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吐蕃, 티베트 최초의 제국(5)-가르 가문 시대의 종결과 금성공주 동아시아사

5. 가르 가문 시대의 종결과 금성공주


  (1) 토번의 계속되는 공세와 흑치상지

   670년  대비천의 패배로 당에 대한 토번의 공세는 한층 날카로워졌다. 하지만 당으로서도 한시 바삐 대비천에서의 패배를 만회해야만 했다. 676년 토번이 선주와 곽주를 약탈하여 백제에서도 전공을 세웠던 유인궤를 도하군 진수로 삼아 토번의 침입을 막도록 하였고 678년에는 토번에 대대적인 반격을 가하기 위하여 중서령 이경현을 도하도 행군대총관, 서하진무대사, 선주도독으로 임명하고, 관내도(關內道)에서 모병(招募)을 실시하였다. 관내도의 모병실시를 통해 당이 토번 공격에 상당한 신경을 썼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또한 익주장사 이효일(李孝逸), 휴주도독 발왕 이봉 등에게도 명을 내려 검남과 산남 지역에서 모병을 실시하여 토번을 제압할 수 있게 하였다.

  


   678년 가을, 이경현의 당군과 토번의 군대가 청해에서 다시 충돌하였다. 수차례 전투에서 당의 군대는 토번의 군대에 번번이 패하고 말았다. 이경현의 부장 공부상서 유번례는 전사하였고 이경현은 더이상 군대를 이끌고 구원하지 못하였다. 당군은 토번의 공세에 밀려서 퇴각하였고 이경현은 승풍령에 진을 쳤다. 하지만 승풍령의 상황도 당군에게는 심각했다. 진흙탕으로 인해 당군은 움직이기가 힘들었고 토번군은 이미 높은 언덕을 선점하여 당군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이러한 당군의 상황을 타개한 이가 흑치상지였다.

  흑치상지는 백제의 달솔 출신으로 백제가 멸망하자 한때 백제 부흥군의 수령으로 활동하다가 당군에 항복한 인물이었다. 승풍령 전투 당시 흑치상지는 좌령군 원외장군으로 참가하고 있었다. 원외(員外)이기 때문에 직책은 낮았던 것으로 보인다. 흑치상지는 당군의 난개를 타개하기 위하여 결사대 500인 만을 거느리고 야음을 틈타서 토번의 군대를 급습하였다. 흑치상지의 야습으로 토번의 군중은 혼란스러워졌고 300명의 전사자를 내고 급히 퇴각하였다. 이경현은 그 틈을 타서 선주로 퇴각하였고 결국 그는 충주자사로 좌천되었다.

  대비천 전투 이후 계속되는 대결의 결과는 당과 토번에서 각각 다른 양상으로 나타났다. 이는 <구당서>196. <토번 상>과 <신당서>216. <토번열전 상>에 잘 드러난다. 당 고종과 당의 대신들은 토번의 잇다른 승리에 매우 혼란스러웠던 반면에, 토번은 티베트 전역을 완벽히 통일하여 북쪽의 타림분지와 남쪽의 운남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하였다.

  황제는 유약하여 원대한 전략이 없었고 여러 장수들의 패배를 보고 근신들의 의견을 널리 들어 토번을 제압하는 방책을 구했다. 황제가 말했다.
  "짐이 아직 갑옷을 입고 적을 공격하여 없애지 못하였다. 지난날 고구려와 백제를 멸하고자 연이어 병사를 일으켜 중국을 소란시킨 것을 짐이 지금에 와서 후회하고 있는데, 이제 토번이 침입해오니, 우리의 계책으로 이를 진압할 수 없겠는가?"
  중서사인 유의지 등이 함께 대답하였는데, 반드시 나라가 백성들을 풍족하게 해주어야 토번을 공격할 수 있다고 하였고, 혹자는 적은 음험하고 교활하니 화친을 하면 안된다고 하였으며, 혹자는 둔전을 엄격히 하여 수비하기 유리하게 하자고 하였다. 오직 중서시랑 설원초만이 "적을 놓아 주는 것은 근심을 만드는 것이니, 병사를 모아 적을 치는 것만 못합니다."라고 말했다.
  황제가 황문시랑 내환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적이 사망한 이후로, 뛰어난 장수가 없구나."
   내환이 바로 말하였다.
  "지난 날 도하의 병력은 적을 제압하기에는 충분했으나 여러 장수들이 명령을 잘못 내렸기 때문에 공이 없는 것이옵니다."
   황제는 계책을 생각하지 못하고 논의를 끝내고 말았다. <신당서>216. <토번열전 상>

  이 시기 토번은 마침내 양동, 당항과 여러 강인의 땅을 얻고, 동으로는 양주, 송주, 무주, 수주 등의 주와 서로 접하였고 남으로는 파라문(네팔)에 이르렀으며 서로는 구자 소륵 등의 4진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북으로 돌궐과 닿아있었는데, 그 땅이 사방 만여 리에 이르렀으니 한과 위 왕조이래 서융이 이렇게 흥성한 적은 없었다. <구당서>196. <토번 상>


△ 7세기 말 무렵 당과 토번

△ 토번의 진출방향과 당-토번의 주요 충돌지점(붉은색)

   <구당서>의 기록처럼 대비천 전투 이후 토번은 그동안 지배권에서 지속적으로 이탈하였던 샹숭, 숨파 등의 부족 연맹들을 완벽히 장악하였고, 이어 지속적으로 당의 타림분지 경영의 중심이었던 안서도호부를 영향력에 넣고 사천과 운남도 지속적으로 침략하였다. 토번과 당의 주요 충돌지점은 사천 서북에 위치한 송주와 사천 서남에 위치한 무주였는데, 당은 이 무렵에 특히 무주의 서남쪽에 안융성을 지어 토번의 사천, 운남 진출을 막고자 하였지만, 토번의 공격을 받고 함락당하기 일수였다.


