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吐蕃, 티베트 최초의 제국(3)- 송첸캄포 동아시아사

3. 송첸캄포, 토번제국의 기틀을 마련하다.


△ 송첸캄포가 썼다고 전해지는 금동 투구
 

   야룽왕조의 32대 찬보가  남리 송첸이 중앙집권화에 실패하여 귀족들에게 암살당한 후 33대 찬보로 즉위한 인물은 13세의 송첸캄포이다. 송첸캄포는 토번제국의 역사에서 뿐만 아니라, 전 티베트 역사를 통틀어서도 걸출한 영웅으로 추앙받는다. 티베트 인들은 송첸캄포를 관세음보살의 화신으로 여기기도 했고 불법을 융성하게 한 '조손삼대법왕(祖孫三代法王)' 중에서도 으뜸으로 생각한다. 또한 송첸캄포는 토번제국의 기틀을 마련하고 토번제국이 동아시아 사회의 일원으로 뚜렷한 족적을 남기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송첸캄포는 실질적인 토번제국의 창시자이자, 티베트 역사의 본격적인 시작점이기도 하다.


  (1) 왕조의 중앙집권화
 
△ 송첸캄포 시기 토번제국의 수도가 된 라싸 

  13세의 송첸캄포에게 지워진 시대적인 과제는 지방분권화된 야룽왕조를 중앙집권적인 제국으로 만들고 찬보의 권력을 확대하는 일이었다. 당시 야룽왕조는 표면적으로는 대부분의 티베트 지역을 통일한 제국처럼 보였지만 내부적으로는 여전히 여러 부족 국가들이 느슨하게 연결된 위태로운 체제였다. 송첸캄포의 아버지 남리송첸은 숨파와 샹숭 등을 군사적으로 정복하여 야룽왕조에 편입시키고 귀족들의 권력을 축소시키고자 했으나 몇 년도 안되어 샹숭과 숨파는 반란을 일으키고 귀족들은 남리송첸을 암살하였다. 야룽왕조가 제국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악재들을 극복하고 새로운 체제를 확립해야 했다. 

  송첸캄포가 찬보에 즉위한 이후 우선 단행한 일은 수도를 옮기는 일이었다. 본래 야룽왕조의 본거지는 야룽계곡의 윰프라캉과 칭파 일대였는데, 이 지역은 귀족 세력의 근거지이기도 하였다. 송첸캄포는 귀족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자 수도를 야룽계곡에서 야루장포 강 북안에 있는 라싸로 옮긴다. 633년 야룽왕조의 새로운 수도가 된 라싸는 지금까지도 티베트의 정치적, 문화적 중심지라고 할 수 있다.

△ 송첸캄포를 그린 탱화, 송첸캄포의 좌우에는 그의 개혁을 이끌던 가르동첸과 톤미삼보타가 그려진다. 

  수도를 라싸로 옮긴 젊은 찬보는 전 티베트를 효율적으로 다스릴 수 있는 행정체제를 정비하기 시작하였다. 우선 36가지의 제도를 들 수 있는데, 6개의 법률, 6개의 회의 원칙, 6개의 관직, 6개의 포상원칙, 6개의 표식, 6개의 훈장 등으로 알려졌다.  6개의 법률에는 살생을 하지 않고, 도둑질을 하지 않으며, 망언을 하지 않고, 음란한 일을 하지 않으며, 음주를 하지 않고, 주인을 배반하지 않는다는 항목이 있고, 이외에 16조항의 도덕규범을 제정하였다. 중앙의 6개의 관직은 조정을 이끄는 대상, 부상과 그 밑의 내정, 형부, 외무, 재정 대신이었다.

  또한 송첸캄포는 지방행정조직과 군사조직을 결합하여 전국을 군사단위로 만들었는데, 전국을 4개의 '루(如)'로 나누고, '루' 밑에는 2개의 '루라(分如), 루여 밑에는 4개의 '천호(千戶)' 조직을 두었다. 이러한 중앙통치체제는 송첸캄포 시기 급격히 이루어졌기 보다는 점진적으로 확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송첸캄포의 체제정비를 통해 야룽왕조는 티베트 전역을 아우르는 제국의 체제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 가르동첸이라고 추정되는 금동상

  젊은 찬보를 도와 토번왕조의 개혁을 주도한 사람들은 가르동첸(Gar Tongtsen, 禄東贊)과 톤미 삼보타(Thonmi Sambhota, 吐彌桑布札)라는 인물이었다. 명문 귀족 출신인 가르동첸은 문무를 겸비하고 상당히 정치적인 능력이 탁월한 인물이었다. 그는 송첸캄포를 도와 토번왕조의 체제와 법전을 완비하고 부족들을 통합하는데 지도력을 발휘했고 후에 언급하겠지만 대당외교에 있어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가르동첸으로 인해 가르 가문은 티베트의 최고 가문으로 거듭난다.

