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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주>: 시인은 부끄러워야만 했을까? 드라마와 역사



* 다음 글은 영화에 대한 개인적인 감상일 뿐입니다. 글의 내용이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주의부탁드립니다.

  오랜만에 영화 한 편을 봤다. <동주>.

  참으로 반가운 영화여서 개봉일을 손꼽아 기다렸었다. 비록 개봉일은 놓쳤지만.. <동주>는 '시인'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라서 매우 반가운 영화였다. 시인은 주로 시를 통해 많이 접하지, 시인의 삶이 영상 매체를 통해 전달되는 일은 흔하지 않다. 3년전인가? 광복절 특집으로 문화방송에서 2부작으로 방영한 이육사의 삶을 그렸던 드라마, <절정>도 신선하고 감명깊게 본 기억이 있다.

  그래서 그런지, 위안부 할머니들의 아픔을 그린 <귀향>보다도 <동주>라는 영화를 더 먼저 보고 싶었다. 사실 <귀향>도 훌륭한 작품이겠지만, 영화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목적성이 너무나도 분명하고 아픔을 직접적으로 전하는 영화이다. <동주> 역시 일본 식민지 시대를 다룬 작품이지만, <동주>가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은 단순히 '조선인의 피해'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일본 전체주의, 혹은 군국주의의 테두리 안에서의 청년 지식인들의 고민과 선택을 그린 영화인지라, 조금 더 깊이 생각할 점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사실 감독 이준익의 영화를 종종 봤지만, 그의 영화 스타일은 다소 별로라고 생각했다. 극의 막판까지 온갖 감정선을 배가시켰다가, 결말에서는 정말 허무하게 끝내곤 했다. 영화가 끝나면 정말 허전한 기분이 들곤 했다. <왕의 남자>도 그랬고, <사도>도 그랬다. 예술성과 상업성을 모두 가지려다가 뭔가 결말이 2% 정도 부족하게 끝낸 것 같았다. 그런데 다행히 <동주>는 그렇게 결말이 허무하지는 않았다. 물론 나중에 설명하겠지만, 영화의 결말에 완전히 만족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영화가 끝난 후에도 허무함이 아니라, 여운이 오래 남았다.

  영화 <동주>가 성공적인 실험이었던 것은 먼저 영화를 흑백으로 구성했다는 점이다. 영화를 흑백으로 표현했다는 것은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으리라 본다. <쉰들러리스트>처럼 1930~40년대의 시대적으로 암울했던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표현했을 수도 있고, 어떤 분의 말씀 속에서처럼 어두운 시대를 밝혀주던 윤동주를 부각시키려고 했을 수도 있다. 개인적으로 <동주>가 흑백영상으로 표현되었을 때 거둘 수 있는 가장 큰 효과는 윤동주의 문체가 가지고 있는 느낌을 영상으로 옮길 수 있다는 점이다. 국어 시간 때 흔히 윤동주의 시는 '자조적', '반성적'이라고 많이 배웠을 것이다. <동주>의 흑백영상은 윤동주의 시에서 느껴졌던 '자조적', '반성적'인 느낌을 영상으로 느끼게 해준다.


 <동주>가 새로운 시도를 한 점은 송몽규라는 캐릭터를 전면에 배치한 것이다. 사실 영화의 구조도 윤동주가 송몽규를 회상하며 취조받는 액자식 구성이다. <동주>의 부제가 <윤동주와 송몽규를 그리다.>인 것처럼, 영화는 단순히 동주의 일생만을 그린 것은 아니다. 윤동주와 함께 송몽규라는 인물도 부각시킨다.

  영화를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송몽규는 윤동주보다 매력적인 캐릭터이다. 역사상 실제 둘은 이종사촌 간이고, 같은 만주 간도 용정 명동촌에서 태어나서, 죽은 것 역시 달을 달리 했을 뿐, 같은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세상을 떴다. 그 정도로 윤동주와 송몽규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였다. 다만 영화에서는 윤동주와 송몽규의 관계를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의 관계처럼 묘사하였다. 송몽규가 모차르트라면, 윤동주는 그를 항상 동경하는 살리에리였다.

