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吐蕃, 티베트 최초의 제국(6)-8세기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정착과 고선지의 원정 동아시아사

6. 8세기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정착과 고선지의 원정


△ 드라마 <대당부용원> 중 현종

(1) 당 현종의 치세와 8세기 동아시아 국제 질서의 정착

  치데축첸이 찬보에 오르고 금성공주와 혼인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당에서는 예종이 승하하고 태자 이융기가 황제에 오른다. 바로 당 현종이다. 현종의 치세는 당의 황제 치세들 중에서 가장 오랜 기간 지속되었고, 당의 중간을 나누는 기준이기도 하다. 무측천이나 중종의 부인 위후 등 여인들의 정치를 청산한 현종은 당의 국력을 신장시키고 당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고자 하였다. 현종의 치세는 크게 개원 연간과 천보 연간으로 나누는데 개원 연간은 성당시대(盛唐時代), 혹은 개원의 치(開元之治)라 불리면서 당 태종의 치세 이후로 당이 가장 번창한 시기라고 평가된다.

△ 742년 경 동아시아

  현종 시대가 의미가 있는 것은 당 중심의 동아시아 세계가 이 시기에 확립되었다는 것이다. 요동 지역에서는 발해가 국가체제의 틀을 확립하였고 한반도 일대에서는 신라 왕조가 유지되었다. 티베트에서는 토번제국이 그 지배를 확립하였고 운남지역에서는 남조라는 통일 왕조가 성립되었다. 또한 초원지대에서는 투르크 계 유목제국이 자리잡았다. 이러한 현종시대 확립된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큰 틀은 9세기 말까지 변동없이 지속되었다. 또한 이러한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큰 틀 속에서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동아시아 문화권이 자리잡았다.
   

 (2) 연장되는 토번-당의 힐항 관계

 
치데축첸과 금성공주의 혼인으로 완화된 토번과 당의 관계는 다시금 악화되기 시작한다. 그것은 이미 현종 즉위 이전인 710년 경 토번이 금성공주의 목욕처를 명목으로 하서구곡의 전략적 요충지를 얻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구당서>는 "이로부터 (토번은) 다시 배반하고 병사를 이끌고 (당의 경계를) 약탈하기 시작하였다.(自是復叛, 始率兵入寇.)"고 기록되어 있다.

  714년(개원 2년) 가을, 토번의 대장 분달언(盆達焉)과 걸력(乞力)이 10여 만 대군을 이끌고 임조군을 침공하고 난주와 위주를 휩쓸었다. 금성공주와 혼인을 주도하던 신료 양거는 두려운 나머지 약을 먹고 죽었다. 임조군은 장안의 턱 밑이라고 할 수 있었고 위주와 난주는 당시 당나라의 군마를 기르던 곳이었기 때문에 당으로써는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비록 현종이 설눌과 왕준을 파견하여 토번 군을 겨우 격퇴했지만 당으로는 상당한 충격이었다. 그러한 충격은 현종이 직접 친정을 선포하고 장사들을 모병한 데서 엿볼 수 있다. 이러한 토번의 위협은 하서구곡을 얻음으로써 장안으로 들어가는 길목을 얻어서 가능했을 것이다. 또한 당과 토번의
충돌지대도 청해호 일대에서 농우, 하서 일대까지 확장되었는데, 이는 당의 세력이 토번에 의해 위축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토번은 외교적으로 상당한 유리한 위치에서 당을 압박하였다. 임조에 대한 습격 이후, 사자를 보내어 현종에게 화의를 요청했고 현종이 화의를 거부하자 다시금 당의 변경을 약탈하였다. <구당서>의 "토번이 스스로 강성해졌음을 의지하면서, 매일 상소와 표문을 올렸는데, 서로 대등한 국가의 예를 요구했으며, 그 언사가 오만하여 황제가 심히 노하였다."는 기록은 토번과 당의 관계를 잘 보여주는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당 역시 손을 놓은 것만은 아니다. 727년 당은 청해호 서쪽 일대에서 토번군을 격파하였고 돈황 일대를 공격한 토번군을 격퇴시키도 하였다. 이러한 당과 토번의 일진일퇴의 공방전은 사실 당과 토번의 역사 내내 끊임없이 이어져 온 것이었다.