  이에 반해 톤미 삼보타는 상당히 학자풍의 관리였던 것 같다. 그는 티베트 문자를 창제한 인물로 알려졌다. <구당서>, <신당서>에 의하면 본래 토번에는 문자가 없었다. 티베트 역사서에 송첸캄포는 문자 체제를 확립하기 위해서  톤미 삼포타를 7년 동안 인도로 유학보내 문자체제를 익히도록 하였다. 토번왕조가 중국의 한문이 아닌 인도의 산스크리트어 체제를 참고한 것은 티베트 서부의 샹숭 왕국과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고 추측된다. 인도와 가까운 샹숭 지역의 본교 승려들이 만들었다고 알려진 샹숭 문자가 토번에도 영향을 끼친 것이다. 인도에서 문자 체제를 배운 톤미 삼보타는 티베트로 돌아와 티베트 문자를 창제한다. 톤미 삼보타의 문자창제로 인해 티베트 인들은 역사 기록을 남길 수 있게 되었고, 불경을 번역할 수 있게 되었다.

  송첸캄포에게 있어서 가장 어려웠던 난제는 무엇보다도 티베트의 여러 부락들을 제압하는 것이었다. 특히 아버지 남리송첸이 암살되면서 샹숭과 숨파가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를 처리해야만 했다. 사실 샹숭과 숨파가 티베트에 언제 완전하게 복속되었는지는 사료마다 증언하는 것이 다르고 혼선이 있다. 하지만 그러한 사료를 통해 유추해보면 샹숭과 숨파는 남리송첸 시기부터 토번제국에 병합되고, 반란을 일으키는 것을 반복하던 것으로 생각된다. 

  <구당서>에 의하면, "농찬(弄贊:송첸캄포)은 약관의 나이에 즉위하였는데,(........) 인접국인 양동과 여러 강인들을 병합하여 복종케 하였다."고 적혀 있고, 티베트 문헌에 의하면 숨파의 저항은 송첸캄포 초기에 일찍이 진압되고, 샹숭의 리그미 왕은 초기에 송첸캄포의 여동생과 혼인을 맺어 토번과 연대하였지만 643~644년 경 가르동첸의 계략으로 복속되었다고 전해진다. 비록 샹숭과 숨파는 송첸캄포 사후 다시 독립을 시도하고 역사서에서도 그 이름이 등장하지만 사실상 이 시기 야룽왕조에 복속되었다고 볼 수 있다. 샹숭의 경우(샹숭이 중국 사서의 양동이라면), 토번과 연합하여 군대를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


  (2) 당과의 외교관계 그리고 문성공주

  송첸캄포는 왕조 내부의 체제를 다지는 한편, 대외적으로도 토번제국의 위상을 높이고자 했다.  송첸캄포 시기에 이르러 토번이라는 국가는 동아시아의 역사 속에 그 이름을 드러냈다. 토번제국이 티베트의 강국으로 부상할 무렵, 공교롭게도 중국에서도 당이라는 제국이 그 기틀을 다지면서 '세계제국'으로 부상하고 있었다. 우연스럽게도 송첸캄포가 집권하던 무렵 당은 태종 이세민이라는 중국 역사 상 명군으로 꼽히는 황제가 통치하고 있었다. 송첸캄포가 당에 사절을 보낸 것은 634년(당 태종 정관 8년)으로 토번과 당이 최초로 관계를 맺은 사건이었다.


△ 당 태종 이세민

△ 염립본이 그린 <당태종 토번사신 접견도> 
 

   토번의 사신을 영접한 당 태종은 답례로 행인(行人) 풍덕하(馮德遐)를 토번으로 파견하였고 송첸캄포는 풍덕하를 기쁘게 맞았다. 토번에게 있어서 당은 이중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당과의 외교관계를 통해 토번왕조는 티베트 내적으로 그 권위를 과시할 수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청해 지방과 사천 운남 일대의 여러 세력들에 당이 영향력을 행사했기 때문에 티베트의 발전에 걸림돌이 되었다. 송첸캄포로써는 당과의 외교관계를 통해서 자신의 권위를 높이는 한편, 사천 방면의 토번의 영향력을 확장하려는 노력을 해야 했는데, 이러한 송첸캄포의 전략에서 나온 사건이 바로 송첸캄포와 당나라의 문성공주의 결혼이었다.

