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원으로 '돌아간' 몽골제국

위의 애잔한 시는 원 왕조의 마지막 황제였던 순제 토곤 테무르가 명 군에게 대도와 상도를 점령당하고 초원으로 피난가면서 지은 시이다. 시의 내용도 상당히 슬프지만, 이 시를 지은 지 얼마 안되어서 순제 역시 몽골 초원의 응창부에서 최후를 맞는다. 이 시는약 80여 년동안 중국을 지배했던 대원제국의 붕괴를 잘 보여주는 시라 할 수 있겠다. 80여 년을 중원을 지배한 몽골은 이 애가(哀歌)와 함께 자신들의 고향 초원으로 돌아갔다.
몽골의 세계지배라는 것은 짧고 강력한 것이었다. 마치 황랑한 초원에서 부는 바람처럼 말이었다. 비잔틴 제국까지 합해서 1000년 넘게 유럽에서 영향력을 행사한 로마 제국, 혹은 200~300년을 동아시아 세계질서를 좌지우지한 중화왕조들과 달리 몽골제국이 유라시아를 제패한 기간은 100년에서 200년에 불과하였다. 중원을 장악한 대원 제국은 그 기간이 더욱 짧아 제대로 중국을 지배한 것이 채 100년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 100년이라는 기간이 후대 중국에 남긴 유산이란 상당한 것이었다.
사실 유목민의 역사에 있어서 사람들이 범하는 오류가 유목국가나 반농경민의 국가가 정주국가를 정복하면 유목민들이 정주문화에 흡수되고 결국 동화된다는 생각이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일부는 맞을 수 있겠지만 잘못된 생각이라 할 수 있겠다. 특히 유목세계와 정주세계를 통합한 몽골제국의 경우, 후대의 정주민의 국가에 상당한 영향을 남기고 떠났다. 특히 중국을 정복했던 원 왕조가 명왕조에 남긴 유산은 상당한 것이었다.
2. 명, 몽골제국을 계승하다.

명나라를 건국한 태조 주원장이 명을 건국하면서 내건 구호는 '驅逐胡虜 回復中華(오랑캐를 구축하고 중화를 회복한다.)'였다. 이 구호는 나중에 19세기 손문 등의 한인들이 만주인의 청 왕조에 대한 구축운동을 벌이면서 내세운 구호이기도 한데, 이 구호만 봐도 명나라의 건국 구호는 몽골제국에 대한 부정이라고 할 수 있겠다. 또한 주원장 시기의 명의 공격목표 역시 원의 대도와 상도, 나아가서 몽골인의 격멸이었다. 이렇듯 명은 건국과정에서도 몽골제국을 중국에서 몰아내면서 제국을 성립하였다.
그런데 명은 상당히 특이한 국가라고 할 수 있었다. 심지어는 당시 중국 역사의 흐름에서 볼 때는 반동적이고 돌출적인 국가였다. 왜냐하면 10세기 이후부터 청 왕조에 이르기까지 중국 외부의 비중국계 인구가 중국과 다른지역을 통합하는 것이 하나의 역사적 추세였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인이 세운 명 왕조는 상당히 특이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명 왕조는 비록 10세기의 동아시아의 국제질서에서 반동적으로 출현했고, 비중국적 요소를 없애고자 노력했으나, 그럼에도 몽골제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단편적인 것에서 보자면 '명(明)'이라는 국호에서도 볼 수 있다. 보통 중국인들이 세운 왕조의 국호는 주로 지명에서 따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면 한(漢)의 경우 한수 유역에서 발흥하였기 때문에 국호 역시 그에 따랐고, 당(唐)의 경우 이연이 북주로부터 당 지역의 제후로 책봉을 받았기 때문에 국호 역시 이연이 책봉받은 지역의 이름을 딴 것이다. 그런데 대체로 10세기 이후 비중국계 왕조들의 경우, 지명이 아닌 금(金), 원(元), 청(淸) 등의 국호를 사용한다. 주원장은 남경을 점령한 이후 오왕(吳王)이라 칭했지만 황제를 선포한 이후 명(明)이란 국호를 택했다. 명이라는 국호가 홍건적들의 배후 사상인 백련교에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이 지배적 주장이지만, 지명으로 국명을 하던 중국인 국가의 전통에서 벗어난 것은 명이 비중국계 국가들의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지방제도에서도 원의 제도를 계승한 점이 드러난다. 원은 중국의 각 지방에 행중서성(行中書省)을 두고 황제의 행정감찰관료인 다루가치를 파견하였다. 이러한 행성 체제는 명에도 그대로 계승되었다. 다만 지방 행성의의 권력이 포정사, 안찰사, 도지휘사로 배분되었다는 차이점이 있다. 군제에서도 몽골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보인다. 명의 병제는 위소제(衛所制)인데 일종의 세습적인 모병제라고 할 수 있다. 군호의 편성에 있어서 100호, 1000호 등의 십진법 체제를 활용하였는데 이는 몽골을 비롯한 유목민의 십진법 편제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주원장의 뒤를 이어 3대 황제가 된 명의 성조 영락제는 몽골제국의 계승의지를 여러 방면에서 분명히 하였다. 영락제가 몽골제국의 계승의지를 누구보다도 분명히 한 원인은 그의 본거지가 연(燕)에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주원장은 자신의 아들들을 번왕으로 삼아서 변경을 지키게 하였는데, 훗날 영락제가 되는 주체는 연왕으로 임명되어 원의 수도였던 대도(大都)에 주둔하였다. 대도에서 주둔한 경험은 그가 원 제국을 계승하려고 하는 의지에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황제가 된 후, 그는 아버지의 수세적인 정책을 버리고 적극적인 대외정책을 벌인다.