  역사상 둘의 관계가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의 관계였는지는 모르겠다. 영화에서는 둘의 관계를 그렇게 규정하고, 그 배경을 그들이 가진 문학에 대한 인식의 차이에서 찾는다. 송몽규는 '바쿠닌! 크로포트킨!'을 외치며 명동촌 곳곳을 뛰어다니는 '아나키스트'이다. 1930~40년 대 조선 지식인들 사이에서 사회주의와 아나키즘은 열풍이었고, 가장 적극적이고 격정적인 운동 방식으로 인식되었다.  아나키스트 송몽규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전 세계 제국주의 타파와 인민의 해방이었고, 문학도 그러한 시대의 사명감에 부응해야 하는 것이었다. 반면 윤동주는 송몽규와 달리 순수하게 문학을 추구한 '문학청년'이었다. 기독교 신앙에 독실하며 정지용과 백석 시집에 감동하는 문학도였다. 여기서 송몽규와 윤동주의 심리적 거리는 멀어진다.

  영화에서는 이러한 두 사람의 생각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전개시키는데, 윤동주는 항상 송몽규에게 뒤쳐지고 부끄러운 존재로 자신을 인식하게 된다. '당당한 주인공'이 아닌, '부끄러워 하는 주인공'을 내세웠다는 점이 이 영화가 신선했던 점이었고, 어떻게 보면, 그러한 윤동주와 송몽규의 관계, 그것에서 발현된 윤동주의 '부끄러운' 심리를 그려낸 것은 윤동주가 <서시>나 <자화상>에서 그려낸 '부끄러움'과 부합한다. 오히려 송몽규라는 인물을 통해 <서시>나 <자화상>에서 드러난 '부끄러움'이 가슴에 확 와닿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영화의 전개방식이 남긴 아쉬움도 많다.  윤동주로 대표되는 '시인'과 송몽규로 대표되는 '혁명가'를 이분법적으로 대비시키고, 결국은 '혁명가'를 '시인'의 상위에 두는 듯한 구조가 다소 아쉽다. 특히 마지막에 윤동주가 자신을 송몽규의 그림자였고, 자신의 삶이 부끄러웠다고 고백하는 장면은 영화에서의 감정을 극대화시켜주는 명장면이지만, 지식인으로서의 짙은 '패배감'이 배어있다. 문제는 왜 '시인' 윤동주는 '혁명가' 송몽규에게 부끄러움을 느끼고, 패배감을 느껴야 했는가이다.


  문필가는 혁명가보다 조용하다. 어떻게 보면 나약해보일 수 있다. 하지만 암울한 현실에대하여 뼈저리게 고민하고 번민하고, 그러한 암울한 현실이 가고,  밝은 시대가 오기를 갈망하는 것은 같다. 다만 윤동주와 송몽규는 그것을 해결하려는 방식이 달랐다. 윤동주는 식민지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지식인의 성찰을 '시'라는 수단으로 표현하여 해결하려 했고, 송몽규는 아나키즘적 행동으로 그것을 해결하려 했지, 결국 둘의 본질은 같고, 우열을 가릴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 <동주>는 말미에 동주가 자신의 입으로 자신을 '부정'하는 장면은 극에서 매우 중요하고 클라이맥스이지만,  아쉬움 또한 매우 남는 장면이다. 어쩌면 지식인의 사회참여에 대해 오랫동안 고민해 왔기 때문에, 그 부분이 유난스럽게 크게 와닿았는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그러한 결말의 아쉬움을 달래려고 중간 중간 대사들을 넣은 듯 하다. 그 대사들을 곱씹으면서 주저리주저리 풀어놓았던 글을 매듭짓고자 한다.