△ 문성공주

   한대부터 중화왕조는 인근 국가의 군주들에게 공주 혹은 종실의 여인, 궁녀들을 처로 삼게 하여 변경을 안정시키고자 하였는데, 이러한 혼인을 매개로 한 외교관계를 "화친(和親)"이라고 부르며, 화친의 명목으로 외국에 파견되는 여인들을 "화번공주"라고 말한다. 당 왕조 역시 이러한 화친관계를 종종 인접국들과 맺었고, 많은 종실의 여인들이 화번공주로 파견되었다. <당회요><공주> 항목에는 화번공주들만을 추려내어 '화번공주'라는 조항을 따로 분류해 기재하였다.

  '오랑캐' 군주들에게 중화왕조와 화친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국내적으로 군주의 권위를 높이는 일임과 동시에 경제적으로 이득을 얻을 수 있는 기회였다. 공주가 이국으로 시집갈 때에는 그와 함께 지참금이란 명목으로 많은 수량의 중국의 선진 물품들이 보내지는데, 당대에는 '자장비'라고 하여 국고의 상당한 금액이 빠져나갔다. 당으로써는 평화를 위해서 치뤄야 할 상당한 댓가였지만, 상대방에게는 막대한 경제적 이익이었다. 송첸캄포도 이러한 점을 잘 알았기 때문에 당나라의 공주를 요구한 것이다.

  그런데 당시 송첸캄포 뿐만이 당의 공주를 원한 것이 아니었다. <구당서>에 의하면, "농찬은 돌궐과 토욕혼 모두 당의 공주를 처로 맞는다는 말을 듣고, 사신을 풍덕하와 함께 다시 파견하여 금과 보물을 가져와 혼인을 청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이미 송첸캄포 이전에 돌궐과 토욕혼이 당의 공주를 처로 맞은 것이다. 당 태종은 송첸캄포의 청을 거부하였다. 그 이유는 토번 사신이 장안에 구혼하러 왔을 때, 마침 토욕혼(吐谷渾)의 사신이 당도했기 때문이었다.

  토번이 티베트 중심부에서 그 세력을 확장하고 있을 때 청해호(몽골어로는 코코노르) 일대와 사천 일대에는 당항강, 백란강 등의 강인계 부족 세력과 토욕혼이라는 국가가 있었다. 토욕혼은 상당히 독특한 국가였다. 본래 토욕혼의 지도층들은 요서 일대의 선비인들이었는데 5호 16국 시대 무렵 청해호 일대로 이주하여 그곳의 강인 세력을 규합하여 나라를 건국한 것이었다.

  이들은 수 양제 시기 수의 군대에 압도되어 수 왕조에 귀부했고, 당 왕조가 들어서자 당 왕조에 약탈과 화친관계를 병행하여 청해 지역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하고자  하였다. 이에 당은 635년(정관 9년) 이정을 파견하여 토욕혼을 대대적으로 공격하여 토욕혼을 완벽히 당의 위성국으로 만들었고, 당항, 백란 등의 여러 강인 집단들도 당에 협력적인 세력으로 만들었다. 이러한 방식으로 당은 청해와 사천을 비롯한 티베트 동부에서의 당의 세력 범위를 공고히 하였다.

  당에게 프로포즈를 거절받은 송첸캄포는 분개하였다. 게다가 당이 토욕혼을 신속시키면서 티베트 동부에서의 자국의 영향력을 넓히자, 이를 깊이 경계하였다. 송첸캄포는 이에 샹숭과 연합 부대를 꾸려 토욕혼을 대대적으로 공략하고 그와 동시에 백란강과 당항강 세력을 공격하였다. 그 결과  토욕혼의 세력은 급격하게 축소되고 백란강과 당항강은 토번의 영향력 안으로 편입되면서 토번은 청해 일대까지 영향력을 넓혔다. 앞서 언급한대로 청해와 사천 서부 고원 지대는 티베트에서 명마산지이기 때문에 토번은 이 지역을 장악하면서 대규모 기병 전력을 보유할 수 있었다. 송첸캄포는 이러한 상승세에 힘입어 638년(정관 12년) 당의 영토를 깊숙이 침공하였다.