북경은 칭기즈 칸 시기 대대적인 파괴가 있었지만, 원 세조 쿠빌라이에 의해 명실상부한 대원제국의 중심으로 탈바꿈한 곳이다. 쿠빌라이는 파괴된 북경을 복원하고 화려한 궁궐을 짓는 한편, 북경이 수도로써 기능을 할 수 있도록 기반을 만들었다. 그것은 조운체제를 정비한 것인데 강남의 풍부한 경제력을 북경으로 운송시키기 위해 대운하를 정비하고 궁궐까지 운하가 들어올 수 있도록 적수담을 만들었다. 명 시대의 북경은 원 시대에 이미 구축된 체제를 거의 그대로 이용했다고 볼 수 있다. 이후 북경은 청, 중화인민공화국을 거치면서 중국의 중심지가 되었다.

몽골제국은 유라시아를 아우르는 거대 제국이었고 비록 여러 칸국들로 분열되었지만 '몽골'이라는 이름아래 단일한 단위로 묶여 있었고 육로와 해로를 통해서 연결되어 있었다. 이러한 거대 제국을 경험한 중국인들의 사고도 역시 이전보다 훨씬 확대되었다. 위의 지도는 잘 알려진 일본 텐리 박물관에 소장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이다. 1402년 조선에서 그려진 지도로 당시 동아시아 사람들의 세계인식을 잘 보여준다. 물론 크기와 위치 등이 왜곡되어 있지만 아라비아 반도, 아프리카 대륙도 표시되어 있다. 이는 몽골 제국시대 해로를 통해 이슬람 문명과 중국이 접촉하면서 그만큼 동아시아의 세계인식이 넓어졌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넓어진 세계관을 바탕으로 명의 영락제가 벌인 대규모 사업이 바로 정화의 하서양(下西洋)이라 불리는 해상 원정이다. 정화의 해상원정에는 여러 원인이 제기되고 있다. 영락제가 찬탈한 조카 건문제의 행방을 찾기 위한 이유, 동남아의 부를 얻고 싶어한 영락제의 사욕 등 논란이 분분하다. 현재로써 가장 설득력이 높은 가설은 명의 영향력을 인도양 일대까지 넓히려는 정치적 목적에 있었다는 것으로 이는 몽골제국을 계승하여 명을 세계 제국으로 만들려는 영락제의 의도와도 맞아 떨어진다.
쿠빌라이는 육지에서 뿐만 아니라, 해상에서도 몽골의 영향력을 확장하고자 하였다. 원이 탐라에 총관부를 설치하고 일본에 2차례 원정을 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원은 동남아 각 국과도 조공-책봉관계를 맺어 이 일대에 몽골의 영향력을 확장하였다. 명의 영락제 역시 이러한 원을 답습하여 정화의 원정을 통해서 동남아시아에 영향력을 회복하고자 했다고 생각한다.아울러 몽골제국 시기 더 넓어진 세계 인식을 통해서 세계의 더 많은 국가들을 명의 영향력에 두어서 자신의 황제로서의 권위를 높이고자 했을 것이다.
3. 몽골이 명에 남긴 굴레
하지만 몽골이 명에 비단 찬란한 유산만 남긴 것은 아니다. 그보다 더 심각한 굴레도 남겼다. 러시아 인들은 금장 칸국이 러시아의 여러 공국들을 지배한 시기를 타타르의 굴레라고 명명한다. 원 제국을 이은 명 역시 몽골 문제로 인해 골치를 앓았다. 어쩌면 달단의 굴레라고 할 수 있겠다.
명은 건국 초기 북진정책으로 몽골 세력을 북으로 몰아 냈지만 완전히 일소시키지는 못했다. 영락제 역시 몽골초원으로 5차례 친정을 하여 몽골 유목 세력을 소탕하고자 했으나 결국 전장에서 객사하고 말았다. 북원이 멸망한 후 몽골초원은 여러 부로 다시 분열되었지만, 지속적으로 변경을 공격하였다. 오이라트 부의 에센의 경우, 토목보에서 명의 대군을 격파하고 명의 정통제를 사로잡는 상황이 되었다. 명 말, 알탄칸이 순의왕을 책봉되고 마시가 개설될 때까지 명과 몽골 제부의 대립은 계속되었다.
명 말까지 명의 주력 방어 대상이 몽골초원과 남부 해안지대이었기 때문에 명의 변경체제에 틈이 생길 수 밖에 없었다. 그 틈 중 하나가 요동이었다. 명 태조 시기 명은 북진을 통해 요동까지 영향력을 확장하고자 했다. 그 결과 요동도사, 대녕도사, 누르칸 도사라고 할 수 있는데, 요동도사를 제외하면 나머지 2도사는 형식적인 틀에 불과하였다.