  이 시기 토번의 군대를 이끈 것은 시노라궁가르(悉諾邏恭祿)라는 장수였다. 시노라궁가르는 727년 대비천에서 당군과 전투를 했고, 돈황일대를 습격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전과로 인해 당시 그의 위명이 심히 진동하였다고 구당서는 전한다. 그러나 시노라궁가르를 탐탁치 않게 여긴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찬보 치데축첸이었다. 토번 찬보로서는, 시노라궁가르의 성장은 또 하나의 가르 가문을 키우는 격이었기 때문에 치데축첸은 시노라궁가르를 주살하였다. 하지만 토번의 공세는 지속되었다.

  714년부터 730년까지 약 15년 동안 토번과 당은 청해와 하서 일대에서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인다. 그러던 상황은 729년 말 당이 토번의 청해 일대 요충지였던 석보성을 함락시키면서 화의의 분위기로 바뀌었고, 금성공주의 노력으로 토번과 당의 관계는 개선되었다. 아마 당과 토번과의 살얼음판 관계에서 누구보다 가슴 졸였을 것은 금성공주였을 것이고 금성공주는 사신단과는 별도로 황금을 바치며 현종에게 간곡히 화의를 청했다. 비록 <시>, <서> 등의 중국고전 등을 달라는 토번의 요구가 무시되는 등 다소 냉랭했지만 당과 토번은 734년 청해 하서 일대의 경계를 확실히 나누는 분계비를 세우면서 양국 간의 관계는 표면적으로 호전되었다.



  덧붙여 말하면 금성공주는 740년에 티베트에서 사망한다. 화번공주의 삶들이 그렇듯이 금성공주의 삶도 순탄치 많은 않았다. 금성공주가 티베트에서 보낸 시대는 토번과 당이 외교적으로 공방전을 치열하게 벌인 시기였기 때문에 공주는 늘 불안한 삶을 살아야 했고, 토번이 하서구곡을 얻었을 때처럼 토번의 정치적 이해 관계에 따라 이용되기도 하였다. 티베트 설화에서도 금성공주의 불운한 삶을 엿볼 수 있다. 금성공주는 치데축첸과의 사이에서 아들 1명을 낳았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치데축첸에게는 티베트 인 왕비 1명이 있었다고 하는데, 오랫동안 자식이 없자 금성공주의 자식을 몰래 빼돌려 자신의 아들로 삼았다고 한다. 이러한 일화는 화번공주로의 금성공주의 불안정했던 지위를 잘 보여준다. 

  금성공주의 노력으로 호전되었던 토번과 당의 외교적 갈등은 얼마 되지 않아서 다시 터지게 된다. 그것은 기존의 것과는 달리 당과 토번 사이에서 벌어진 직접적 충돌은 아니었다. 당과 토번의 충돌은 운남 지역의 남조(南詔)라는 국가와 파미르 일대의 소발률(小勃律)이라는 국가를 두고 벌어졌다. 이 두 국가는 영토는 작은 국가였지만 그 지정학적 중요성 때문에 토번과 당 간의 패권 다툼의 장이 되었다.


  (3) 남조(南詔) 문제


△ 남조의 중심지 대리

  대략 이무렵 운남 지역에서는 남조(南詔)라는 국가가 성립된다. 운남은 전한대로부터 서남이라고 불리웠고 삼국시대에는 제갈량이 경략한 지역이었다. <구당서>에 의하면 본래 당 초에 이 지역은 6개의 큰 국가로 통합되었는데 부락의 군장을 '조(詔)'라고 하였기 때문에 흔히 6조라고 불렀다. 이러한 6조 중에서 가장 강성한 조(詔)는 몽사조(夢舍詔)가 강성하였다. 몽사조는 가장 남쪽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남조(南詔)라고도 하였다. 

