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吐蕃, 티베트 최초의 제국(4)-가르 가문의 시대와 대비천 전투 동아시아사

4. 가르 가문의 시대와 대비천 전투


  (1) 가르 가문의 시대

  
△ 가르동첸

  650년 경 송첸캄포가 죽고, 그 손자 망송망첸이 찬보에 즉위한다. 망송망첸의 아버지는 궁리궁첸이라고 알려졌는데, 한가지 의문이 생긴다. 티베트 문헌 등에 의하면 궁리궁첸은 655년에 사망했다고 하는데, 궁리궁첸이 살아있는 상태에서 그 아들이 대신 찬보 위에 오른 것이다. 왜 그랬을까?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티베트의 문헌 연도가 정확하다면 송첸캄포 사후 새로운 찬보가 즉위하는 과정에서 정치적 암투가 생긴 듯하다. 그렇다면 그 정치적 암투의 중심에는 당시의 실권자였던 가르동첸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다.

  <신당서>에 의하면, "(당 고종) 영휘 초, (송첸캄포)가 죽자, 사자를 파견해서 조문했다. (송첸캄포는)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그 손자를 찬보로 세웠는데, 어리고 정사를 처리하지 못하여, 녹동찬이 재상이 되어 나라를 다스렸다."고 기술되어 있다. 이러한 정황을 볼 때 궁리궁첸 대신 망송망첸이 즉위하는 데에는 가르동첸의 압력이 컸다고 추측해볼 수 있다. 이렇게 하여 어린 찬보를 대신해 가르동첸이 일종의 보정대신(輔政大臣)으로 집권하면서 가르 가문은 찬보의 가문을 대신하여 토번의 중심이 되었고 '가르 가문의 시대'는 두송 망포체가 가르 첸링을 제거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가르동첸이 토번 정권의 핵심인물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송첸캄포 시기 때부터 당과의 관계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기 때문이었다. <신당서>에서 가르동첸에 대해 "동찬은 문자를 알지 못하나, 천성이 총명하고 굳세었고 병사를 쓰는 것이 절제가 있어 토번은 그에게 의지했고, 마침내 강국이 되었다."고 평가할 정도로 그는 중국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또한 <신당서>는 이어서 가르동첸이 처음 입조했을 당시 태종이 가르동첸에게 우위대장군 직을 내리고, 그 주군인 송첸캄포보다도 먼저 낭야공주의 외손녀와 결혼시켰다고 기술했다. 이러한 당 왕조와의 밀접한 관계는 그가 토번 내에서 권력을 확고히 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당과 밀접하다고 하여 가르동첸이 대당외교에서 온건한 입장을 취한 것은 아니다. 그는 대당외교에서 강온양면 정책을 번갈아 사용하면서 토번에 유리한 쪽으로 국제정세를 이끌어 가고자 하였다. 당 고종이 즉위한 이후인 658년, 토번은 황금으로 된 동이와 금실 등을 헌납하며 다시 청혼을 하면서 당과의 우호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변수가 생겼다. 바로 토욕혼 문제였다. 토욕혼의 군주 모용락발(慕容諾鉢)은 640년 당의 홍화공주와 결혼하면서 당과 더욱 밀접해졌는데, 토번이 658년 다시 당에 청혼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당에 내부(內附)를 한 것이다.

  가르동첸은 분노했고 정예병력을 이끌고 토욕혼을 공격했는데, 당시 토욕혼의 대신이었던 소화귀(素和貴)가 토번으로 도망와서 토욕혼의 정세를 모두 알렸기 때문에 토번군은 쉽게 토욕혼을 공격할 수 있었다. 결국 모용락발은 홍화공주와 당의 양주(凉州)로 도망갔다. 토욕혼의 영역을 토번에게 빼앗긴다는 것은 당에게는 청해 일대의 경영권을 잃는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타림분지의 경영도 위협받는다는 의미였다. 고종은 양주도독 정인태를 청해도행군대총관으로 임명하고, 2년 후 백제 멸망을 이끈 장본인으로 잘 알려진 소정방을 안집대사로 임명하여 청해지역을 다시 평정하도록 하였다. 