△ 흑치상지

  토번은 대비천과 승풍령 전투의 기세에 힘입어서 679년 다시금 당을 공격한다. 공격의 선봉장은 가르친링의 동생 가르찬파와 소화귀였는데, 3만의 병사를 이끌고 하원(河原)으로 진출하고 양비천(良非川)에 진을 쳤다. 이에 당은 다시 이경현을 보내 황천(湟川)에서 토번과 전투를 했으나 다시 패배했다. 마치 전투의 양상은 승풍령 전투의 재현이 되는 듯 했다. 하지만 이 상황을 반전시킨 장수가 있었으니 바로 흑치상지였다. 흑치상지는 정예 기병 3000명을 이끌고 토번 진영을 급습했고 흑치상지의 때아닌 기습을 받은 가르찬파는 토번 영내로 퇴각하였다. 흑치상지가 토번과의 전투에서 전과를 올리자 당 조정은 흑치상지를 하원군경략대사로 임명하여 토번의 진출을 억제하고자 하였다. 그나마 당으로는 흑치상지라는 대항마가 있어 다행인 셈이었다.


  (2) 가르 가문의 흥망과 두송 망포체

  대비천 전투 이후 당과 토번 간의 전쟁이 가속화되면서, 가르 가문의 명성과 위세는 점점 높아졌다. 가르친링의 대당 강경책이 효과를 얻었으니, 그와 그의 형제들이 권력의 정점에 오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럴 즈음인 675년(당 고종 의봉 4년), 찬보 망송망첸이 젊은 나이로 숨을 거둔다. 망송망첸의 뒤를 이은 것은 그의 어린 아들 두송 망포체였다. 두송 망포체도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망송 망첸의 미망인이자 두송 망포체의 어머니 크리 마 로드가 섭정을 하게 되었으나, 실질적인 권력은 가르 가문의 형제들이 쥐고 있었다. 송첸캄포 이후 찬보들의 이른 즉위와 이른 죽음이 가르 가문의 권력을 영속시키는 원동력이었다.

△티베트에 남아있는 문성공주 상

  망송 망첸이 죽고 가르 가문의 집권이 확고해질 즈음, 토번의 대내외적으로 큰 사건 2개가 연이어 터진다. 우선은 680년 토번으로  시집왔던 문성공주가 사망했다. <구당서>는 "영륭 원년, 문성공주가 훙(薨0했다. 고종은 사신을 보내어 조문하고 치제하였다."고 담담하게 서술하였다. 송첸캄포에게 시집간 이후 문성공주가 토번의 풍속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는 자세히 기록되었지만 정작 그녀의 삶 자체에 대한 기록은 없다. 토번과 당의 치열한 전쟁 속에서 그녀의 삶은 항상 불안했을 것이고 아마 머나먼 티베트 고원에서 홀로 맞는 그녀의 죽음은 쓸쓸했으리라. 어쨌든 당과 토번을 이어주던 문성공주가 죽으면서 당과 토번의 관계도 매우 냉랭해졌다.

 

  한편 당에서는 고종의 황후였던 측천무후가 690년 당을 일시적으로 무너뜨리고 주(周) 왕조를 세우는데, 역사에서는 이를 무주혁명이라고 부른다. 비록 690년에 무주 왕조가 세워졌지만, 무후가 병든 남편 고종을 대신하여 수렴청정한 664년부터가 실질적인 '무주시대'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무주 시대의 토번관계도 고종 시대의 토번관계와 다를 바 없었다. 무후가 주왕조를 세우자 토번은 여러 국가들과 의례적으로 조하하였다. 하지만 698년 무후는 문창우상(文昌右相) 위대가를 안식도대총관으로 임명하고 안서대도호 염온고를 부장으로 임명하여 토번을 공격하게 하였고, 그 이듬해에도 문창우상 잠장청을 무위도행군대총관으로 임명하여 토번을 치게 하였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실패하였다.
  
  튼튼하게 유지될 것 같던 가르가문의 위세도 692년을 기점으로 한풀 꺾이기 시작한 듯 하다. 692년 토번과 가르 가문에게는 큰 타격을 주는 사건이 일어났다. 토번의 대수령이었던 갈소(曷蘇)와 잠추(昝)가 무측천에 귀부한 것이다. 갈소는 당항의 수령이었고 잠추 역시 강인들의 수령이었는데 대수령이라는 직위를 보서 이들은 토번제국 내에서 상당한 위치의 고관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들이 갑자기 무측천에게 귀부한 내막은 모르겠지만 당시 토번의 정치를 통해서 추측해 보면 두송 망포체 즉위 이후 토번의 중앙권력이 약화되었고 가르 가문의 집권에 반발한 일부 강인 수령들이 무후에게 투항한 것으로 보인다. 무후로서는 이들 강인 수령들의 투항은 상당한 힘이 되었음은 당연하다.