  운남 지역은 지정학적 위치 상 서쪽으로부터 동진해오는 토번 세력과 사천 지역에서부터 서남쪽으로 세력을 확장하는 당과의 접점이었다. 따라서 당과 토번은 이 지역을 두고도 지속적으로 충돌하였다. 송첸캄포 이래로 토번은 운남 일대를 자국의 영향력 하에 두고자 했다. 당은 그러한 토번의 운남진출을 견제하기 위해 운남의 여러 세력들과 조공책봉 관계를 맺었다.
 
  그런 상황에서 약 8세기 초반 남조의 군장 피라각(皮邏閣)이 운남 지역의 여러 세력들을 통합하기 시작하였고 곧 운남의 6조를 통합하고 통일정권을 세우기 이른다. 당은 피라각의 남조 정권을 인정하여 피라각을 운남왕으로 책봉하고 피라각에게 "귀의(歸義)"라는 이름을 내렸다. 당이 남조 정권에 대해서 호의적이었던 것은 남조를 통해 토번의 세력 확장을 막고자함이었다. 남조는 이러한 방파제 역할을 잘해 주었다. 토번이 운남지역을 장악하기 위하여 남조정권을 공격했지만 남조 군대에 의해 격파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당-토번-남조 간의 국제관계는 곧 급변하였다. 그 계기는 아주 사소한 문제에서 발생하였다. 귀의의 뒤를 이어 남조의 왕이 된 각라봉(閣邏鳳)이 검남절도사 선우중통과 외교관계를 맺기 위해 처자와 함께 그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운남 태수가 각라봉의 처와 사통을 하고 각라봉에게 모욕을 주었다. 이에 격노한 각라봉은 당과의 우호관계를 접고 당과 전쟁에 돌입하게 된다. 각라봉은 운남태수를 죽인 후 운남 일대의 당의 기미주에 속했던 32개의 부락들을 병합하였다. 이에 당은 검남절도사 선우중통에게 대군을 주어서 남조를 공격하게 했지만 결과는 실패로 돌아갔다.

  당과의 관계를 단절한 각라봉은 토번에로의 "귀명(歸命)"을 선언하였다. 즉 토번과의 연합을 선택한 것이다. 이에 토번은 남조의 왕을 "찬보종(贊普鍾)"이라는 호칭과 금인(金印)을 하사하였고 아울러 동제(東帝)라는 칭호도 붙여주었다. "종(鍾)"이란 단어는 토번의 언어로 아우라는 뜻이기 때문에 "찬보종"은 "찬보의 아우" 라는 뜻이고 동제라는 칭호는 토번 동쪽의 동반자라는 의미일 것이다. 이를 계기로 남조는 토번과 연대를 맺고 당의 검남(사천) 일대를 위협하였다. 결과적으로 토번은 남조와 연대하면서 운남 지역에 자국 중심의 독자적인 국제질서를 수립할 수 있어고 아울러 당과의 운남지역에 대한 외교전에서도 승리를 거두었다.


  (4) 소발률(小勃律) 문제와 고선지의 소발률 원정

  
△ 소발률이 위치했던 지금의 길기트 지역


  남조와 함께 토번-당 간의 분쟁지역이 된 곳은 힌두쿠시 산맥 남쪽의 길기트 지역 위치한 소발률이었다. 본래 발률이라는 하나의 세력이 존재하던 것이 현종 즉위 초에 대발률, 소발률로 분열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소발률은 당과 토번 사이의 완충지대로 위태로운 독립을 유지하고 있었다. 소발률이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원인은 아프가니스탄을 비롯한 중앙아시아 일대와 티베트 고원을 연결하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토번으로서도 당으로서도 자국이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진출하고 더불어 타림분지의 영향력을 확고히 하기 위해서는 이 지역을 확보해야만 하였다.