  정세가 당과의 전면전 분위기로 치닫게 되자, 가르동첸은 다시 장안에 사신을 보내어 당과의 화의를 꾀함과 동시에 청해 지역에서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고자 하였다. 고종은 가르동첸의 화의를 받아들이는 태도로 사신을 보내 토욕혼과 토번 간의 관계 개선을 요구하였다. 이에 가르동첸은 당에 지금의 귀주성 서북부에 있는 적수(赤水) 지역을 말을 기를 수 있게 할양하라고 했으나, 당은 이를 당연히 거부하였다. 청해 일대를 두고 토번과 당 사이에 전운이 감도는 가운데, 토번에 예기치 못한 사태가 발생하였다. 토번의 중심이었던 가르동첸이 급사한 것이다.


△ 가르 가문의 가계도 

   가르동첸이 급사를 했으나 가르 가문의 위세는 꺾이지 않았다.  위의 도표에서처럼 가르동첸에게는 4명의 아들이 있었다. <신당서>에 의하면 "녹동찬이 죽자 아들들이 그 국가를 맡았다."라고 기술되어 있는데, 이들 중 권력의 핵심은 가르친링(祿欽陵)이었다. 가르동첸의 죽음은 당 왕조로써는 불행한 일이었다. 가르친링은 아버지 가르동첸보다 대당외교에서 더욱 강경한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강경한 태도는 금방 드러나고 말았다. 가르첸링이 집권하자 마자, 토번이 당의 기미 주에 속해있던 여러 강인 부락 12개를 격파했기 때문이었다. 


△ 당 고종

  당 고종은 당으로 도망쳐 온 토욕혼 부락들을 양주 인근에 배치하여 토번의 공격을 막는 한편, 재상인 강각(姜恪)과 화가로도 유명한 염립본(閻立本), 고구려 원정 시기 활약한 돌궐 출신 장수 계필하력(契必何力)을 불러 토번을 공격할 방법을 논의하였다. (생각 외로) 계필하력은 신중론을 택했고 강각과 염립본은 토욕혼을 구하여 토번을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합의를 도출하지는 못하고 말았다. 토번과 당의 고조된 긴장상태는 결국 670년 대비천(大非川)이라는 곳에서 포화 상태에 이른다.


  (2) 대비천 전투

  화친과 전쟁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던 토번과 당의 관계는 670년 대비천 전투를 통해서 폭발하였다. 대비천 전투는 토번과 당의 외교 관계에서도 매우 중요한 전투였지만, 당시 동아시아의 판도를 변화시키는데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전투를 계기로 당은 토번, 타림 분지에 대한 경영 방침을 바꿔야 하였을 뿐만 아니라, 요동과 한반도 일대에 대한 전략도 수정해야만 했다.



  전쟁의 발단은 토번 군의 타림분지 공격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당은 고창 등을 복속시키고 안서도호부를 설치하여 타림분지를 경영하고 있었고 안서 도호부의 4개의 진은 당의 서역 경영의 핵심이었다. 하지만 670년(당 고종 함형 원년)에 토번은 당의 기미주 18개를 공격하고, 우전, 쿠차, 발환성을 점령하였다. 우전, 쿠차 등은 안서도호부의 핵심이었고 이 핵심지역을 토번에게 함락당하였기 때문에 안서도호부는 곧 폐지되었다. 토번에 의해 서역경영이 존폐 위기에 놓이게 된 당은 토번과 전면전을 펴야했다.

△ 당의 경기병과 중기병

△ 설인귀
  
   당은 토번과의 전면전에 10만 대군을 투입하였다. 당 고종은 설인귀(薛仁貴)를 라파도행군대총관(羅婆道行軍大總管)으로 임명하고 돌궐 출신의 무장 아사나도진(阿史那道眞)과 한인 장수 곽대봉(郭待封)을 부장으로 임명하여 토번을 섬멸하도록 하였다. 설인귀는 한국인들에게는 잘 알려진 당장으로, 당 태종의 고구려 원정 때 활약하여 출세하여, 결국 668년에는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안동도호부의 책임자가 된다. 아직 제대로 정리되지 않고 있던 요동과 한반도 방면의 실질적 책임자라고 할 수 있는 설인귀를 토번 전선에 투입한 것을 볼 때 당이 얼마나 이 전쟁에 총력을 기울였는 지 알 수 있다.