  무후는 이에 힘입어 타림분지에서의 중국의 영향력을 확장하고자 하였다. 우응장위장군 왕효걸을 무위도행군대총관으로 임명하여 토번을 공격하였다. 왕효걸은 타림분지 일대의 토번을 공격하여 대파하였고, 무후는 다시금 타림분지 지역에 안서도호부를 설치하였다. 이에 토번은 중국에 빼앗긴 타림분지를 되찾기 위하여 돌궐과 연합하여 남과 북에서 양동공격하기도 하였고, 가르첸링 형제가 소라한산(素羅汗山)에서 왕효걸과 교전하고, 양주를 침입하는 등 다양한 시도를 했으나, 왕효걸 등의 활약으로 결국 실패하고 가르첸링은 무후 측의 곽원진과 화약을 맺었다.

  갈소와 잠추의 귀부, 중국의 타림분지 회복 등의 잇다른 사건은 가르첸링 형제들의 집권에 적신호와 같았다. 또한 이무렵 찬보 두송 망포체가 장성하면서 점차 가르첸링 형제의 권력을 빼앗고자 하였다. 드디어 699년 두송 망포체가 칼을 들었고, 하늘을 찌르던 가르 가문의 권력은 그 종결점을 찍었다.


△ 두송 망포체

  찬보 두송 망포체는 대신 논엄(論嚴)과 가르 형제를 제거할 계책을 짜고 섭정이었던 어머니 크리 마 로드의 동의를 얻었다. 고대 티베트 문헌에 의하면 크리 마 로드는 가르 가문의 공적으로 인해 가르첸링 숙청을 망설였지만 결국 아들의 편을 들었다고 한다. 당시 가르 가문은 토번의 변경에 각각 군진을 보유하며 주둔하고 있었는데, 두송 망포체는 사냥을 핑계로 가르첸링의 무리를 수도 라싸로 불러들였다. 가르 가문의 수하 2,000여 명이 라싸에 집결하자, 두송 망포체는 친위군을 이용하여 이들을 제거하고 가르친링과 가르찬파를 수도로 불렀다. 가르친링은 찬보의 명을 거부하였고 두송 망포체는 친히 변경의 가르친링을 토벌하러 나섰다. 전투가 시작하기도 전에 가르친링의 군대는 찬보를 보자 무너지기 시작했고 이를 본 가르첸링은 자살하였다. 이로써 가르동첸 이후, 40여 년 간 전권을 휘두르던 가르 가문의 영화는 그 막을 내렸다.

  첸링이 죽자, 동생 찬파는 형의 아들 분포지를 데리고, 중국으로 투항하였다. 무후는 가르찬파가 항복해 오자, 우림영의 군대를 파견하여 영접하는 한편, 찬파를 특진 보국대장군 귀덕군왕에 임명하였고 분포지를 좌우림대장군 안국공에 봉하는 등 이들을 후히 대접하였다. 또한 찬파에게 그가 거느리고 온 부락의 병사들을 하원에서 통솔하게 하였는데, 이는 찬파를 회유하여 토번의 세력 확장을 억제하고자 하는 중국 측의 의도였다고 생각된다. 가르찬파가 죽자 조정에서는 안서대도호로 추증하였다. 한때 티베트와 중국 일대에서 명성을 떨쳤던 첸링, 찬파 형제의 최후는 이와 같았다.


  
△ 두송망포체의 능묘로 알려진 토번 왕릉

   가르 가문을 제거한 두송 망포체는 곧 중국을 공격한다. 하지만 중국 공격은 두송 망포체의 뜻대로 쉽사리 되지 않았다. 700년 두송 망포체는 장수 국망포지(麴莽布支)를 보내 양주를 공격하고 창송현을 포위하였지만, 농우제군주대사 당휴경과 당에 귀부한 가르첸링의 아들 분포지에게 패배하였고, 702년에는 두송 망포체 자신이 직접 실주를 공격하였지만 실주도독 진대자에게 4번의 전투에서 패배하였다. 그 결과 두송 망포체는 측천무후와 화의를 맺었다. 

  중국 원정을 실패한 두송 망포체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바로 네팔의 반란이었다. 네팔은 송첸캄포 시기 토번과 혼인관계를 맺었고 이 시기까지 토번의 속국이 되었는데, 이 시기 토번의 지배에 반기를 든 것이었다. 네팔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두송 망포체는 친히 군대를 이끌고 나아갔다. 하지만 결국 진중에서 두송 망포체는 불운한 최후를 맞았다. 어린 시절에 찬보의 위에 올랐지만 줄곧 가르첸링의 권력에 눌려 제대로 정치를 못 펴보았고, 장성하여 기회를 틈타 가르 가문의 형제들을 제거하고 드디어 친정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운은 그를 따라주지 않았던 모양이다. 결국 네팔의 반란을 진압하는 도중, 진중에서 최후를 마치고 말았다.