본래 원 시대에도 자치를 누리며 요동사회에 존속하던 여진 제부가 명의 요동에 대한 제한적인 영향력 속에서 자립하였다. 명으로써는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16세기 이전까지 여진 제부가 통합되지 않았다는 점인데, 임진왜란 무렵, 분열된 여진 제부가 통합되는 움직임을 보이게 되었고, 결국 누르하치의 건주좌위 여진이 여진 제부를 통일하게 된다. 명에게는 요동의 불안한 정세 역시 몽골이 남긴 굴레라 할까?

몽골이 명에 남긴 굴레를 대표하는 상징물은 지금의 장성이라 할 수 있다. 진의 장성이 상당히 공격적인 장성이라면, 명의 장성은 방어적인 장성이다. 명의 장성을 보면 도대체 왜 지었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비효율적인 성이라 할 수 있다. 자연적인 방어물인 산에도 여장이 있는 정교한 성채를 지었으니 말이다.
명이 신축한 장성이란 구조물은 일종의 몽골에 대한 히스테리의 상징물로 볼 수도 있겠다. 명은 원나라 시대 4계급 중 가장 하위 계층인 남인들이 주축으로 건국한 나라이다. 이들은 몽골에 많은 억압을 받았고 결국은 그런 반몽감정이 새 왕조 건국에 일조하였다. 따라서 그 어느 왕조보다도 유목민에 대한 배타의식이 강했던 왕조였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영락제 이후 황제가 몽골 유목세력의 포로가 되는 최악의 상황까지 맞았기 때문에 북방에 대한 반감과 방어기재가 컸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장성을 쌓은 이유에는 북방에 대한 견고한 방어체제 수립이라는 실질적 목표도 있었지만, 그 기저에는 어느 때보다도 컸던 명 시대 중국인들의 이적, 특히 몽골에 대한 반감, 히스테리가 깔렸을 가능성이 높다.

갖가지 보석으로 정성스럽고 아름답게 완성된 나의 대도여.
옛 칸들이 머물던 피서지 상도의 황금빛 초원이여.
시원하고 멋진 나의 개평 상도, 따스하고 아름다운 나의 대도여.
붉은 토끼띠의 해에 잃어버린 나의 가련한 대도.
이른 아침 높은 곳에 오르면 보이던 너의 아름다운 연무.
나는 울면서 떠날 수 밖에 없었노라.
나는 초원에 버려진 두살박이 붉은 소와 같이 되었다.
갖가지 모양으로 만들어진 나의 팔각 하얀 탑아!
아홉가지 보석으로 완성된 나의 대도성이여.
내가 겨울을 보냈던 나의 가련한 대도,
이제 모두 중국인이 차지했구나.
내가 여름을 보냈던 개평의 상도,
내 잘못으로 중국인들이 차지했구나.
<황금사>의 토곤 테무르의 시
옛 칸들이 머물던 피서지 상도의 황금빛 초원이여.
시원하고 멋진 나의 개평 상도, 따스하고 아름다운 나의 대도여.
붉은 토끼띠의 해에 잃어버린 나의 가련한 대도.
이른 아침 높은 곳에 오르면 보이던 너의 아름다운 연무.
나는 울면서 떠날 수 밖에 없었노라.
나는 초원에 버려진 두살박이 붉은 소와 같이 되었다.
갖가지 모양으로 만들어진 나의 팔각 하얀 탑아!
아홉가지 보석으로 완성된 나의 대도성이여.
내가 겨울을 보냈던 나의 가련한 대도,
이제 모두 중국인이 차지했구나.
내가 여름을 보냈던 개평의 상도,
내 잘못으로 중국인들이 차지했구나.
<황금사>의 토곤 테무르의 시
위의 애잔한 시는 원 왕조의 마지막 황제였던 순제 토곤 테무르가 명 군에게 대도와 상도를 점령당하고 초원으로 피난가면서 지은 시이다. 시의 내용도 상당히 슬프지만, 이 시를 지은 지 얼마 안되어서 순제 역시 몽골 초원의 응창부에서 최후를 맞는다. 이 시는약 80여 년동안 중국을 지배했던 대원제국의 붕괴를 잘 보여주는 시라 할 수 있겠다. 80여 년을 중원을 지배한 몽골은 이 애가(哀歌)와 함께 자신들의 고향 초원으로 돌아갔다.
몽골의 세계지배라는 것은 짧고 강력한 것이었다. 마치 황랑한 초원에서 부는 바람처럼 말이었다. 비잔틴 제국까지 합해서 1000년 넘게 유럽에서 영향력을 행사한 로마 제국, 혹은 200~300년을 동아시아 세계질서를 좌지우지한 중화왕조들과 달리 몽골제국이 유라시아를 제패한 기간은 100년에서 200년에 불과하였다. 중원을 장악한 대원 제국은 그 기간이 더욱 짧아 제대로 중국을 지배한 것이 채 100년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 100년이라는 기간이 후대 중국에 남긴 유산이란 상당한 것이었다.
사실 유목민의 역사에 있어서 사람들이 범하는 오류가 유목국가나 반농경민의 국가가 정주국가를 정복하면 유목민들이 정주문화에 흡수되고 결국 동화된다는 생각이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일부는 맞을 수 있겠지만 잘못된 생각이라 할 수 있겠다. 특히 유목세계와 정주세계를 통합한 몽골제국의 경우, 후대의 정주민의 국가에 상당한 영향을 남기고 떠났다. 특히 중국을 정복했던 원 왕조가 명왕조에 남긴 유산은 상당한 것이었다.
2. 명, 몽골제국을 계승하다.