△ 토번의 중장기병 재현

  이에 맞서서 가르친링이 통솔하는 토번의 군대는 대체로 샹숭, 숨파 등의 부족 연합군으로 편성되는데, 전력의 핵심은 청해와 사천 일대 강인들의 기병 전력이었다. 토번의 기마군단은 중장기병이었다. 토번의 중장기병은 두우의 <통전>에 잘 묘사되어 있는데, <통전> <변방6> 토번 조에 의하면 "사람과 말 모두 쇄자갑(鎖子甲: 비늘 갑옷)을 입는데, 그 마름질 한 것이 심히 정교하고 몸 전체를 두루 싸고 오직 두 눈만 드러내니 화살이 뚫지 못한다. (.....) 창은 세밀하고 중국의 것보다 길며, 활과 화살은 약하나 갑옷은 견고하다. "고 하였다. 이러한 토번의 중장기병은 후대 몽골의 중장기병에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 추정되고, 이후 18세기까지 티베트 군대의 핵심전력이었다. <구당서>나 <신당서>에 의하면 대비천 전투에 투입된 토번의 병력은 약 40만으로 추산된다.

 

△ 대비천 일대

  양군이 격돌한 대비천은 지금의 청해호 남쪽의 절길(切吉) 평원이란 곳이다. 이 평원은 북쪽과 남쪽에 산을 끼고 있고 그 사이로 하천이 흐르는 분지 평원이다. 따라서 토번의 기병전력을 십분 활용하기도 좋고 산지를 이용한 기습 공격에도 유리한 곳이다. 게다가 이 곳은 토번이 장안으로 나가거나 서역지방으로 진출하는데 반드시 거쳐야할 관문이고 당 역시 토번을 공략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할 관문이었기 때문에 그 지정학적 위치는 매우 중요하였다.

  토번과 당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전쟁이었음에도 전투는 싱겁게도 토번의 일반적인 승리로 끝이 났다. 설인귀는 대비천에 이르러서 곽대봉에게 군사 2만을 주고, 후방의 수송부대를 맡도록 하였다. 더불어 대비령의 두 곳에 목책을 쌓고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후방을 지키도록 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나머지 병력을 이끌고 대비천 하류에 있던 적들과 교전하여 격파하고, 소와 양 만 여 두를 노획하여 자신의 오해성(烏海城)으로 나아갔고, 곽대봉에게는 계속 후방에서 원조하라고 지시하였다.

  하지만 곽대봉은 목책을 세우고 후방을 지키라는 설인귀에 명령을 어기고 수송부대를 이끌고 오해성으로 나아갔다. 결국 곽대봉이 저지른 실책은 겉잡을 수 없는 것이었다. 토번군 20만이 곽대봉의 수송부대 행렬을 급습한 것이었다. 사실 설인귀가 대비천 하류에서 패퇴시킨 토번군은 가르친링이 설인귀를 안심시키기 위한 미끼였던 것이다. 수송부대를 모두 잃은 곽대봉은 험준한 계곡에 몸을 숨겼고, 오해성까지 나아갔던 설인귀는 다시 군대를 대비천까지 후퇴해야만 했다. 가르친링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40만 대군으로 설인귀를 몰아붙였다. 결국 설인귀는 가르친링과 굴욕적인 화약을 맺을 수 밖에 없었고, 귀국해서 서인이 되어 쫓겨나게 되었다.


  (3) 대비천 이후.......

 
 
  토번과 당이 명운을 걸었던 대비천 전투는 결국 당의 처참한 패배로 끝나고 말았다. 대비천 전투의 여파는 단순히 전투에서 당이 대패를 했다는 결과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앞으로의 토번과 당의 외교 관계를 전개하는데 매우 큰 역할을 했을 뿐만이 아니라, 당의 전반적인 외교정책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이로 인해 동아시아 국제질서는 큰 변화를 맞게 되었다.