  (3) 치데축첸의 즉위와 금성공주

 
△ 토번 찬보의 투구
  
  두송 망포체가 전장에서 사망하자, 찬보 위를 두고 두송 망포체의 아들들이 다퉜다고 <구당서>와 <신당서>는 전한다. 이러한 혼란기 속에서 찬보 위에 즉위한 것은 치데축(송)첸(赤德祖(松)贊, Kri-ide gtsung-btsan) 이었다. 치죽데첸은 당시 나이가 7세였기 때문에 할머니였던 크리 마 로드가 다시 섭정을 하게 되었다.
 
  티베트 전승과 역사서에 의하면, 크리 마 로드는 "하늘은 왜 이리 박정하여 이런 비극이 두 번씩이나 일어나게 하는가? 토번 왕조의 무거운 책임을 여인에게 지게 한단 말인가?"라고 한탄하였다. 비록 그녀의 한탄처럼 그녀는 여인으로 고된 삶을 지게 되었지만 그녀는 뛰어난 정략가였고 그녀로 인해 송첸캄포 이후의 토번왕조가 유지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치데축첸의 치세 동안 안정기를 찾은 토번 왕조는 치송데첸의 시대 최전성기를 구가할 수 있었는데, 이러한 치죽데첸의 안정된 치세는 크리 마 로드가 마련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크리 마 로드가 치데축첸의 섭정으로 시도한 정책은 송첸캄포 이후 단절되었던 중국과의 구생(舅甥: 장인과 사위의 관계) 관계의 회복이었다. 당시 중국은 무측천 사후 무측천의 아들 중종이 즉위하여 당 왕조를 다시 회복한 상태였다. 토번은 사신을 보내어 찬보의 즉위를 알리고 당과 회맹을 시도하였고, 708년 사신을 보내 찬보와 당의 공주 간의 결혼을 요청했으나 당은 거부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한 것은 크리 마 로드였다. <신당서>에 의하면, "토번이 다시 사자를 보내 납공하였는데, (찬보의) 조모 가돈(可敦: 카툰, 유목 수령의 부인) 또한 종아를 파견하여 결혼을 청했다."고 하였다. 크리 마 로드의 노력으로 709년 토번과 당의 구생관계는 복원되었다.

△ 금성공주

 
 △ 치데축첸과 금성공주

    문성공주에 이어서 토번으로 시집간 여인은 금성공주(金城公主), 옹왕(雍王) 이수례(李守禮)의 딸이자 중종의 조카였다. 토번의 사신 상찬돌(尙贊咄)과 명실렵(名悉獵)이 공주를 맞으러 장안으로 파견되었고, 중종은 그들을 환영하고 공주를 위로하기 위해 쿠차의 음악을 연주하게 하는 한편, 양거에게 공주를 호위하여 토번까지 따라가도록 하였다. 중종은 직접 시평현(始平縣)까지 나왔고 금성공주를 보낸 후, 슬퍼하면서 공주를 배웅한 시평현 봉지향(鳳池鄕)을 금성현(金城縣) 창별향(愴別鄕: 이별을 슬퍼한다는 의미)으로 고치고  그곳 백성들에게 대사령을 내리고 1년 간 부역을 면제하였다. 이로 볼 때 중종이 금성공주를 떠나 보내는 슬픔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금성공주는 토번에 들어가서 따로 궁궐을 짓고 기거하였다.

  금성공주의 결혼으로 표면 상으로 당과 토번의 구생, 혹은 화친 관계가 회복되었지만 이러한 관계는 얼마 안 가 다시 깨지고 말았다. 중종이 죽고 예종이 즉위하자, 감찰어사 이지고는 토번에게 예속되어 있던 운남지역의 요주만과 서이만을 공격하자는 주청을 올렸다. 요주만은 운남 지역에 위치하면서 당시에는 토번에 예속되어 있었는데, 당으로는 사천의 정세를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운남 지역도 안정시켜야만 했다. 결국 이지고의 청이 받아들여져 이지고가 요주만을 공격하였지만 이지고는 요주만에게 사로잡혀 목이 잘리고 희생제물로 바쳐졌다.

  토번과의 불안정한 관계는 타림분지와 하서회랑 일대에서도 계속되었다. <구당서>의 "토번은 속으로 비록 노했으나 겉으로는 화친과 우호를 다졌다" 기록은 당시 당과 토번의 관계를 잘 보여 준다. 하지만 정세는 토번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토번은 당을 압박한 결과 하서구곡을 얻을 수 있었다. 명분 상은 금성공주의 목욕처로 당에게 선물받은 것이지만 실질적으로는 토번이 당의 전략적 요충지를 뺏었다고 보면 되겠다. 하서구곡은 <구당서>와 <신당서>에 의하면 "비옥하고 병마를 기를 수 있는 땅"이었다. 따라서 토번이 이 하서구곡을 얻었다는 것은 병마를 기를 수 있는 요충지를 얻었다는 것과 동시에 당과의 관계에서 우위를 점했다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금성공주의 결혼 이후, 토번과 당의 관계는 언제 깨질 지 모르는 살얼음판과 같은 것이었다. 이러한 위태로운 관계 속에서 누구보다 조마조마 했을 사람은 아마 금성공주가 아니었을까? 금성공주는 중종에게 토번과의 진정한 화의를 바라는 상소문을 썼다고 전해진다. 토번의 볼모와 같은 신세 속에서 토번의 압력으로 상소를 썼을 가능성이 높지만, 어쩌면 자신의 간절한 바람도 그 안에 담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금성공주의 염원과는 달리, 당과 토번의 관계는 화친과 전쟁 속에서 요동치고 있었다.