△ 명 태조 주원장
명나라를 건국한 태조 주원장이 명을 건국하면서 내건 구호는 '驅逐胡虜 回復中華(오랑캐를 구축하고 중화를 회복한다.)'였다. 이 구호는 나중에 19세기 손문 등의 한인들이 만주인의 청 왕조에 대한 구축운동을 벌이면서 내세운 구호이기도 한데, 이 구호만 봐도 명나라의 건국 구호는 몽골제국에 대한 부정이라고 할 수 있겠다. 또한 주원장 시기의 명의 공격목표 역시 원의 대도와 상도, 나아가서 몽골인의 격멸이었다. 이렇듯 명은 건국과정에서도 몽골제국을 중국에서 몰아내면서 제국을 성립하였다.
그런데 명은 상당히 특이한 국가라고 할 수 있었다. 심지어는 당시 중국 역사의 흐름에서 볼 때는 반동적이고 돌출적인 국가였다. 왜냐하면 10세기 이후부터 청 왕조에 이르기까지 중국 외부의 비중국계 인구가 중국과 다른지역을 통합하는 것이 하나의 역사적 추세였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인이 세운 명 왕조는 상당히 특이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명 왕조는 비록 10세기의 동아시아의 국제질서에서 반동적으로 출현했고, 비중국적 요소를 없애고자 노력했으나, 그럼에도 몽골제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단편적인 것에서 보자면 '명(明)'이라는 국호에서도 볼 수 있다. 보통 중국인들이 세운 왕조의 국호는 주로 지명에서 따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면 한(漢)의 경우 한수 유역에서 발흥하였기 때문에 국호 역시 그에 따랐고, 당(唐)의 경우 이연이 북주로부터 당 지역의 제후로 책봉을 받았기 때문에 국호 역시 이연이 책봉받은 지역의 이름을 딴 것이다. 그런데 대체로 10세기 이후 비중국계 왕조들의 경우, 지명이 아닌 금(金), 원(元), 청(淸) 등의 국호를 사용한다. 주원장은 남경을 점령한 이후 오왕(吳王)이라 칭했지만 황제를 선포한 이후 명(明)이란 국호를 택했다. 명이라는 국호가 홍건적들의 배후 사상인 백련교에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이 지배적 주장이지만, 지명으로 국명을 하던 중국인 국가의 전통에서 벗어난 것은 명이 비중국계 국가들의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지방제도에서도 원의 제도를 계승한 점이 드러난다. 원은 중국의 각 지방에 행중서성(行中書省)을 두고 황제의 행정감찰관료인 다루가치를 파견하였다. 이러한 행성 체제는 명에도 그대로 계승되었다. 다만 지방 행성의의 권력이 포정사, 안찰사, 도지휘사로 배분되었다는 차이점이 있다. 군제에서도 몽골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보인다. 명의 병제는 위소제(衛所制)인데 일종의 세습적인 모병제라고 할 수 있다. 군호의 편성에 있어서 100호, 1000호 등의 십진법 체제를 활용하였는데 이는 몽골을 비롯한 유목민의 십진법 편제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명 성조 영락제
주원장의 뒤를 이어 3대 황제가 된 명의 성조 영락제는 몽골제국의 계승의지를 여러 방면에서 분명히 하였다. 영락제가 몽골제국의 계승의지를 누구보다도 분명히 한 원인은 그의 본거지가 연(燕)에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주원장은 자신의 아들들을 번왕으로 삼아서 변경을 지키게 하였는데, 훗날 영락제가 되는 주체는 연왕으로 임명되어 원의 수도였던 대도(大都)에 주둔하였다. 대도에서 주둔한 경험은 그가 원 제국을 계승하려고 하는 의지에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황제가 된 후, 그는 아버지의 수세적인 정책을 버리고 적극적인 대외정책을 벌인다.

△자금성

△원 대도성
우선 그가 벌인 사업 중 가장 유명한 사업은 북경 천도일 것이다. 영락제의 북경천도에는 여러 요인이 있었다. 우선 그의 본거지였고, 남경의 문관세력들에 대항할 수 있는 좋은 장소였다. 하지만 북경이 수도가 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원인은 북경이 가지고 있는 지정학적인 중요성 때문이었다. 북경은 동쪽으로는 요동과 조선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고, 북쪽으로는 몽골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이었다. 게다가 10세기 이후부터 비중국계 통합국가들의 정치적 중심, 특히 몽골제국 시기에는 유라시아 세계의 중심이 된 곳이다. 북경은 칭기즈 칸 시기 대대적인 파괴가 있었지만, 원 세조 쿠빌라이에 의해 명실상부한 대원제국의 중심으로 탈바꿈한 곳이다. 쿠빌라이는 파괴된 북경을 복원하고 화려한 궁궐을 짓는 한편, 북경이 수도로써 기능을 할 수 있도록 기반을 만들었다. 그것은 조운체제를 정비한 것인데 강남의 풍부한 경제력을 북경으로 운송시키기 위해 대운하를 정비하고 궁궐까지 운하가 들어올 수 있도록 적수담을 만들었다. 명 시대의 북경은 원 시대에 이미 구축된 체제를 거의 그대로 이용했다고 볼 수 있다. 이후 북경은 청, 중화인민공화국을 거치면서 중국의 중심지가 되었다.