  우선 청해 일대의 토욕혼 세력이 완벽히 토번에 의해 멸망당했다. 토욕혼은 비록 작은 국가일지라도 당과 토번의 사이에서 완충지대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완충지대 역할을 하던 토욕혼이 궤멸되면서 당은 토번과 직접적으로 국경을 맞닿게 되었고 사천, 감숙회랑, 타림분지에 대한 경영권은 더욱 위협받게 되었다. 더군다나 토욕혼이 존재하던 청해 일대는 장안으로 통하는 길목이기도 하였기 때문에 수도 장안도 토번의 위협에 쉽게 노출되었다. 이것은 개인적인 추측이지만 이후 당의 동도였던 낙양이 좀더 중요해진 데에는 장안이 대비천 전투 이후 더이상 안전지대가 아니었다는 점도 작용했을 것이다.

  대비천 전투 이후 당의 서방정책 뿐만 아니라, 흥미롭게도 동방정책도 삐걱거리기 시작하였다. 앞서 언급한대로 당은 대비천 전투에 당시 안동도호부의 실질적 책임자였던 설인귀를 총사령관으로 파견하였다. 그런데 대비천 전투가 당의 처참한 패배로 끝나면서 당의 요동과 한반도 전략도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구당서><설인귀전>에 의하면, "설인귀가 관직에서 제명되었으나 고려(고구려)의 무리가 다시 반역을 하여, 조를 내려서 인귀를 다시 계림도총관으로 임명하여 그들을 경략하게 하였다."고 했다. 설인귀가 다시 동방정책의 책임자가 되었으나 요동에서의 당의 영향력은 다시 회복되기 힘들었다. 신라는 백제, 고구려 유민과 연합하여 대동강 이남에서 당의 영향력을 배제시켰고, 요동에서도 거란인 이진충이 반란을 일으키고 그 틈을 타서 대조영이 발해를 세우는 등 당의 영향력은 요동과 한반도에서 급속히 후퇴하였다.
  
  한편 대비천 전투로 인해 이득을 본 것은 다름아닌 토번의 실권자 가르친링이었다. 대비천 전투에서 뛰어난 전략으로 당을 격퇴한 가르친링은 자국내에서의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할 수 있었고, 이로 인해 토번 내에서의 가르 가문의 위세는 한층 강력해 지게 되었다. 아울러 가르친링의 승리는 그의 대당강경책도 승리했다는 의미였다. 따라서 대비천 전투 이후 토번은 당에 대한 강경책을 더욱 강력히 추진할 수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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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앨런비 2011/02/14 17:25 # 답글

    그런데 토번에 투입한 당 병력을 보니 왜 소수라고 느껴질까요 이거(...)
  • 첫걸음 2011/02/14 17:32 #

    저도 동감입니다. ㅠㅠ 사실 <구당서>, <신당서>의 숫자는 좀 의심해봐야 할 듯 싶어요. 제 자신도 과연 당시 토번의 군대 규모가 저 정도였을까 의심스럽습니다. 중국의 특유의 과장법인 듯 하네요. 당으로는 토번의 병력을 얕보고 쳐들어 간 듯 하기도 하고요.......
  • 앨런비 2011/02/14 17:33 #

    것보다 고구려에 갈아넣던 숫자와 비교하면 너무나도 적어보이는 이 쪽수(...)
  • 첫걸음 2011/02/14 17:42 #

    그러고 보니 그렇네요. 이세민이 고구려 원정을 할 때 약 30만을 투입한 것을 보면 상당히 적은 숫자라고도 할 수 있네요......... 어쩌면 당 고종 때는 당 태종 시기보다는 관리해야 할 영토가 많기 때문에 병력을 한곳에 집중하기가 어려웠을 수도 있습니다.
  • 한단인 2011/02/14 18:07 #

    실상 3차에 걸친 고구려 원정에서 당이 갈아먹은 병력 수가 좀 많았어야...