<계속>

덧글

  • 고리아이 2011/02/23 11:16 # 답글

    투구가 왕관에 가깝네영^___^))
  • 첫걸음 2011/02/23 11:50 #

    맞아요. 중국사이트에는 투구라고 나와 있는데 왕관에 더 가까운 듯 합니다. ^^

    고리아이 님께서 이 글을 이오공감에 추천하셨군요? 항상 좋은 격려 감사합니다.

    사실 부족한 점이 많아 이오공감에는 올려지기 부끄러운 글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렇게 추천해 주셔서 그저 감사드릴 뿐입니다.
  • 소하 2011/02/23 12:12 # 답글

    어제 새벽에 보다가 다 읽지 못하고, 오늘에서야 모두 읽게 되는군요. 재미있게 잘 보았습니다. ~~
  • 첫걸음 2011/02/23 13:53 #

    어제 단군릉 글 쓰시고 늦게 제 글까지 다 읽어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 2011/02/23 12:16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첫걸음 2011/02/23 13:49 #

    사실 국내에서 일반인들이 티베트 연대기, 왕통기, 편년기에 대해서 구체적 접근을 하는 것이 힘듭니다. 저도 직접 인용을 하지 못하고 연구서들, 개설서들에 인용된 내용들을 기초로 하기 때문에 근거면에서 확실하지 못하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정확히 어떤 책에서 어떤 내용이 나왔다는 것을 밝히지 못하고 '고대 티베트의 역사서나 전승에 의하면~'이라는 식으로 두리뭉실하게 넘어간다는 점에서 저의 한계점을 인정하고 이 글을 읽는 분들께 진심으로 죄송하다고 생각합니다.

    대체로 존 슈타인의 저서나 다른 티베트 역사를 다룬 책들은 주로 오렐 스타인이나 폴 펠리오가 발견한 돈황본 토번역사서들을 참고하는 듯 합니다.

    돈황본 티베트 역사문서들에 대한 간략한 정보들은 위키피디아 영문판에 있습니다. 나중에 참고 문헌으로도 올리겠지만 댓글로도 링크할테니 필요하시면 참조하시길 바래요^^

    <영문판>

    Tibetan Annals: http://en.wikipedia.org/wiki/Tibetan_Annals
    Old Tibetan Chronicle: http://en.wikipedia.org/wiki/Old_Tibetan_Chronicle

    토번 왕 연표: http://en.wikipedia.org/wiki/List_of_emperors_of_Tibet
    http://zh.wikipedia.org/wiki/%E8%B5%9E%E6%99%AE(중문)
  • 소하 2011/02/23 17:13 #

    아! 그것이 펠리오 문서였군요. 감사합니다.
  • 유유자적 2011/02/23 16:57 # 삭제 답글

    여러모로 잘 배우는 바입니다. 항상 감사함을 느끼는 바...

    아래 게시물에 한걸음님의 게시물과 이미지를 썼는데 어떠한지 묻고싶군요..
  • 유유자적 2011/02/23 16:57 # 삭제

  • 첫걸음 2011/02/24 21:26 #

    카페 회원으로 가입을 해야 볼 수 있군요 ㅠㅠ
  • 한단인 2011/02/23 18:51 # 답글

    별거 아닌 사소한 것일 수 있는데 궁금한 게 하나 있습니다만..

    [ 678년에는 토번에 대대적인 반격을 가하기 위하여 중서령 이경현을 도하도 행군대총관, 서하진무대사, 선주도독으로 임명하고, 관내도(關內道)에서 모병(招募)을 실시하였다. 당 왕조의 사실상 최초의 모병제도 실시로, 당이 토번 공격에 상당한 신경을 썼음을 알 수 있다. ]

    모병한 사실 자체에 근거해서 사실상의 모병제 실시라면 고구려 원정 때도 영남도인가 모병한 사실이 있는데 그것만 가지고 모병제 시초라 하긴 어려울 테고 이 당시 제도로서 모병제를 일부 정착시킨 예가 이 당시의 일인가요?
  • 첫걸음 2011/02/23 20:10 #

    한단인 님의 좋은 지적 감사합니다. 아, 제가 사료 독해를 좀더 꼼꼼하게 했어야 했는데 실수 정정해야 하겠습니다.