△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몽골제국은 유라시아를 아우르는 거대 제국이었고 비록 여러 칸국들로 분열되었지만 '몽골'이라는 이름아래 단일한 단위로 묶여 있었고 육로와 해로를 통해서 연결되어 있었다. 이러한 거대 제국을 경험한 중국인들의 사고도 역시 이전보다 훨씬 확대되었다. 위의 지도는 잘 알려진 일본 텐리 박물관에 소장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이다. 1402년 조선에서 그려진 지도로 당시 동아시아 사람들의 세계인식을 잘 보여준다. 물론 크기와 위치 등이 왜곡되어 있지만 아라비아 반도, 아프리카 대륙도 표시되어 있다. 이는 몽골 제국시대 해로를 통해 이슬람 문명과 중국이 접촉하면서 그만큼 동아시아의 세계인식이 넓어졌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 정화
이러한 넓어진 세계관을 바탕으로 명의 영락제가 벌인 대규모 사업이 바로 정화의 하서양(下西洋)이라 불리는 해상 원정이다. 정화의 해상원정에는 여러 원인이 제기되고 있다. 영락제가 찬탈한 조카 건문제의 행방을 찾기 위한 이유, 동남아의 부를 얻고 싶어한 영락제의 사욕 등 논란이 분분하다. 현재로써 가장 설득력이 높은 가설은 명의 영향력을 인도양 일대까지 넓히려는 정치적 목적에 있었다는 것으로 이는 몽골제국을 계승하여 명을 세계 제국으로 만들려는 영락제의 의도와도 맞아 떨어진다.
쿠빌라이는 육지에서 뿐만 아니라, 해상에서도 몽골의 영향력을 확장하고자 하였다. 원이 탐라에 총관부를 설치하고 일본에 2차례 원정을 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원은 동남아 각 국과도 조공-책봉관계를 맺어 이 일대에 몽골의 영향력을 확장하였다. 명의 영락제 역시 이러한 원을 답습하여 정화의 원정을 통해서 동남아시아에 영향력을 회복하고자 했다고 생각한다.아울러 몽골제국 시기 더 넓어진 세계 인식을 통해서 세계의 더 많은 국가들을 명의 영향력에 두어서 자신의 황제로서의 권위를 높이고자 했을 것이다.
3. 몽골이 명에 남긴 굴레
하지만 몽골이 명에 비단 찬란한 유산만 남긴 것은 아니다. 그보다 더 심각한 굴레도 남겼다. 러시아 인들은 금장 칸국이 러시아의 여러 공국들을 지배한 시기를 타타르의 굴레라고 명명한다. 원 제국을 이은 명 역시 몽골 문제로 인해 골치를 앓았다. 어쩌면 달단의 굴레라고 할 수 있겠다.
명은 건국 초기 북진정책으로 몽골 세력을 북으로 몰아 냈지만 완전히 일소시키지는 못했다. 영락제 역시 몽골초원으로 5차례 친정을 하여 몽골 유목 세력을 소탕하고자 했으나 결국 전장에서 객사하고 말았다. 북원이 멸망한 후 몽골초원은 여러 부로 다시 분열되었지만, 지속적으로 변경을 공격하였다. 오이라트 부의 에센의 경우, 토목보에서 명의 대군을 격파하고 명의 정통제를 사로잡는 상황이 되었다. 명 말, 알탄칸이 순의왕을 책봉되고 마시가 개설될 때까지 명과 몽골 제부의 대립은 계속되었다.
명 말까지 명의 주력 방어 대상이 몽골초원과 남부 해안지대이었기 때문에 명의 변경체제에 틈이 생길 수 밖에 없었다. 그 틈 중 하나가 요동이었다. 명 태조 시기 명은 북진을 통해 요동까지 영향력을 확장하고자 했다. 그 결과 요동도사, 대녕도사, 누르칸 도사라고 할 수 있는데, 요동도사를 제외하면 나머지 2도사는 형식적인 틀에 불과하였다.
본래 원 시대에도 자치를 누리며 요동사회에 존속하던 여진 제부가 명의 요동에 대한 제한적인 영향력 속에서 자립하였다. 명으로써는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16세기 이전까지 여진 제부가 통합되지 않았다는 점인데, 임진왜란 무렵, 분열된 여진 제부가 통합되는 움직임을 보이게 되었고, 결국 누르하치의 건주좌위 여진이 여진 제부를 통일하게 된다. 명에게는 요동의 불안한 정세 역시 몽골이 남긴 굴레라 할까?

△ 장성
몽골이 명에 남긴 굴레를 대표하는 상징물은 지금의 장성이라 할 수 있다. 진의 장성이 상당히 공격적인 장성이라면, 명의 장성은 방어적인 장성이다. 명의 장성을 보면 도대체 왜 지었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비효율적인 성이라 할 수 있다. 자연적인 방어물인 산에도 여장이 있는 정교한 성채를 지었으니 말이다.