  소발률 문제는 이미 722년 노출되었다. 소발률 왕 몰근망(沒謹忙)은 현종 개원 초기에 입조하였고 당은 소발률에 완원군(緩遠軍)을 두었다. 당이 이 곳에 군대를 둔 것은 토번의 서역 진출을 차단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토번은 722년 "우리는 너희 왕국을 공격하려는 것이 아니라, 안서사진을 공격하려는 길을 빌리려고 하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소발률국을 압박하였다. 몰근망의 원조 요청을 받은 당의 북정도호 장효숭은 소륵부사 장사례를 파견하여 토번을 격퇴하였다. 

 하지만 점차 당은 소발률국에 대한 주도권을 토번에 빼앗겼다. 몰근망의 사후 이런 경향은 심화되었고 736년 대발률을 복속시킨 토번의 공격을 받게 된 몰근망의 손자 소실리(蘇失利)는 토번의 공주 크리 마 로드(치데축첸의 할머니와는 다른 인물)와 결혼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소발률국과 토번제국 간의 결혼으로 인해 소발률 국을 비롯한 중앙아시아 일대가 토번의 영향력 하에 들게 되었고 당의 타림분지 경영도 위태하게 되었다. 당은 소발률국에서의 토번의 영향력을 제거하기 위해 개가운, 부몽영찰 등을 파견하여 소발률 국에 대해 원정을 시도하지만 번번이 실패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현종은 747년 고구려 유민 출신의 장수 고선지를 행영절도사로 파견하여 소발률국을 공격하도록 명한다.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고선지의 소발률국 원정의 시작이었다.

△ 중국드라마 <양귀비비사>에 등장하는 고선지

  현종이 소발률국을 공격하는데 고선지를 발탁한 이유는 그가 타림분지에서 뛰어난 두각을 나타내었고 당시 서역에 대한 정보에 정통하다는 판단에서였을 것이다. 고선지는 1만의 군대를 거느리고 안서도호부의 치소인 쿠차를 출발하여 약 100일 만에 파미르 고원에 이르렀다. 고선지의 군대의 주요 전력은 빠른 기동력을 가진 기병이었을 것이다. 당시 토번은 소발률국을 장악하고 소발률국으로 가는 길목을 방어하기 위하여 지금의 아프가니스탄과 타지키스탄의 접경 지대인 와칸계곡의 연운보(連雲堡)에 1만 명의 부대를 주둔시키는 한편 호밀국의 사륵성에도 대군을 주둔시키고 있었다. 특히 와칸협곡에 둘러쌓인 연운보는 인도와 중앙아시아 티베트를 잇는 요충지이자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 와칸 계곡 

△ 연운보 유지

△ 고선지의 연운보 진격로

  고선지는 보급을 유리하게 하기 위해서 타지키스탄 일대에 자리잡고 있던 오식닉국을 장악하였다. 그 후 부대를 3군으로 나누어 소륵수착사 조숭빈이 이끄는 1대는 북곡로, 발환수착사 가숭빈이 이끄는 2대는 적불당로를 통하여 연운보로 진격하게 하는 한편 자신은 나머지 1대를 이끌고 호밀국을 거쳐 연운보로 진격했는데 도중에 사륵성에 진을 친 토번의 대군을 기습하여 궤멸시켰다. 7월 13일 고선지의 3군은 연운보에 집결하였다. 토번군 8, 9000이 연운보 남쪽에 성책을 두르고 진을 치고 있었고 연운보의 앞을 가로지르는 파륵천 역시 물이 불어 공격하기 어려웠다. 고선지는 새벽에 파륵천의 물이 줄어든 틈을 타서 파륵천을 건너 연운보의 후면을 기습공격했다. 고선지의 기습공격에 의하여 토번군의 약 절반이 전사하였다. 연운보에서 퇴각한 군대는 토번 본국으로 가서 원군을 요청하였다.
 