  "동주가 세상을 사랑하듯, 몽규도 세상을 사랑하고 있는거야."

  "부끄러움을 아는 건 부끄러운 것이 아니야.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이 제일 큰 부끄러움이지."

'몽골' 개념성립에 대한 역사적 고찰 내륙아시아사





  '몽골(Mongol)'이라는 단어에는 여러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우선 지리적 개념으로서의 몽골을 보자면, 현재 몽골국(몽골인민공화국)의 영토를 지칭한다. 이것은 좁은 지리적 범주의 몽골이고, 광의의 지리적 범주는 몽골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의 내몽골자치구, 신장위구르자치구의 천산 이북 준가르 평원, 요녕성의 대흥안령 서부 평원, 바이칼 호 주변 등을 포괄하는 지역을 말한다. 또한 몽골이라는 단어는 그러한 지리적 범주에 거주하는 인구집단을 지칭하는 단어이기도 한다. 작게는 몽골국 국민, 크게는 내몽골 자치구 등 주변에 거주하며 주로 유목에 종사하는 인구집단을 말한다. 이것이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몽골이란 단어의 개념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몽골이라는 개념, 특히 몽골인이라고 하는 개념은 언제부터 확립된 것일까? 우리가 역사상에서 '몽골'이라고 지칭하는 사람들은 과연 그들을 '몽골인'이라는 정체성을 갖고 있었을까? 흔히 몽골의 역사를 말할 때 진정한 몽골이 역사상에 등장한 것을 1206년 칭기즈칸의 몽골제국 건립으로 잡곤 한다. 현재 몽골국민들도 1206년을 몽골국 원년으로 말한다. 그런데 과연 칭기즈칸 시기 등장한 몽골이라는 개념이 현재 몽골과 얼마나 연관을 갖고 있을까? 과연 그 '정체성'이 현재까지 단절되지 않았을까?

  에릭 홉스본이 지적한 것처럼 19세기 이후, 민족국가가 성립되면서, 그 민족의 정체성을 뒷받침하기 위해, 많은 전통들이 만들어졌다. 문제는 그러한 민족정체성과 전통이 근대의 산물임에도 불구하고, 현대 다수의 사람들은 그것들이 오래전부터 '민족' 자체 내에서 형성되었다고 믿는다는 점이다. 몽골, 혹은 몽골인에 대한 인식도 그렇다. 현재의 몽골국의 영토와 그 주변에 거주하던 유목민들이 적어도 칭기즈 칸의 등장 이후 자신들을 '몽골'로 인식하였고, 그러한 정체성이 현대까지 이어져 왔다는 것이다. 그러한 인식은 현대 몽골인 뿐만이 아니라 외부에서 몽골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도 공통적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몽골제국 이후의 몽골 스텝지대의 역사를 자세히 살펴본다면, '칭기즈칸의 후손인 몽골인'이라는 개념은 신화와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몽골인'이라는 개념은 몽골제국의 몰락 이후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역사적 과정을 거치면서 만들어진 개념이다. 특히 17세기와 18세기에 걸쳐 이루어진 만주인의 청조에 의한 몽골 초원 지역의 통합이 오늘날의 '몽골'과 '몽골인'의 개념을 만들어 내는 데에 중요한 토양을 만들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청의 몽골 스텝 통합에 의해 몽골 초원의 여러 유목민 집단은 '강제적'으로 '몽골'이라는 하나의 거대 집단으로 묶였고, 이것이 결국 몽골인이 자신을 '몽골인'으로 인식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14세기 북원 정권이 몰락하면서, 몽골 초원은 구심점을 잃어 버리고, 여러 유목민 집단으로 쪼개져서, 17세기까지 하나의 통합체를 구성하지 못하였다. 물론 때때로 칭기즈칸과 같이 몽골 전역의 유목민을 통합한 정권을 건설하고자 하던 군주들이 나왔다. 하지만 이들 정권은 몽골 초원 전체를 아우르지 못했고, 그 존속 기간도 매우 짧은 편이었다. 서부의 오이라트 사람들은 오이라트만의 법전과 문자가 있었고, 북부의 할하 사람들 역시 할하만의 법령과 문자를 쓸 정도로 이들 유목민 집단은 문화나 정체성이 서로 이질적인 집단이었다. 예컨대 우리가 흔히 17~18세기 서부 몽골 지역에서 국가를 형성하여 청조와 대결한 준가르 역시 '몽골'로 인식하는 경우가 있지만, 엄밀히 말하면 준가르는 몽골인이 아니다. 다만 서부 몽골 초원 지대에 살았던 유목민들이었다. 