명이 신축한 장성이란 구조물은 일종의 몽골에 대한 히스테리의 상징물로 볼 수도 있겠다. 명은 원나라 시대 4계급 중 가장 하위 계층인 남인들이 주축으로 건국한 나라이다. 이들은 몽골에 많은 억압을 받았고 결국은 그런 반몽감정이 새 왕조 건국에 일조하였다. 따라서 그 어느 왕조보다도 유목민에 대한 배타의식이 강했던 왕조였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영락제 이후 황제가 몽골 유목세력의 포로가 되는 최악의 상황까지 맞았기 때문에 북방에 대한 반감과 방어기재가 컸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장성을 쌓은 이유에는 북방에 대한 견고한 방어체제 수립이라는 실질적 목표도 있었지만, 그 기저에는 어느 때보다도 컸던 명 시대 중국인들의 이적, 특히 몽골에 대한 반감, 히스테리가 깔렸을 가능성이 높다.




덧글
크핫군 2011/01/08 10:12 # 답글
....주원장이 너무 잘생겼;;;;
Jes 2011/01/08 20:24 #
으엌ㅋㅋ
첫걸음 2011/01/08 21:33 #
2004년 주원장 드라마에서 호군이 주원장으로 등장했는데...그 때 호군이 연기를 잘했지만 사실 호군 주원장은 매우 매력적이었어요. 뭐 중국인들은 워낙 미화 시키는 걸 좋아하니까요. ㅋㅋㅋㅋㅋ근데 주원장 어진을 그렸을 화가가 저는 불쌍하다고 생각해요 ㅠㅠ
왠지 그리기 까다로웠을 거 같아요 ㅋㅋㅋ
사실대로 그리면 왜 이렇게 못생겼냐면서 뎅겅! 미화해서 그리면 내 얼굴이 그렇게 못생겨서 그렇게 그렸냐고 뎅겅! ㅠㅠㅠㅠ
shift 2011/01/08 12:37 # 답글
읭 놀부얼굴인데...
미연시의REAL 2011/01/08 14:27 # 답글
하지만 명은 결국 말씀하신 그 몽골의 패러다임때문에 또한 망한게 아닌가 싶기도합니다. 영락제의 예부터 해외원정과 팽창주의에 의한 영향력 행사라는 군사력 확대를 몽골과 다른 입장에 있는 명이 그랬다가 망한경우를 보면 말이죠.
첫걸음 2011/01/08 21:40 #
좋은 지적입니다. 맞는 말이죠. 사실 명의 상황에서 그런 대외 원정을 소화할 수는 없었을 겁니다.하지만 제가 지적하고 싶은 건 명이 그러한 팽창정책이 직접 명을 망하게 한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명은 영락제 이후로는 다시금 수세적인 정책으로 전환하게 됩니다. 어쩌면 몽골제국을 계승하려는 패러다임을 유지한 것은 영락제 시대까지라고 보면 됩니다. 그 후로는 선덕제 때를 제외하면 대부분 수세적인 정책이었으니까요.
미연시의REAL 2011/01/08 21:47 #
하지만 수도의 결정 자체가 결국 그런 공세적 정책을 소화하려고 한것인데 다시 수도이전이라는 카드형태도 없는 수세적 정책의 기조의 변화가 결국 망국의 형태로 간 원인도 되지 않겠습니까?^^;
첫걸음 2011/01/08 22:17 #
미연시의님의 말씀에도 공감합니다.수도 문제와 얽힌 대외정책이 망국의 '원인'도' 되겠죠. 하지만 수도 결정과 그것을 소화 못한 명의 역량'만'이 주요 망국의 원인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더군다나 북경방어체제는 사실 정통제 이후 북경이 포위된 이후에 우겸 등에 의해 만리장성이 보강되고 경성의 방어체제가 보강되면서 굳건히 유지됩니다. 알탄 칸이 순의왕에 봉해진 이후 명의 주요 전선이 산해관에 집중되는데, 사실 이자성의 난 직전까지만에도 만주에 대한 산해관 방어는 당시 명의 상태로 봐서 비교적 성공적이라고 생각됩니다.
또한 비록 원 시대 만큼은 아니지만 명의 군사적역량도 명 말까지는 봐줄만 했다고 생각합니다. 임진왜란 때도 그렇고요. 당시 명은 영하의 보바이 난, 파주토사 양응룡의 난을 대대적으로 토벌하느라 대규모 전쟁을 치른 직후인데 임진왜란 동안 세 차례 원정군을 파견합니다. 그 이후에도 1644년이전까지 산해관을 중심으로 한 방어체제가 유지되었으니 명의 역량이 결코 약했던 것은 아니죠,
이렇게 봤을 때 물론 명의 역량이 부족한 점도 있었겠지만 그것이 망국의 직접적 원인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부족한 답변인지 모르겠습니다.
미연시의 님 '유사역사학'이라는 주제로 인해 다른 블로그에서 골머리를 앓고 계신것 같던데 이 블로그에도 좋은 질문을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미연시의REAL 2011/01/08 23:23 #
아뇨 별말씀을 제가 오히려 말씀을 잘 듣고 갑니다.^^
MessageOnly 2011/01/08 22:53 # 답글
북원의 멸망시점을 후금에 의한 것으로 보지는 않으시는 것 같군요.몽골이 홈그라운드에선 많이 유리했던 것 같기도 합니다.