△ 탄구령으로 기록된 다르호트 고개



  연운보를 공략한 고선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자연의 장벽인 바로길 고개와 중국사서에 탄구령으로 기록된 다르호트 고개였다. 특히 다르호트 고개는 해발 4694m의 눈으로 뒤덮인 험준한 고개였다. 하지만 고선지로는 이 고개를 최대한 빠르게 넘어 소발률국으로 진격해야만 했다. 소발률국의 사이하에는 토번을 잇는 등교가 있었는데 자신이 도착하기 전에 토번 본국의 원군이 소발률국에 도착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이 등교를 절단해야만 하였다. 고선지는 부장 서원경에게 별동대를 주어 미리 사이하의 다리를 끊게 하고 자신 역시 다르호트 고개를 넘어 소발률국을 공략하였다. 고선지의 전략은 성공적이어서 사이하의 다리를 끊어서 토번의 원군이 소발률국으로 진격하는 것을 막고 소발률국의 국왕 소실리와 그의 부인을 장안으로 압송할 수 있었다. 

  오렐스타인이나 폴 펠리오 등의 서양 학자들의 찬사를 떠나서 고선지의 소발률국 원정은 상당한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신당서> 221.<서역열전>에 의하면 "선지가 왕의 항복을 약속받고 그 나라를 평정하였다. 이에 불림, 대식 등 여러 호인들의 72개국이 모두 두려워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당이 일시적으로나마 토번의 서역진출을 제어할 수 있었고 자국의 중앙아시아와 자국에 대한 영향력을 확장시킬 수 있었다. 이러한 상승세를 계기로 고선지가 이끄는 당군은 당시 압바스 왕조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던 타슈켄트의 석국을 원정하고 석국의 왕을 죽였다. 하지만 당의 상승세도 751년 탈라스에서 고선지가 이끄는 당군이 압바스 왕조의 군대에서 대패하면서 꺾이게 되었다. 탈라스 전투의 여파는 당의 서역경영에 상당한 타격을 주었다. 중앙아시아 일대는 압바스 왕조의 이슬람 세력이 장악하게 되었고 당의 타림분지 경영도 후퇴하여 토번이 다시금 타림 분지로 진출하였다.

  하지만 755년 당은 탈라스 전투보다도 더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된다. 바로 범양평로절도사 안록산의 난이었다. 안록산의 난은 당 뿐만이 아니라 그동안 유지되었던 동아시아의 국제질서에도 거대한 영향을 주었다. 토번의 역사에도 안록산의 난은 매우 큰 역향을 끼치게 된다.

<계속>

 
포스팅 후기
 
2월 초에 시작되었던 <吐蕃, 티베트 최초의 제국>의 연재도 어느덧 절반 이상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부족한 글에 끊임 없이 관심을 가져주시고 지적을 해주신 독자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사실 처음에 토번제국의 역사로 연재글을 쓰겠다고 큰소리를 쳤을 때에는 자신감이 넘쳤는데, 가면 갈수록 여러분께 토번 역사를 소개해 드리기가 힘들고 제 자신이 부족하다는 것을 많이 느낍니다.
 
  토번 역사에 관한 난잡한 사료들을 제 머리로 정리를 하고 글을 풀어쓰는데 참으로 애를 많이 먹었습니다. 변명일 수도 있겠지만 그러한 작업들이 오래 걸리다보니 원래 개강하기 전까지 끝내고자 했던 연재 계획이 지금까지 지연되었습니다. 어쩌면 제 게으름도 주요한 원인이겠죠. 비록 결말이 늦어질 수도 있겠지만 최대한으로 노력하여 대단원의 막을 내리도록 하겠습니다.

*정정합니다!: 제가 이전에 치데축첸(赤德祖贊)과 치죽데첸(赤祖德贊)을 착각하여 오류를 범했습니다. 두송 망포체의 뒤를 이은 찬보는 치데축첸입니다.