  토번과 당이 처음으로 충돌한 지점은 송주(松州)였다. 송주는 사천의 중심인 성도에서 민강을 따라 약 100km 북쪽에 있는 지역인데 이후 청해, 타림분지 등과 함께 당과 토번이 빈번히 충돌하는 지역이었다. 토번은 샹숭, 백란, 당항 등의 세력과 연합하여 약 15만 군대로 송주를 대대적으로 공격하였다. 토번의 군사력에 놀란 당 왕조는 후군집 등을 파견하여 토번의 군대를 공격하였고, 토번군은 철수하였다. 당의 반격으로 토번의 기세도 한층 꺾이고 토번 내부에서도 당과의 전쟁을 피하자는 분위기가 조성된 듯 하다. <신당서>에 의하면 "처음 동쪽을 침범했는데, 해가 지나도 전쟁이 끝나지 않자 대신들이 찬보에게 돌아가자고 청했다. 찬보가 듣지 않고 친히 8명을 죽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결국 송첸캄포 역시, 전쟁을 중단하고 당과의 교섭을 추진했다. <구당서>는 "농찬이 크게 두려워 하여, 병사를 이끌고 퇴각하였고 사자를 보내서 사죄하고 다시 청혼을 하니 태종이 허락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구당서>의 논지는 마치 토번의 패배를 부각시키고 있지만, 사실상은 토번의 외교정책에 당이 굴복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송첸캄보로서는 토욕혼의 세력을 크게 축소시키고 백란, 당항 등의 세력을 병합하여 청해에서의 영향력을 확장함과 동시에 당과의 화친관계를 통해서 국제적 명성을 얻었으니 일거양득이었다. 

  당과의 혼인 교섭에서 큰 역할을 한 것은 바로 가르동첸이었다. <구당서>에 의하면, "농찬은 또한 재상 녹동찬을 보내 예를 다하고 금 5천냥과 100여 개의 보화를 바쳤다."고 기술되어 있다. 또한 티베트의 전승에 의하면 가르동첸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 가르동첸이 당에 입조했을 때 당 태종은 토번에게 공주를 혼인시키는 것이 내키지 않아 가르동첸에게 5가지 어려운 문제를 냈다. 가르동첸은 기지를 발휘하여 5가지 문제를 맞추고 공주를 혼인시키는데 성공하였다고 한다. 638년부터 641년에 이르는 약 3년의 교섭 기간을 걸쳐 결국 문성공주가 티베트로 시집오게 되었다.

 


  문성공주가 종실의 여인임은 확실한 것 같지만 어느 황족의 딸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태종의 조카로 추정되거나 강하왕 이도종이 문성공주를 호위했다는 것으로 보았을 때 이도종의 누이로 추측되지만 명확하지는 않다. 문성공주는 정관 15년인 641년, 이도종의 호위를 받으며 장안을 출발하여 청해호 부근의 황하의 시작점(河原)이라고 알려진 오링 호수와 자링 호수 인근에서 송첸캄포와 만났다. <구당서>에 의하면, "농찬은 부족들의 병사를 거느리고 백해에 병사들을 대기시킨 후 하원에서 공주를 친히 영접했다."고 기술되어 있는데, 송첸캄포가 문성공주에 대해서 상당히 기대를 많이 했음을 보여준다. 덧붙여 언급하자면 문성공주가 당에서 티베트로 들어온 길을 당번고도(唐蕃古道)라고 말하는데 이 길은 운남에서 히말라야 산록을 경유하는 차마고도(茶馬古道)와 함께 중국과 티베트를 이어주는 주요 간선도로였다.

  문성공주의 토번 입성과 함께 중국과 티베트 간에도 문화적인 교류가 활발해졌다. 아울러 토번의 풍속에도 다소 변화가 생긴 듯하다. <구당서>, <신당서>에 의하면, 송첸캄포는 중국의 문화를 사모하여, 의복도 중국식으로 바꿨고, 중국에 귀족 자제들을 유학을 시켜서 중국의 선진문물을 학습하도록 하였다. 또한 흥미로운 것은 고대 티베트 풍습 중에 얼굴을 붉게 칠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문성공주가 이 풍습을 혐오스럽게 여기자 송첸캄포는 이러한 풍습을 폐지하도록 명했다. 붉게 얼굴을 물들이는 풍습은 부족 연맹 시기의 관습이기 때문에 이를 폐지한다는 것은 토번왕조가 부족적인 성격을 버리고 중국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중앙집권적인 제국의 기틀을 마련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송첸캄포의 관제, 법률 개혁도 중국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 문성공주가 가져온 석가모니불 상을 모시기 위해 지어진 라싸의 죠캉사원