    2차 원정에서 30만 대군이 해로로 왔다가 개박살이 났으니 전비 소모는 대체 얼마...OTL
  • 한단인 2011/02/14 18:11 # 답글

    가르동첸이 송첸감포보다 먼저 당 왕실과 혼인을 맺었다니 좀 쇼킹하군요. 토번 조정 내부에서는 권위에 있어서는 송첸감포에 필적할만한 권위를 얻은 셈인데 송첸감포가 동첸을 일말에 의심이라도 하지 않은게 되려 궁금해집니다. 그러고보면 이건 당 태종의 함정카드였을지도...(엉?)


    덧 1. 대비천 전투의 토번 병력이 저는 20만으로 알고 있었는데 40만이나 됐음까? 이건 무슨 흉노 묵특 선우도 아니고..ㄷㄷㄷ


    덧 2. 대비천 전투급의 전투가 한 2~3년만 일찍 벌어졌다면 고구려가 망하진 않았을 것을..(엉?)
  • 첫걸음 2011/02/14 18:48 #

    한단인 말씀에 동감합니다. 이것도 당 태종의 외교 전략이라고 할 수 있죠. 가르동첸과도 혼인 관계를 맺어 토번 내부에도 당의 우군을 심었을 가능성도 있고요. 다만 격의 차이가 조금은 나죠. 문성공주는 황족인 반면 가르동첸이 결혼한 사람은 공주의 외손녀였으니까요.

    송첸캄포로서도 상당히 가르동첸을 경계할 수도 있었겠지만 기록 상에 의하면 송첸캄포와 가르동첸의 갈등은 찾기가 힘듭니다. 다만 조심스럽게 보자면, 송첸캄포가 이른 나이에 사망하고 그 손자가 왕위에 오른 것을 보면 송첸캄포와 가르동첸 사이에도 어떠한 정치적 갈등이 존재했을 수도 있습니다.

    덧 1. <설인귀전>에 의하면, 처음 곽대봉의 수송 병력을 공격할 때 토번군은 20여 만이고 이어 설인귀를 추격하여 공격한 토번군이 40여 만이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보면 대략 40만 정도가 대비천 전투에 참여한 것이죠. 하지만 이 40만이라는 숫자는 다소 과장된 숫자일 수 있고 비전투원을 제외하면 실제 전투에 참여한 것은 대략 20만 정도라고 생각됩니다.

    덧2. (그랬다면 좋을련만....ㅠㅠ) 대비천 전투 급 전투가 2~3년 전에 일어났다고 하더라도 고구려의 멸망을 늦추는 역할을 했을 지는 몰라도 고구려가 멸망을 하지 않았는지는 의문입니다. 비록 이세민이 실패는 했지만 이세민의 공격으로 고구려가 입은 타격도 상당했기 때문입니다.
  • 한단인 2011/02/14 18:59 #

    아.. 공주의 외손녀였다는 부분을 그냥 지나쳐 읽었군요. OTL


    덧 2. 고당 전쟁에서 결정타는 2차 전쟁이긴 했는데 3차의 마지막 카운터가 아니었다면 근근히 왕조는 이어갔을 거 같다는 느낌은 들거든요. 2차 전쟁의 실패로 당왕조도 전비가 간당간당한 형편이었으니.. 실상 연남생의 망명과 공격 요청이 아니었다면 3차 전쟁이 벌어지기에는 더 시간이 걸렸을테죠. 그러고보면 650년대 말 경은 고구려로서도 카운터를 날릴 기회였는데 그 기회를 못살린게 안타까움.

    암튼 3차 전쟁 벌어지기 전에 숨돌릴 시간을 고구려가 좀 더 벌었다면 아마도 고수전쟁 복제판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 유유자적 2011/02/16 17:55 # 삭제

    쿨럭, 죄송합니다만 신,구당서와 자치통감에서는 가르통첸이 말하길 "난 이미 부모님이 전해준 약혼가자 있고 나의 첸포가 아직 공주를 못맞았는데 어찌 결혼하겠습니까?"라는 대목이...
  • 첫걸음 2011/02/22 23:08 #