덧글

  • 고리아이 2011/02/27 16:07 # 답글

    금성공주가 넘 귀엽고 이쁘네영^___^))
  • 첫걸음 2011/02/27 16:20 #

    약간 아이유 닮았다는 (쿨럭!)
  • 고리아이 2011/02/27 16:22 #

    한어에서도 可愛(커아이)가 귀엽다는 뜻인데
    이거 넘 많이 썼더니 오해받더군영 ㄷㄷㄷ
  • Mr 스노우 2011/02/27 19:53 # 답글

    탈라스 전투가 벌어졌던 곳은 현재의 키르기스스탄이지요. 예전에 한번 방문했던 적이 있었는데 당의 강역이 그런곳까지 미쳤다는 사실이 제일 놀라웠습니다.
  • 첫걸음 2011/02/27 20:01 #

    네 맞습니다. 저는 사진으로 밖에 보지 못했는데 직접 방문하셨다니 부럽습니다. 사실 당의 영향력이 그곳까지는 미쳤을 지는 몰라도 강역이 실질적으로 그곳까지 미치지는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형께서도 잘 아시는 것처럼 고대 영토는 워낙 유동성이 심했지요. 하지만 당의 군대가 그곳까지 진격해서 전투를 벌였다는 것은 놀랍습니다.


  • 슈타인호프 2011/02/27 22:48 # 답글

    흥미진진하게 보고 있습니다. 사실 제가 토번이라는 나라 이름을 처음 접했던 것도 집에 있던 고선지 위인전이 처음이었는데...이번 편에서는 그때 생각이 나는군요^^
  • 첫걸음 2011/02/28 12:09 #

    저도 마찬가지로 고선지라는 인물을 통해서 토번을 접했습니다. ^^

    그리고 부족한 글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실례지만 Mr. 스노우 형과의 댓글을 통해 어렴풋이 짐작한건데 혹시 sg고등학교 사학과 나오셨는지요? 그럼 제게도 직속 선배님이신데, 인사가 늦었습니다. 앞으로 조언부탁드립니다.
  • 슈타인호프 2011/02/28 23:43 #

    직속...이라기는 좀 그렇습니다. 전 사학과가 본전공이 아니라 복수전공이었거든요(..)

    아는 분야가 별로 많지 못해서 조언이란 걸 드릴 수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 유유자적 2011/02/28 02:03 # 삭제 답글

    당나라에게는 상당한 충격이라고 적지만 ㅇㅅㅇ 사실상 토번에게는 제일 안습의 시기였던것도 사실. ㅁㄴㅇㄹ 그런데 제가 읽었던 티베트 사료에는 실낙라공록이 단순히 낙향했다고하는데..(아니 그럼 755년에 등장하는 실낙라는 누구지 ㅁㄴㅇㄹ).

    뭐 하여튼 또 다른 티베트 전설에 따르면 금성공주의 빼돌려진 자식이 무려 치송데첸이라는 전설까지..

    문성공주와 가르통첸의 사이에서 가르친링이 태어났다는 설도 있는데 이정도는 보통일까요?

    하여튼 이제 드디어 토번의 전성기시작이니 더욱도 감명깊게 읽어야할듯싶습니다
  • 첫걸음 2011/02/28 12:19 #

    사실 이 시기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일진일퇴, 지지부진의 시기라고 해야할까요? 서로 공격은 많이 하는데 성과는 별로 없는 시기라고 해야하겠죠. 아무래도 두 나라 모두 대국이었으니 아무래도 쉽게 결판이 나지는 못했겠죠. 다만 토번이 남조에 대한 우위를 확보했고 안록산의 난으로 당이 거의 붕괴하였으니 결과적으로는 토번이 압도 했다고 해야 할 듯 합니다.

    사실 제가 몇번을 밝히지만 저는 1차 사료는 중국측 사료 위주에다가 한문 해독도 아직 수준급이 아니라 자료 면에서 애를 먹고 있습니다. 특히 티베트 자신들의 사료는 전설과 역사가 혼재되어 있고 제가 접근할 수 없으니 글을 쓰는데 난감합니다.