    아, 제가 <토번열전> 사료만 파고 들다보니 그만 다른 부분을 놓쳤군요. 제가 알기로는 태종 이후부터 토번의 세력 확장이 이루어지면서 장안 근처에서도 점차 모병이 빈번히 실시되었고 안록산의 난 이후에는 부병을 대체하여 모병제가 완벽히 정착되었다고 들었거든요. 관내도의 모병에만 주목하다 보니 큰 실수를 저질렀군요.

    절대 사소한 실수가 아니고 뼈있는 지적 감사합니다.
  • 한단인 2011/02/23 20:14 #

    아.. 그렇군요.

    사실 저도 고구려 원정 때의 모병 사실은 부병제와 관련해서 이 시기의 아주 예외적인 것인 줄만 알고 있었고 토번 때의 모병 사실에 대해서는 무지했습니다. 그러면 태종 때의 잦은 대외 원정으로 병력 자원이 부족해지면서 벌어진 연속적인 일이 된다는 거로군요. 잘 알겠습니다.
  • 들꽃향기 2011/02/24 12:35 # 답글

    잘 보았습니다. ^^ 두송 망포체의 작업은 나라의 중앙집권화를 위해서는 필요한 일이었겠지만, 결국 구외원정에서의 성공적인 전과를 얻지 못한 것이 본인의 위상강화를 약화시킨 것 같아 안습입니다. ㄷㄷ

    근데 한단인님과의 덧글에서 다루신대로, 당 역시 부병제가 와해되어가고 모병을 실시해야할 정도로 국방 펀더멘탈이 좋은 것만은 아니었던 것을 생각하면, 두송 망포체는 단순히 운이 나뻤던 것...즉 자신이 가르 가문등의 종래 군사 엘리트들을 제거한 것에 비해서, 왕효걸, 당휴경 등의 당의 네임드들을 상대하게 된 것뿐이라는 망상도 드는군요. -_-;;
  • 첫걸음 2011/02/24 21:23 #

    좋은 지적 감사합니다. ^^

    좀 무리있는 비유라고도 할 수 있지만 가르 가문과 두송 망포체의 관계는 마치 도르곤과 순치제의 관계와 다소 비슷하다고 생각됩니다. 도르곤이 청의 성장에는 막대한 역할을 했지만 순치제의 중앙집권화에는 걸림돌이 되었던 것처럼 가르 가문도 대당전쟁에서는 반드시 필요한 사람들이었지만 두송망포체의 중앙 집권화에는 걸림돌이었죠.

    두송 망포체의 경우에는 들꽃향기 님의 말씀처럼 운도 나빠서 수명도 짧았지만, 가르가문을 제거하였기 때문에 오는 전력공백이 심했죠. 어떻게 보면 토번의 위기라고도 하겠습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크리 마 로드의 역할이 상당히 중요했고 그녀는 그 역할을 너무나도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효장황태후의 경우처럼요
  • 첫걸음 2011/02/24 21:25 #

    아. 제가 방학동안 <대청풍운>을 너무 인상적으로 봐서 효장황태후에 비유를 했네요 ㅋㅋㅋㅋㅋㅋ
  • 여소제 2011/03/05 23:43 # 답글

    잘 보았습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납득이 잘 안되는 군요.

    "이에 토번은 중국에 빼앗긴 타림분지를 되찾기 위하여 돌궐과 연합하여 남과 북에서 양동공격하기도 하였고, 가르첸링 형제가 소라한산(素羅汗山)에서 왕효걸과 교전하고, 양주를 침입하는 등 다양한 시도를 했으나, 왕효걸 등의 활약으로 결국 실패하고 가르첸링은 무후 측의 곽원진과 화약을 맺었다." -본 글 내용중-

    개인적으로 토번이 타림분지를 재탈환 하는 것에는 실패했을지 몰라도 소라한산을 실패로 보기에는 힘들다고 보여집니다.

    소라한산 전투는 694년에 타림분지 탈환을 목적으로 두고 벌어진 냉천, 대령 전투와 달리 다른 목적을 가지고 싸운 전투라고 보여지는데 냉천과 대령에서 벌어진 전투는 서돌궐과 연계하여 당을 침공해 사진을 재탈환할 목적이었다면 소라한산 전투는 사진을 목적으로 침공한 전투가 아닌것으로 보여집니다.

    소라한산 전투 발발을 보면 695년 가을에 토번이 임도(臨逃, 逃州)를 치자 이에 무주는 삭방도행군총관으로 돌궐을 공격중이던 왕효걸을 숙변도행군총관으로 삼아 이를 토벌하게 한것에서 시작됩니다. 전쟁이 계속되자 무주는 696년 봄 1월에 누사덕을 숙변도행군부총관으로 삼아 왕효걸을 돕게 하였고 결국 695년 임도 침공에서 시작된 전투는 3월 소라한산에서 결전을 치루게 되는데 가르친링, 가르찬파가 이끄는 토번군에게 왕효걸과 루사덕이 이끄는 무주군이 소라한산에서 대패함으로서 막을 내리지요.

    즉 소라한산 전투의 출발점은 토번의 임도 침공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굳이 타림분지를 회복하기 위해 전투를 벌였다면 임도를 굳이 침공할 필요가 없겠지요. 토번이 임도를 침공한 이유는 강족과 토욕혼이 당에 귀부한 것과 군사적 열세 상황 타파를 위해 벌어졌다고 보여집니다.