  그러한 14세기 이후의 기나긴 몽골 초원의 분열상태를 종식시킨 것은 '몽골인' 자신들이 아니라, '외부'에서 쳐들어 온 만주인이었다. 만주인은 1616년 누르하치가 후금 정권을 건국할 때부터 동쪽에서부터 서쪽으로 몽골 초원지대의 유목민들을 각개격파하듯 통합시켜나갔고, 1756년 건륭제 시기 1세기 만에 준가르 국을 무너뜨리면서, 몽골 초원 지대를 최종적으로 통합시켰다.  

△ 19세기 청조 치하의 몽골 기병

  청조는 몽골초원의 유목민 집단들에 대해서 회유와 통제의 양면정책으로 통치하였다. 자발적으로 복속한 유목민 군장에 대해서는  청조의 관작을 내려 원래 이들이 유목민 사회에서 가지고 있던 권위를 인정해주고, 청 황실이나 귀족층의 여인을 시집보냄으로써 이들을 청조의 지배층으로 편입시켰다. 그러는 한편 이들 유목민들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해서 '맹기(盟旗)'제도를 실시한다.  맹기제도는 팔기제의 방식을 몽골 유목사회에 적용시킨 제도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청이 실시한 맹기제도는 초원의 유목사회가 가지고 있던 고유의 초지단위였던 울루스-투먼/오톡 제도를 붕괴시키고, 목지를 구획하여 유목민들 간의 통합을 막는 역할을 하였다. 즉 청조에 의해서 몽골초원의 유목민들은 하나의 권력 아래로 통합되고, 대체로 '몽골인'으로 분류되었지만, 실질적으로 청대 이후에도 유목민들이 '몽골인'이라는 하나의 정체성을 갖기는 매우 어려운 환경이었던 것이다.

△ 칭기즈칸의 얼굴 부조

  그렇다면 청대 '몽골인'들의 정체성은 어떠했는가? 자신들을 '칭기즈칸의 후손'이라고 생각했는가? 우선 '칭기즈칸'에 대한 역사적 인식을 말하자면, 물론 몽골제국 이후의 역사에 칭기즈칸이 드리운 그림자는 매우 컸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14세기 몽골 초원의 분열 이후,초원의 헤게모니를 잡으려는 사람들은 '칭기즈칸'의 혈통임을 내세우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패권을 잡으려는 정치적 수사의 성격이 강했다. 그것과 당시 전 몽골 지역의 유목민을 아우르는 집단 '조상'으로서의 칭기즈칸 인식이 있었는지는 별개이다. 

  그러한 19세기 이전 혹은 근현대 몽골의 '칭기즈칸' 인식과 '몽골 내셔널리즘 형성'에 관한 흥미로운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그 중 주목할 만한 연구는 조한 엘베르스콕(Johan Elverskog)의 연구이다. 엘베르스콕은 청대 몽골인들의 정체성 형성을 연구하면서, 당시 몽골사회에서의 칭기즈칸 인식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그에 연구를 참조하자면, 14세기 몽골제국 소멸 이후, 초원사회에서 칭기즈칸은 정치적으로 많이 이용되기는 하였지만, 거의 신화적인 존재에 불과했지, 유목민 집단에서 정체성 확립을 위한 숭배의 대상은 되지 않았다. 오히려 17세기 이후, 청의 지배와 함께 티베트 겔룩파 황교 불교가 몽골 초원사회로 확산되면서, 칭기즈칸은 불법을 수호하는 수호신 중 하나로 '추락'하고 말았다.