△ 송첸캄포와 문성, 브로큐티 공주
 

  문성공주의 혼인이 티베트 역사에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국의 불교가 이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유입되었다는 점이다. 티베트 전승에 의하면, 문성공주가 송첸캄포에게 시집올 때, 석가모니 불상을 가져왔고, 이 불상을 모시기 위해서 죠캉 사원(大照寺)을 건립했다고 한다. 물론 이 시기 중국의 불교만이 토번으로 들어온 것은 아니다. 고대 티베트 역사서에 의하면 남리송첸 시기 네팔의 왕이 한때 토번으로 피신해 온 것이 계기가 되어 송첸캄포와 네팔의 브로큐티 공주가 혼인을 맺었고 브로큐티 공주 역시 석가모니 불상을 가져와서 라포체 사원을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문성공주의 죠캉 사원과 브로큐티 공주의 라포체 사원은 티베트 불교의 시발점이자 성지로 꼽힌다.

  송첸캄포가 문성공주, 브로큐티 공주와 결혼하면서 불교사원을 건설한 이유는 중국과 네팔에서 받아들인 불교를 후원함으로서,  찬보의 중앙 권력을 공고히 하고자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당시 티베트에는 샹숭에서부터 발달된 본교가 널리 퍼졌다. 본교 승려들은 티베트 각지의 부락 군장들의 권력을 뒷받침하면서 중심 종교가 되었다. 송첸캄포로서는 부족들의 종교적 기반이었던 본교보다는 중국과 인도에서 들여온 불교를 제국의 새로운 종교로 후원하여 기존의 본교 세력을 견제하고자 했을 가능성이 높다. 송첸캄포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티베트로 들어온 불교는 이후 본교와 경쟁 타협하면서 티베트의 중심 종교로 발돋움한다. 


  (3) 송첸캄포는 역사에서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가?

 

  650년 경, 송첸캄포는 사망한다. 사망 당시 그의 나이는 40도 채 안된 나이였다. 하지만 송첸캄포는 재위 기간동안 상당한 업적을 남겼다. 티베트를 통일한 지 얼마 안 되어 분열의 위기를 맞은 토번 제국을 수습하고 각종 법률과 제도 등을 정비하여 중앙집권화에 성공하였다. 그러한 강화된 왕권을 토대로 청해호 일대와 사천 지역, 운남 지역까지 티베트의 영향력을 확장하였고, 당시 세계제국을 표방하던 당을 위협하기에 이른다. 또한 문성공주와의 혼인 외교를 통해 국제적 위상을 높이는 한편 불교를 비롯한 중국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기존의 티베트 문화를 쇄신하고자 하였다.

  티베트에서 송첸캄포는 티베트 실질적 건국의 아버지이자 역사 상 가장 위대한 영웅으로 꼽힌다. 그가 티베트에서 이러한 추앙을 받는 것은 그가 티베트의 강역을 넓히고 중국과의 대등한 외교관계를 맺었다는 것을 넘어서 티베트의 실질적인 문화정체성의 요소들을 창출했다는 점 때문이다. 그의 시기에 티베트 인들만의 문자가 만들어졌고 그의 시기에 받아들여진 불교는 티베트의 하나의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매우 큰 역할을 하였다. 그가 티베트의 문화 영웅이자 전륜성왕으로 꼽히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송첸캄포는 비단 티베트에서만 추앙받는 것이 아니라 현대 중공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는다. 송첸캄포와 문성공주의 결혼은 "한족과 장족의 위대한 결합"으로 평가받는다. 이렇게 중공이 송첸캄포에 대한 긍정적 평가에 열을 올리는 데에는 자국의 티베트 지배를 합리화시키려는 그들의 속내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할 것은 송첸캄포가 중국과 티베트 간의 교류를 활발히 하고 중국의 문물을 많이 받아들인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그것으로 인해 티베트의 문화가 중국에 종속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톤미 삼보타의 문자창제만 보더라도 중국의 한문이 아닌 인도의 산스크리트 어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고 불교의 유입 경우에도 중국 뿐만 아니라 네팔로부터도 불교를 수용하였다. 따라서 송첸캄포는 중국의 문물을 자국의 필요에 맞게 선택적으로 받아들였고, 중국의 문물이 대거 티베트에 들어왔지만, 그 요소가 티베트의 문화를 잠식했기보다는 오히려 티베트에 맞게 토착화되어 티베트 인들의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공헌을 한 것이다.