    본 글에서 적어두셨듯이 692년에 토번 추장인 갈소와 별부의 추장인 잠추가 강만(姜蠻) 8천명을 이끌고 무주에 내부했던 바이며(갈소는 도중 발각되어 토번에 붙잡힘) 692년 2월 토번 당항부의 1만명이 5월에는 토번인 800명이 귀순했던 바입니다. 상당수의 강족들이 당에 내부, 귀순했다는 것인데 635년 봄 정월의 기록을 보면 강족들이 일으킨 난에서 도주(逃州)의 강족들이 난을 일으켰다고 나옵니다. 도주(逃州)가 바로 임도(臨逃)인데 이를 통해 임도라는 곳이 강족들이 거주하는 땅임을 알 수 있지요. 즉 이 공격은 타림분지를 되찾기 위한 공격이라기 보다는 강족과 토욕혼 지배를 두고 당과 전투를 벌였다고 볼 수 있겠지요.

    또 군사적 열세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벌어졌다고도 볼 수 있는데 소라한산 전투 당시 당이 토번에 비해 군사적인 우위를 차지했음은 『당장 논전기(唐將 論戰記)』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왕효걸이 안서사진에서 토번을 크게 무찌르고 이를 탈환함으로서 당은 토번에게서 군사적 우위를 차지하게 됩니다. 또한 서돌궐과의 연계를 통한 공격이 실패하면서 당에 대한 토번의 군사적 위협은 점점 낮아졌지요.)

    『당장 논전기(唐將 論戰記)』
    왕효걸이 말하기를 "큰 산의 무게로 약한 새알을 누르면 당연히 부서질 터이고, 큰 바다의 파도로 불을 끄면 당연히 불이 꺼질것이네" 이에 친링(가르친링)이 답을 하여 말하기를 "큰 산에는 바위가 있고, 바위 위에는 나무가 있고, 나무 위에 새집이 있고 새집 속에 알이 있으니 ,만약 산이 무너지지 않으면 바위가 ,바위가 부서지지 않으면 나무가, 나무가 쓰러지지 않으면 새집이, 새집이 부서지지 않으면 새알이 어찌 부서지겠는가?"

    당시 무주의 군사 상황을 보면 최융의 견해를 받아들여 3만의 병사를 안서사진에 두고 사진을 탈환했던 왕효걸은 돌궐을 치게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토번은 견고해진 안서사진을 치기보다는 감숙성 남단부들을 침공했다고 볼 수 있지요. 실제 소라한산 전투에서 토번이 승리함으로서 군사적 열세에서 벗어나게 되는데 이는 이후 당에게 안서사진에서의 군대 철수, 십성땅 요구를 한 것에서 확인 할 수 있습니다.(군사적인 우위-혹은 대등-가 없었더라면 이러한 요구는 불가능 했겠지요.)

    또한 "효걸 등의 활약으로 결국 실패하고 가르첸링은 무후 측의 곽원진과 화약을 맺었다."라는 부분 역시 납득이 어려운데 이 말은 실패로 인해 화약을 맺었다는 말이 되는데 오히려 기록을 보면 이 화약의 중점에는 사진에서의 무주 군대 철군과 십성 땅을 토번에게 준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러한 요구는 소라한산에서의 승리로 인한 군사적 우위-혹은 대등-로 할 수 있던 것이었고 화약에 대해서 무주는 요구를 무마시키기 위해 서돌궐을 주는 조건으로 청해의 옛 땅을 토욕혼에게 돌려줄 것을 요청하지요. 즉 이는 군사행동의 실패 결과물이 아닌 군사행동의 성공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 여소제 2011/03/06 00:13 # 답글

    두송망포체의 첸포 즉위는 오히려 가르가문의 권력 쇠퇴를 가져왔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하는데 비록 두송망포체(器弩悉弄)가 어리다고는 하나 가르가문은 당시 두송망포체(器弩悉弄)가 아닌 6살된 두송망포체의 동생을 지지하였습니다. 두송망포체(器弩悉弄)를 지지해준것은 대신 국살고(麴薩苦)와 두송망포체의 어머니 크리마 로드(沒祿氏)였습니다. 『책부원귀(冊府元龜)』는 이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지요.

    『책부원귀(冊府元龜)』
    의봉 4년 찬포가 죽었다. 적자 기노실농(器弩悉弄)은 대신 국살고(麴薩苦)와 함께 왕년에 병마를 징발했다. 찬포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귀국하여 첸포가 되었다. 그때의 나이가 8살이었다. 그의 동생은 여섯살로서 논흠릉의 부대에 있었다. 흠릉이 강성하여 기노실농의 동생을 받들어 주로 삼으려 했지만 마침내 흠릉이 대의에 따라 살고와 협심함으로서 기노실농의 왕위가 비로서 정해졌다.