△ 몽골 울란바토르 시에 세워진 칭기즈칸 좌상  

  현대 몽골 내셔널리즘과 칭기즈칸 인식을 연구한 시마무라 잇페이에 의하면, 몽골 민중들에 의해 칭기즈칸이 본격적으로 인정받기 시작한 것은 아주 최근인 1980~90년대 구소련 체제가 붕괴되고, 몽골에서 민주화가 진행되고, 민족주의가 본격적으로 대두한 시점에서였다. 흥미로운 것은 몽골에서 칭기즈칸이 역사적 인물로 본격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한 것은 외몽골이 소련의 영향하에 들었던 이후라는 점이다. 소련 영향 하에서의 칭기즈칸에 대한 역사적 연구는 매우 부정적이어서, '낡은 봉건 잔재', '대량 학살의 주범' 등의 가혹한 비판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소련 영향하에서의 칭기즈칸에 대한 비판적 연구가 몽골의 지식인들로 하여금 '신화적 대상' 칭기즈칸을 '역사적 실체'로 인식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결국 90년 대 초 외몽골의 민주화 과정에서, 이러한 역사학자들의 연구성과가 재해석되고 부각되면서, 칭기즈칸은 현대 '몽골인'의 '조상'으로 전면에 서게 된 것이다.

△ 청조 건륭제 때 몽골팔기 출신 장수로 활약했던 아유시의 초상화

  칭기즈칸에 대한 역사적 인식과정만 보더라도, '몽골'이나 '몽골인'이라는 개념이 몽골 초원지대의 유목민들에게 형성된 것은 비교적 오래전의 일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엘베르스콕에 의하면, 몽골이라는 개념도 청조가 몽골초원의 여러 계통의 유목민들을 '몽골'이라는 집단으로 통합하면서, 그들에게 주입한 집단개념이었다. 그런데 청조에 의해 '몽골'이라고 분류된 유목민들은 정작 자신이 '몽골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을 '청조의 ~맹, 혹은 ~기 소속의 사람'으로 인식했다. 만약 팔기몽골에 속한 사람의 경우는 '정람기 몽골의 누구'가 자신의 정체성이었고,  내몽골의 '시린골 맹'에 속한 사람은 '시린골의 맹의 누구'가 자신의 정체성이었다. 이렇게 보면, 최소한 청대 후반까지만 해도 몽골의 초원 유목민들에게서 '몽골인' 이라는 자기정체성 인식은 희박하게 드러난다. 오히려 '몽골'이란 단어는 '외부의 정복자'인 청조가 그들에게 붙인 라벨과 같았다.

  그렇다면, 몽골유목사회에서 '몽골인'이라는 '민족주의적' 정체성은 어떻게 본격적으로 대두되었을까? 엘베르스콕은 이에 대해 명확히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18세기 말부터 본격화된 청조의 '중화제국화(化)'가 가장 크고 근본적인 배경이 되었으리라 본다. 청조는  몽골, 티베트, 동투르키스탄(신강 위구르)을 '번부'로 부르면서 중국내지와는 이원화하여 통치하였고, 중국내지의 한인들의 이주와 여행을 제한하였다. 하지만 19세기 청조가 중화제국적 성격이 강화되면서, 번부에 대한 분리정책도 이완되었다. 그로 인해, 한인 출신 상인들을 시작으로 한인들이 대거 이주해 왔다. 정착과 농경생활이 위주인 한인들의 이주는 기존의 몽골 초원에서의 유목민들의 경제생활을 파괴하였고, 문화적으로도 유목민들과 충돌을 발생시켰다.