    유유자적님/ 늦어서 죄송합니다. 가르동첸이 거절하지만 태종이 이를 불허합니다. ^^
  • 2011/02/14 18:12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첫걸음 2011/02/14 19:06 #

    다음 편을 끝으로 가르가문을 중심으로 한 글은 끝입니다. ^^ 물론 이후에도 가르(論) 가문이 등장하지만 가르친링이 제거된 이후 찬보의 권력이 한동안 가르 가문을 압도했기 때문이지요. 가르친링 이후로 사실상 가르 가문은 종결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1. 지적하신 말씀이 옳습니다. 토욕혼의 멸망은 장안 지역을 노출시켰을 뿐만 아니라, 하서회랑 지역까지 토번에게 노출되었기 때문에 당의 서쪽 영역은 항상 위태롭게 됩니다. 763년 토번이 장안을 쉽게 점령할 수 있었던 이유도 장안을 보호해 줄 바리케이드가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죠.

    2. 아... 사실 저도 여전히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상당히 일리있는 말씀이지만, 제가 가진 자료의 한계로 인해 맞다고 확답은 못하겠습니다.

    하지만 다음 글에 언급하겠지만 가르동첸의 아들들은 여러 방면의 병력을 거느리고 있었고 가르 찬파의 경우 동쪽 국경을 30년 동안 담당하고 있었다는데, 이렇게 볼 때 가르동첸의 아들들이 국경의 요충지를 담당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고 지적하신 것처럼 이러한 이유로 가르가문이 대당 강경파가 되었을 가능성을 높습니다.

  • Jes 2011/02/14 20:16 # 답글

    당 제국 안습사...
  • 첫걸음 2011/02/14 21:38 #

    안습도 아닙니다 안구 폭우 수준입니다. ㅋㅋㅋㅋ
  • 유유자적 2011/02/16 17:51 # 삭제 답글

    토번을 까요 근데 못까요 돌궐이 흥해요
    돌궐을 까요 근데 못까요 거란이 흥해요
    거란을 까요 근데 못까요 발해가 흥해요

    안습이로다... 하지만 개원시기떄 폭풍이 시작된다 긴장빨아라!
  • Rothschild 2011/02/20 18:53 # 삭제 답글

    안녕하세요. 저번에 왔던 로스차일드입니다. 중국역대왕조병력에 관해서 대충정리한게있는데 도움이될지모르겠지만 링크걸어봅니다. http://blog.naver.com/mnbv1144/100122451004
  • 첫걸음 2011/02/22 23:06 #

    오랜만에 글 쓰니라 댓글이 늦었습니다.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Rothschild님 ^^ 잘 참고하고 사용하겠습니다.
  • 여소제 2011/03/06 00:35 # 답글

    『dpa'o gTsug-lag phreng-ba연대기, Lhobrag판 목판본』에 의하면 가르통첸은 송첸캄포(松贊干布)가 죽자 이를 숨키기 위해 송첸캄포의 조각상을 장막이 걸쳐진 마차에 싣고 돌아다니게 하여 송첸캄포의 죽음을 오래동안 숨겼고 그의 이름으로 나라를 통치했다고 나옵니다. 송첸캄포 외에도 실제 이런 일이 티베트에서 또 있었는데 섭정인 상게 갸초는 제 5대 달라이 라마의 죽음을 비밀로 하고 그의 이름으로 나라를 통치했었죠. 개인적으로는 연대문제등은 여기서 나오는게 아닌가 합니다.
  • 여소제 2011/03/09 17:57 #

    오타수정

    숨키기 위해->숨기기 위해
  • 고고 2011/05/10 11:54 # 삭제 답글

    문성공주 자료르 찾던 중 들렀어요,
    굉장히 흥미진진하네요!
  • 에빌 2013/03/21 14:53 # 삭제 답글

    토번의 병력이 5배정도 뻥튀기된것이라는 의견도잇더군요.
    그리고 안동도호부의 설인귀를 급하게 넣은부분만보더라도 당시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갓다는것을 알수잇을텐데 십만이라는 숫자는 고구려원정당시와 비교해볼때 너무 적은수가 아닌가라는 생각이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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