    『자치통감(資治通鑑)』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자치통감(資治通鑑)』
    2월 임순일에 토번의 찬보가 죽고 아들인 기농실농이 섰는데 낳은지 8년이 되었다. 이때에 기노실농은 그의 외삼촌인 국살약과 함께 양동에게 가서 군사를 발동하였는데, 동생이 여섯살이었고 논흠릉의 군대 안에 있었다. 그 나라 사람들은 논흠릉이 강한 것을 두려워하여 그를 세우려고 하였으나 논흠릉이 안 된다고 하고 국살약과 공동으로 기노실농을 세운것이다. 황상(고종)은 찬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배행검에게 명령하여 틈을 타고 이를 도모하라고 하니 배행검이 말하였다. "논흠릉이 정치를 하고 대신들이 모여 화목하니 아직은 도모할 수 없습니다." 마침내 중지하였다.

    가르가문이 지지하던 두송망포체의 동생이 아닌 두송망포체가 이렇게 첸포에 즉위 한 것은 외삼촌인 국살약 덕분이었고 여기에는 어머니인 크리마로드 역시 개입되 있었습니다. 이렇듯 가르가문이 지지하는 왕자가 아닌 왕실 외척이 지지하는 왕자가 토번에 오른 사태는 사실상 당시 가르가문 권력 쇠퇴를 야기시키는 일이었지요. 그래서 개인적으로 이 일을 시작으로 가르가문의 권력 독점은 쇠퇴를 시작했다고 봅니다.
  • 첫걸음 2011/03/09 09:12 #

    여소제 님의 정성어린 댓글에 대하여
    지금에서야 답글을 한 것에 대해 진심으로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여소제 님의 댓글을 보고 제가 사료 접근과 이해에 있어서 매우 소홀했던 것 같아서 사학도인 제 자신이 부끄러워집니다. 무릇 당대 역사를 알기 위해서 <구, 신당서> 이외에도 자치통감과 책부원구를 읽어야 하는데 제가 글쓰는 데에만 급급하고 아직 실력이 부족하여 접근하지 못한점 진심으로 송구스럽습니다.

    제가 구당서 신당서에만 의존하고 사건을 축약해서 적다보니 소라한산 전투와 무주 시기 화약에 대한 상황 이해, 설명이 부족했던 점 인정합니다. 여소제 님의 지적을 반영하고 좀더 공부하여 글을 수정하겠습니다. 부끄럽기 그지 없습니다.

    그리고 두송 망포체의 집권 후 가르 가문의 세력 쇠퇴에 대해서는 일부는 동의하지만 일부는 다소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물론 책부원귀의 기록대로 두송 망포체의 즉위에서 크리마도르 집안의 세력이 상당한 역할을 하고 친링이 이를 받아들이기는 했으나 이것을 두고 몰락의 시작이라고 하기에는 다소 무리가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여전히 가르 가문은 변경 요충의 병력을 소유하고 있었고 제시해주신 자치통감에서도 두송 망포체가 즉위하는데에는 국살약의 힘도 컸지만 친링이 두송 망포체를 지지하지 않았다면 사태는 어떻게 될 지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만약 국살약과 크리마로드가 가르친링에 필적할 힘이 있었다면 두송 망포체가 즉위하면서 친링 형제를 제거할 수 있었을 것인데 그러지 못했다는 것은 가르 가문이 여전히 토번 정계에서 막강한 권력을 지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현문우답이 아닐런지 모르겠습니다. 여소제 님께 감사드립니다.
  • 여소제 2011/03/09 19:04 #

    확실히 말씀하신 대로 이 이후로 699년까지 가르가문은 여전히 강력한 권력을 보유한 점을 볼때 '쇠퇴'라고 이것을 표기 하기에는 무리가 있군요. 오히려 이 사태는 왕가의 권력 기반을 이전보다 강화시킨 일이라고는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시기 토번 행정제도를 볼 때 6루첸이 구별되어 있고 이것은 다시 변방과 중심부의 대비에 기초한 2개의 하위그룹으로 나누어지는데 3명의 대신이 중심부를 맡고 있습니다. 이중 티벳땅은 가르가문이 관장했고 있고 샹슝과 슘파는 다른 2대신이 관장했지요.(이후 토욕혼을 몰아내고 청해일대를 차지하면서 가르가문은 청해일대까지 지배하게 됩니다.)

    군사제도를 보자면 1천호로 이루어진 왕의 친위대와 각기 4천호로 이루어진 6개의 루첸, 각 1천명으로 이루어진 61개 단위로 조직된 '군역에 종사하는 최고의 국민 집단'이 있지요.(그 외에 법에 따라 징발된 노역자 집단이 있는데-유목민들 역시 노역자 집단에 해당- 이 집단의 경우 정확한 수치 기록이 없습니다.) 루첸은 6개로 나누어지고 있고 이 중 '샹 루첸'은 샹슝국을 점령한 다음 만들어졌는데 다른 말로 말하면 샹 루첸의 경우에는 샹슝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군사들을 의미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이런 상황에서 샹슝이 왕가를 지지해준 것은 지지기반이 없던 왕가(사실상 가르친링 집권 기에 토번 왕가는 1천호로 이루어진 친위대 외에는 직접적으로 관할할 수 있는 집단이 없다고 봐도 무방합니다.)에게 있어 샹슝의 왕가 지지는 왕가의 지지기반을 만들어주었다고 볼 수 있지요.
  • 2011/03/08 11:09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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