첫걸음 2011/01/08 23:11 #
사실상 북원의 멸망은 1388년 명나라의 남옥이 부이르 호수에서 투구스 테무르를 격파하면서 이루어졌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 이후로 사실 몽골초원은 다시 분열이 됩니다. 근데, 분열된 몽골의 여러 부락들의 지도자들이 대원이란 칭호를 사용하면서 초원사회의 정통성을 부여하고자 하죠. 메세지 온리 님께서 말씀 하신 것은 아마 누르하치와 청 태종이 내몽골 차하르 부의 릭단 칸을 정벌하신 일을 말씀하신 것 같은데, 맞는 지 모르겠네요. 릭단 칸 역시 칭기즈 칸 왕가의 자손이었으나, 엄밀히 말하면 북원과는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들꽃향기 2011/01/09 11:56 # 답글
으잌ㅋㅋㅋ 나의 명나라를 까시다니. 저와 다투시져!.......는 훼이크고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
1. 지방사 관심자로서 원대 성립된 행중서성의 개념이 명대 지방제도의 틀로 계승되었다는 말씀에 공감합니다. 특히 원래 남송-금대에 논의되던 '행중서성'의 개념은 군사적-행정적 필요에 의해서 상당한 군현을 아우르는 광역 통솔체계의 개념이었지만 상설화된 기구는 아니었으니 말이죠. (더욱이 몽골의 침입 당시 금이 요동에 행중서성을 설치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논의를 보면 실제로 권장되지도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것이 원대에 상설화되고 명-청대에 이어졌다는 점에서 상당한 의의가 있다는 점에 공감합니다.
2. 말씀대로 북경이 수도로서의 가치가 인식되었다는 점도 주요한 것 같습니다. 영락제가 수도를 옳기는 논리 중 하나가 "이하(夷夏)를 모두 통제할 수 있는 요지"라는 말로 대표되고 있으니깐요. 만일 전통적인 중국왕조의 시각에서는 '夏'를 통제할 수 있는 요지만을 중점에 두었을 뿐, '夷'를 포함하는 개념을 상정하긴 힘들겠죠.
3. 다만 위소제의 문제는 좀 더 복합적이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물론 실제 편제는 말씀하신대로 몽골의 영향이 매우 지대하지만, 위소제의 근본 이념은 처음에 주원장이 당대 부병제-둔전제를 이상으로 생각해 그것을 다시 재현해보려는 시도도 결합해 있다고 생각하는지라...즉 중국식 전통에 대한 인식이 현실적으로는 몽골식 편제를 통해서 이뤄진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감히 해봅니다. ^^;
4. 말씀대로 몽골에 대한 중압감이 이후 명의 대외인식을 결정지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습니다. 몽골지역에 대해서는 그렇게 경계하면서도, 요동의 경우는 요동변책 건설을 통해 요동도사를 중심으로 하고 나머지 지역에서 일찍부터 후퇴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으니 말이죠.
만일 몽골지역에서 누르하치와 같은 세력이 부락을 통합하고 있었으면 명이 그것을 과연 용인하였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즉 몽골을 의식하다 보니 여진의 통합은 상대적으로 저지하지 못한 느낌이 드네요...ㄷㄷ
첫걸음 2011/01/09 13:23 #
ㅋㅋㅋ 들꽃님의 전문분야를 부족한 제가 건들다니 전 맞아도 쌉니다. 잉?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하하 저도 농담이고요. 아, 이 글 쓰면서 들꽃님께 지적당할까봐 조심해서 썼습니다. 근데 제 의견에 공감하신다니 다행입니다.6^^;;긁적긁적
다만 3번의 위소제 문제는 이것은 상당히 복합적인 문제인 것 같습니다. 사실 부병제나 모병제, 둔전제가 시대가 흐르면서 그 한계점을 노출하고 국가 붕괴의 요인이 되었죠. 주원장도 이러한 군제의 개혁을 위해 상당한 애를 썼고 결과 등장한 것이 위소제였습니다. 들꽃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위소제는 그 동안 등장한 부병제, 모병제, 둔전제 등 중국 국가의 전통에 몽고의 십진법체제를 결합한 독특한 체제라 할 수 있겠죠?
푸른미르 2011/01/12 20:28 # 삭제 답글
안녕하세요 첫걸음님 ^^저는 어찌어찌하다가 넘어오게된 푸른미르라고 합니다.
좋은 글 봐서 눈이 시원해지는것 같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궁금한 점이 있는데, 질문해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사방장군/사정장군/사진장군/사안장군/사평장군과 기타 아문장군, 편장군, 비장군 들의 실제 역할이 궁금합니다. 문면적인 모습 말구요.
그리고 촉한에는 명예장군직이 존재했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하는데(ex. 안한장군, 소덕장군, 흥업장군) 첫걸음님께서는 어찌 생각하시는지 궁금하네요
제가 괜히 번거롭게 해드린게 아닌지 ....
첫걸음 2011/01/12 21:30 #
번거롭다니요? 저도 모르는 걸 배우는 점에서 좋지요. 근데 저도 관직부분에서 미진한 분이 많습니다. 도움이 될까 모르겠네요.제가 황제와 천자라는 연재글에 잠시 언급했지만 본래 장군직이라는 것은 유사시(전쟁시)에 설치된 임시직이었습니다. 무제 시기에는 대장군, 거기장군, 표기장군, 전장군, 후장군, 좌장군, 우장군이 있었는데 각각 전쟁 시에 역할이 있었습니다. 대장군은 중앙에서 총지휘를 맡고, 거기장군은 전차와 기마부대, 표기장군은 정예기병, 전장군은 부대 대열에서 선봉, 후장군은 부대대열에서 후방 보급, 좌, 우 장군은 측면 담당 이렇게 담당을 했습니다.