<계속>

덧글

  • 앨런비 2011/02/12 13:28 # 답글

    송쩬깜뽀 나이를 젊은 쪽으로 선택한거군요-_-; 예전에 티벳 책을 봤을때 하도 나이가 제각각이라 도대채 뭘 믿어야할지 몰겠던데.
  • 첫걸음 2011/02/12 13:44 #

    예전에 소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티베트 관련 사료가 워낙 난잡하다보니....(-.-;;)
    <구당서>와 <신당서>의 기록에 의하면 "약관의 나이에 즉위하였다."고 기록되었으니 송첸캄포가 대략 15세 전후에 즉위했다고 보면 되는데, 현재로써 설득력있는 것은 13살의 나이라고 합니다.
  • Jes 2011/02/12 13:41 # 답글

    이 시기에 현재 티베트인의 정신적 구심점인 라싸와 조캉 사원이 모두 성립되었군요. 어쨌든 당의 굴복의 상징인 송짼깜포-문성공주의 결합이 저런 정치적 프로파간다로 사용된다니 아이러니하네요.

    p.s. 그런데 문성공주가 너무 예쁘게 묘사된 듯...
  • 첫걸음 2011/02/12 13:52 #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의 입장에서는 '중화인민공화국 안에서 일어나는 민족들의 모든 역사는 중국의 역사'라는 것을 견지하고 있기 때문에 무리수를 둬서라도 중국과 티베트의 결합을 부각시키려고 하죠. 이것이 현재 중공이 가진 역사관이라고 할 수 있죠.

    P.S 제 생각에도 문성공주가 뽀샵처리가 잘 된듯...... ^^^^
  • 들꽃향기 2011/02/12 15:51 # 답글

    잘 보았습니다. ^^ 문성공주가 얼굴에 붉은칠을 하지 않겠다고 한 것은 그냥 흔하디 흔한 개인적 요청 정도로만 파악했었는데, 부족사회의 습속을 벗어날 수 있었던 정황을 살필 수 있다는 것은 흥미롭기 그지 없네요. ㄷㄷ

    개인적으로는 '루'와 '천호'의 편제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이러한 편제를 총괄할 수 있는 병부(兵部)의 설립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저도 서영교 선생님 책에서 토번의 체제정비를 잠깐 다루던 항에서 본 것이긴 하지만 이 시기에 병부 역시 정비되었던 것 같더군요. 사실 신라 역시 국가정비의 와중에서 제일 먼저 마련된 것이 병부였다는 점에서 중앙집권화와 강력한 군사력의 편제-통솔에 있어서 불가결한 관료조직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합니다. ㄷㄷ
  • 첫걸음 2011/02/12 17:48 #

    감사합니다. 얼굴의 붉은 칠 한 습속은 조사하면서 보니 샹숭 숨파 등의 다른 티베트 집단에서도 행해진 습속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문성공주의 개인적인 요청 수용과 더불어 부족의 습속에서 벗어나기 위한 일종의 정책이 아니었을까?라고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리고 티베트 병부 설치의 문제는 제가 들꽃 향기님께 배웠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조사했을 때 티베트에서 원수부 등의 군대의 관직체제를 마련했다는 정도로만 파악했거든요 ;;;
  • 유유자적 2011/02/14 16:39 # 삭제 답글

    잘 읽었습니다. 여러모로 새로운 발견을 한듯싶습니다. 특히 가르통첸이나 송첸캄포 관련 유물은 색다른 발견이었기에 더욱 귀중한 자료인듯싶네요.

    쓸데없는 소리하나하자면 당하고 토번의 가르통첸 묘사차이가 영...
  • 소하 2011/02/16 03:22 # 답글

    토번은 참 신기한 존재로 느껴집니다. 한나라의 주적은 흉노였고, 당나라의 주적은 토번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돌궐로 생각하는 분들이 많기는 하지만)
    토번이 비록 당나라를 직접적으로 무너뜨리지는 못했지만, 당나라로서는 토번으로 인해서 군대의 개혁을 강요받았고, 현종의 군대 개혁은 시대의 요구였다고 생각되지만, 결국 당을 멸망시키는 원인을 제공하니까요.
    첫걸음님의 글은 항상 재밌게 잘 보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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