  청조의 제도적 바운더리가 무의미한 상태에서 새롭고 파괴적인 외부자의 침입은 몽골 유목민들에게 위기의식을 불러일으켰고,그러한 위기의식이 유목사회 속에서 외부자에 대항하는 '동질의식'을 만들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결국 이것이 '몽골인'이라는 정체성 형성에도 강력한 영향력을 끼쳤고, 1911년 청조가 완전히 붕괴되면서, '몽골인민공화국'이라는 '국민국가' 건설로까지 연결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다만 '하나의 몽골인'이라는 이상은 아직 몽골인들에게 요원해 보인다. 1911년 청조의 붕괴로, 몽골인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가지고 최초로 '국민국가' 건설을 시도했지만 소련과 중국에 의해, 몽골국과 중국의 내몽골자치구로 분리되었다. 문제는 외몽골과 내몽골의 분리가 외부적, 정치적 요인이 매우 컸지만, 그러한 외부세력에 의한 분리가 장시간 지속되면서 시간이 흐를수록 외몽골과 내몽골 사람들 간의 문화적 갈등도 심화되고 있고, 서로에 대한 '동질의식'도 점차 희박해져간다는 점이다. 19세기 전후로 몽골 유목민 사회에 형성된 '몽골인'이라는 정체성이 이러한 내, 외몽골의 분단 속에서 어떻게 변모해 갈지 궁금하다. 또한 현재 내, 외몽골 사람들의 정체성 인식 문제에 있어서, '몽골'과 '몽골인'이라는 개념 형성과정에 대한 역사적 고찰은  앞으로의 중요한 연구과제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김선호, <내몽골, 외몽골: 20세기 분단의 몽골역사>, 한국학술정보, 2014.
김한규, <동아시아 역사 논쟁>, 소나무, 2015.
김호동, <아틀라스 중앙유라시아사>, 사계절, 2016. 

小長谷有紀, 前川 愛, <現代モンゴルをるための50章>, 明石書店, 2014.





Johan Elverskog, Our Great Qing: The Mongols, and Buddhism and the State in Late Imperial China,  University of Hawaii Press, 2006.


청조의 치발령-만주인의 화이관 극복전략 동아시아사



  청조의 치발령은 너무나도 잘 알려져 있다. 1644년 산해관을 돌파한 청군은 북경을 점령한데 이어서 중원 전역을 공격하기에 이른다. 청군은 정복지역의 한인들에 대해 고유의 머리 모양을 버리고, 만주인의 변발로 바꾸도록 강요하였다. 청조의 치발령에 대해 한인들은 강력히 반발했고, 강남의 경제적 중심지인 양주나 가정 같은 곳에서 청군은 치발을 강행하기 위해 피의 대도살을 감행하게 되었다. 그러한 강압적인 변발령은 한인들 사이에서 두고두고 만주인의 폭압적인 정책을 상징하는 대명사로 남았다.

  그렇다면 왜 청조는 치발령을 감행하였을까? 그동안 치발령에 대한 이야기는 두고두고 회자되어 왔고, 청대사를 전공하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그 까닭에 대한 논의는 다양하게 진행되어 왔다. 청조가 치발령을 실시한 이유에 대해서는 크게 1. 한인에게  정복당한 세력임을 확실히 각인시키기 위해서 2. 한인 사대부들에게 치욕을 안겨주기 위해서 3. 한인을 길들이기 위해서 등등의 주요 논리들이 제기되었지만, 뭔가 시원치 않은 답변들이다.

  한인에게 정복당한 세력임을 각인시키기 위한다고 한다면, 이 논리는 청조에게 군사적으로 정복당한 모든 세력에게 치발령이 적용되야 이치가 맞는다. 즉 한인 이외에도 몽골, 티베트, 위구르, 심지어는 조선에게까지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변발이 관습이었던 몽골은 차치해두고서라도, 티베트나 위구르 같은 경우에는 청조에게 복속된 이후에 치발령이 적용되지 않았다. 조선의 경우 홍타이지가 1636년 군사적으로 조선을 굴복시키고 신속시키고 나서, 청조 내의 한인 관료들 사이에서 조선에도 치발이 강요되어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음에도 치발이 강요되지 않았다. 결국 치발령은 중원의 한인들만을 대상으로 실시되었던 정책이다.