근데 무제 이후, 비상시직이었던 장군직이 호족들이 관직에 진출하면서 점차 상시직이 됩니다. 유력호족들의 경우 장군직을 통해 내조의 권력을 잡고 조정 이외의 자신의 막료를 거느리게 됩니다. 또한 후한 말이 되면 점차 군웅들 간의 전쟁이 치열해지면서, 다양한 이름의 장군들이 등장하게 되고 시간이 흐르면서 이러한 장군직들이 서열화됩니다. <송서> <백관지>에 보면 100여 개에 이르는 장군직이 등장하는데, 이는 대체로 후한 말 삼국시대에 생겨난 직책들이었습니다.
제 공부가 부족한 것일 수도 있지만 각 장군의 역할은 잘 모르겠습니다. 대체로 그 이름에서 그 역할을 알아볼 수 있는데, 예를 들어 평서,안서, 정서 장군의 경우 서쪽과 관계된 장군이겠지요. 편장군의 경우 총사령관을 보좌하는 직책이죠. 처음에는 이런 장군직은 역할이 있었겠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명예직으로 바뀌죠. 푸른 미르님의 말씀처럼 촉한의 안한장군 이런 것도 일종의 명예직으로 생각됩니다.
사방장군이나, 사안장군 등 위진남북조 시대 장군직은 실질적인 역할을 표시하기 보다는 구품중정제와 맞물려서 일종의 관등역할을 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장군직에 따라 녹봉도 다르고요. 그리고 국제관계에 있어서 서열을 표시하기도 하고요. 고구려왕은 표기장군, 백제왕은 정동장군, 왜왕은 안동장군 이렇게 장군호를 통해서 중국(남조)과의 관계에 있어서 위상이 높은 국가를 구분시킨 것이죠.
현문우답인지 모르겠군요. 감사합니다
푸른미르 2011/01/15 13:18 # 삭제 답글
좋은 답변 감사합니다. 저에게도 많은 공부가 되었습니다.사정/사진/사안/사평장군같은 경우는 제가 뻘생각으로 추측해보았는데,
사정장군 같은 경우는 타국을 정벌하는데 그 의의를 삼고,
사진장군 같은 경우는 주둔지에 대한 방위에 대한 것이 주목적이고,
사안장군 같은 경우는 주둔지에 대해 내부안무를 하고,
사평장군 같은 경우는 이민족에 대한 지휘력 발동이라고 추측해보았는데 어떨지 모르겠네요. ^^
푸른미르 2011/01/15 13:23 # 삭제 답글
참, 그리고 전 장굱기에서 좌/우와 동/서의 개념이 사실 좀 헷갈립니다.이 부분도 조언 부탁드리겠습니다. ^^
첫걸음 2011/01/15 22:21 #
한자해석 상으로 볼 때는 푸른미르님의 해석이 옳지만,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제가 지식이 짧아서 푸른미르님꼐 큰 도움이 못 되어 드린 것 같아 죄송할 따름입니다.ㅠㅠ그리고 좌우와 동서의 개념은 쉽게 설명해 드리자면, 좌우라는 것은 전장에서 진영 내의 배치입니다. 대장군의 경우 전쟁 시 진의 중앙에 위치하고 좌우 장군은 대장군의 좌우에 배치됩니다. 전 장군의 경우 대장군의 앞 열에 배치되어 선봉을 담당하고 후 장군의 경우 대장군의 뒤에 배치되어 후방의 안전, 보급부대를 담당하는 거죠
동서라는 것은 국경의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답니다. 예를 들면 안동, 평동, 진동 장군의 경우 동쪽의 국경을 주로 담당한다고 할 수 있겠죠. 부족한 설명인데 이해 되셨나요? ^^
푸른미르 2011/01/17 16:49 # 삭제 답글
상세하고 친절한 설명 감사드립니다.워낙에 설명을 잘해주셔서인지 제가 천학비재함에도 이해가 쏙 되는군요. ^^
혹시 시간여유가 나시면 cafe.naver.com/sam10 에 오셔서 좋은글 남겨주시면 안될까요~?
저뿐 아니라 다른 분들에게도 첫걸음님의 좋은글을 접했으면 좋겠네요.
혹시라도 오실수 있으시면 저에게 메일주세요 ^^
에드워디안 2011/01/19 23:28 # 답글
1. 흔히 원대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기 쉬운 '민족 카스트 제도'도 그닥 엄격하게 적용되지 않았다고 하네요.2. 홍무제와 영락제가 대숙청을 감행한 것도 몽고적 풍기에 감염된 결과였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겁니다. 1세기간 몽고의 지배를 받으면서 중국인의 심리에 적지 않은 변화가 생겼으리란, 쉽게 추측할 수 있죠. 당장 언어, 복식, 음식 문화의 변질에서도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3. 영락제가 저렇게 공들여 건설한 북경성이지만... 훗날 오물투성이의 비위생적인 도시로 악명을 날리게 되었죠. '이렇게 더러운 도시가 중국의 수도라니, 국가적인 치욕이다. 다시 남경으로 천도해야 한다!'는 주장이 청말에 가서 제기되기도 했다는군요.-_-
2011/01/21 17:37 # 삭제 답글
비공개 덧글입니다.
2011/01/21 17:59 # 삭제 답글
비공개 덧글입니다.
카이사 2011/10/18 10:42 # 삭제 답글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