의 칸국으로 분열되었다. 물론 주치의 삶이 4개 칸국의 분열을 초래했다는 것은 상당한 논리적인 비약일 것이다. 하지만 주치와 그의 형제들 간 갈등이 드리운 그림자가 몽골제국의 분열을 초래한 근본적이고 중요한 요인이었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그 갈등의 중심이 된 주치의 삶을 살펴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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