  한인 사대부들에게 치욕을 안겨주기 위해서라거나 한인들을 길들이기 위해서라는 논리도 맹점이 많다. 청조는 광대한 영역을 다스리는 제국이다. 그 중에서 한인들의 영역은 가장 핵심이고 인구도 과반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서라도 청조는 이들을 제국 질서로 제대로 포섭할 필요가 있었고, 이들을 보다 효율적으로 다스려야 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치발령은 매우 비효율적인 정책이었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청조는 치발령을 감행하기 위해 강남지역에서 엄청난 저항에 부딪혀야 했고 심각한 유혈사태를 낳았다. 또한 치발령에 대한 한인들의 반감은 청조가 중원을 지배한 시기 내내 이어졌고, 결국 청조의 질서가 붕괴되자 반만의식의 좋은 구실이 되었다. 이렇게 보면 청조의 치발령은 한인을 복속시키는 정책으로는 전혀 효율적이지 못한 정책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그렇다면 청조가 한인들에게만 치발령을 강요한 근본적인 원인은 어디 있는가? 물론 청조가 중원을 정복하기 전인 후금 시대에는 치발은 몽골인을 제외한, 청조에 정복된 한인들과 포로로 잡힌 조선인들에게 강요되었고, 이 때의 의미는 확실히 청조에 복속된 신민이라는 점을 확실히 표시해 두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러나 홍타이지가 황제를 칭하여 청조가 성립되고 이후 청조가 중원으로 들어가면서 치발령의 대상과 의미는 다소 달라졌다. 치발령의 대상은 중원의 한인들에게 한정되었고, 치발령이 내포한 의미도 달라졌으리라 본다.

 청조가 중원의 한인들에게 치발을 강요한 데에는 한인들에 대한 정치적, 문화적 트라우마가 컸던 것이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본다. 머리 모양이라는 것은 고대부터 동아시아에서 '화(華)'-'이(夷)', 즉 문화인과 오랑캐를 구분하는 큰 요인이었다. 예컨데, <사기>의 경우, (고)조선의 위만이나 남월의 조타를 묘사하면서 공통적으로 "상투를 틀고(魋結) 만이의 복장을 했다."라고 묘사를 했는데, 결국 한대부터 상투를 튼다는 머리 모양을 통해서 화이를 구분하는 방식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화이의 구분은 동아시아 전통시대 지속되고 지배하는 사고방식이었다.

  청조를 세운 만주인은 여진에서 시작되었고, 그들은 한인들이 세운 명조의 입장에서는 '이적(夷狄, 즉 오랑캐)'에 불과하였다. 그러한 만주인이 명의 내분을 이용하여 중원을 차지하는 제국이 된 것이다. 이 사태는 중화가 이적에 의해 무너졌다는 것이고, 이는 한인들에게 '천붕지열(하늘이 붕괴되고 땅이 갈라지는)'이라는 말로 표현될 정도로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아무튼 만주인의 청조는 중원을 지배한 이상, 명조를 대신하여 새로운 동아시아 질서의 중심이 되는 제국이 되어야 했다. 곧  '중화'를 자처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적'으로 동아시아 세계에서 인식되던 청조가 '중화'를 자처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조선의 경우도 청조에게 군사적으로 굴복했고 형식적으로는 청조를 상국으로 인정했지만, 내부적으로는 결코 중화로 인정하지 않았고, 비록 명대에도 중화 질서에 들지는 않았지만, 일본 역시 청조를 달단 등으로 인식했지, '중국'으로는 인식하지는 않았다. 대내적으로도 청조가 중화라는 논리에 반발한 한인들이 많았고, 그로 인해 청조의 황제들은 한인 지식인들에 대한 회유와 문자옥 등의 탄압을 병행할 수 밖에 없었다. 옹정제가 한인 지식인 증정의 화이론을 논파한 기록인 <대의각미록>에도 중화제국으로 인정받으려는 청조 황제들의 고심이 잘 드러난다. 대내외적으로도 '중화'를 자처하기에는 난관이 많았던 만주인의 청조가 선택한 방식은 바로 한인을 '중화'에서 '끌어내리는 방법'이었고, 그 일환이 바로 한인에 대해 치발령을 강요하는 것이었다.


  청조는 한인에게 치발령을 강제하면서, 한인들의 복색을 만주인 자신들과 같게 만들었다. 이는 자신들 위에 문화적으로, 정치적으로 군림시켰던 한인들의 수준을 자신들의 수준으로 끌어내리겠다는 상징을 지니고 았다. 더 나아가서 한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중화'의 지위를 시각적으로 박탈해버리겠다는 것이다. 그러한 치발령을 통해 만주인들은 한인들 역시 시각적으로 더 이상 중화가 아닌 만주인과 동등한 존재임을 보이고자 했던 것이다. 이렇게 보면 청조가 다른 복속민들과 달리 유독 한인들에게만 변발을 강요한 까닭도 설명이 부드럽게 될 것 같다. 몽골, 티베트, 위구르, 심지어 조선은 모두 명조의 한인들의 시각에서는 여진과 마찬가지로 '이적'이었다. 즉 이들 이적들은 청조가 무력으로 굴복시키고 적당히 구슬려서 우위를 차지할 수 있는 대상이었다.

  그러나 한인들은 달랐다. 이들은 애초에 중화로서 만주인에게 정치적, 문화적으로 우위가 있었다. 이들은 군사적인 수단 뿐만이 아니라, 문화적으로, 종족적으로 굴복시켜야 하였다. 이들이 적어도 문화적으로 자신들과 동등한 존재가 되어야 만주인들은 자신들의 청조를 대외적으로도 '중화'로 자부할 근거가 생기는 것이다. 결국 한인에 대한 철저한 치발령은 '이적'의 씨앗으로 '중화제국'으로 자처한 청조와 만주인이 자신들의 태생적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동아시아에서 뿌리깊게 이어져 온 '화이사상'을 바꾸기 위한 시도라고 볼 수 있다.

  어쩌면 청조의 그러한 시도는 매우 성공적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비록 19세기 말 한인들은 변발을 풀고 청조를 타도 했지만, 서구와 세계적인 인식 속에서 중국인의 이미지는 현재까지도 'pig tail'에 '치파오(旗包)'를 입은 '만주화된 중국인'으로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결국 청의 이미지는 중국의 이미지로 자리잡았다.

(이 글은 청조의 치발령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을 정리해 본 것입니다. 머리 속에 떠오른 것을 적은 가설이라서 사료적인 근거가 부족한 것을 양해구합니다.)

청조 건륭시대 자광각 공신도 (3) 내륙아시아사

청조 건륭시대 자광각 공신도 (3) 


밍량(mingliang, 明亮)

숭안(sungan, 崇安)

바닝가(baningga, 巴寧阿)

장김부(janggimbu, 占音保)

우푸(ufu, 五福)

닥타나(daktana, 達克塔納)

찰이선(札爾善)

바다이(badai, 巴垈)

목평 토사(木坪土司) 기얀무짠 남커(giyanmuzan namke)

(다음에 계속)

청조 건륭시대 자광각 공신도 (2) 내륙아시아사


청조 건륭시대 자광각 공신도 (2)


납목찰이(納木察爾)

단제포(端濟布)

마상(瑪瑺)

두빈(豆斌)

살랍이(薩拉爾)

자오후이(jaohui, 兆惠)

부덕(富德)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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