    유유자적 님께서 많이 도와주세요. 혹시 티베트 관련 사료 좋은 것 소개시켜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 유유자적 2011/02/28 17:08 # 삭제

    제가 읽은 티베트 관련책들은 '티베트 역사산책' '티벳의 문화' '달라이 라마가 들려주는 티베트 이야기' '티베트와 중국' '티베트와 중국의 역사적 관계' 돈황의 역사와 문화' '동아시아 건국신화와 의의' 자치통감(완역)'정도고 아직 읽지는 못했지만 '티베트,1만년의 이야기'하고 '십팔사략(생각보다 좋다는군요. 전 7권)'정도를 추천해드립니다. 박사학위 논문이라 까다롭지만 '위구르 유목제국사 744~840'도 추천드립니다. 제3자에서 후기 토번,당의 관계를 살피고 무엇보다 전세계에서 거의 유일한 위구르 전문 연구서이거든요...

    아 그리고 기존 게시물은 제 블로그로 옮겼습니다.
    http://blog.naver.com/samka999/memo/100123068129 순서가 조금 뒤죽박죽이지만..
  • 유유자적 2011/02/28 17:09 # 삭제

    뭐 그리고 남조는.. 사실 자구책으로 토번에 일시 연합했지 궁극적으로는 친당이라 나중에는 호되게 역공!
  • 소하 2011/02/28 23:08 # 답글

    드디어 현종과 고선지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는군요. 저는 현종 때문에 토번국이 대단하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 첫걸음 2011/03/02 08:41 #

    현종은 토번을 제압하려 했지만 결과적으로 실패ㅠㅠ
  • 들꽃향기 2011/03/01 18:36 # 답글

    오늘도 쓰신 글 잘 읽었습니다. ^^ 사실 왕준 등이 토번군을 격퇴하고 장성보까지 이를 추격하였다고 하지만, 그런 전과에 비해서 토번의 위세는 전혀 줄어들지가 않았으니 (....) 개원의 치세 동안 당의 전술적 승리가 여러차례 있었더라도 그것은 토번의 국력을 꺾은 것이 아니라 '현상유지'한 정도에 지나지 않은 것 같습니다.

    특히 고선지의 활약이 아니었으면 당이 타림분지의 서역 제국에 대해서 그렇게 위상을 떨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더군요. ㄷㄷ 특히 소발률국을 장악하고 토번과 소발률국의 연결 통로를 태워버림으로서, 토번은 타림분지 서부의 오아시스 국가들을 장악하는 것을 봉쇄당한 샘이니 ㄷㄷ


    다만 남조의 경우는 남조 자체가 이제 당과 토번을 오고가는 것을 선택할 정도로, 나름의 힘을 가진 제3의 세력으로 등장했다는 것이 주요한 포인트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남조는 이후 양국충이 주도하는 당의 원정군을 떡실신시키고 사천 성도를 점령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당의 재상 이필의 제안에 호응하여 토번의 뒷통수를 호되게 후려주는 국가가 된 것도 사실이니 (...)


    아 그리고 연재 절반이 되신 것을 경하드립니다. ^^
  • 첫걸음 2011/03/02 09:25 #

    들꽃향기 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당은 지지부진 하게 토번에 끌려다닌 꼴이 되었죠. 물론 고선지의 활약이 있었지만 고선지의 활약은 극히 제한적이었고 일시적이었다는 것이 문제였다고 볼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안록산이 난을 일으키는 바람에 서역 경영은 더욱 힘들어졌죠.

    남조에 대한 들꽃님의 지적 감사합니다. 제가 현종 시기 토번과 남조의 관계만을 부각시키다 보니 다소 남조의 독자성을 퇴색시킨 꼴이 되었군요. 이필의 계략도 남조와 당의 관계 회복에 큰 영향을 주었지만 토번의 대 남조 정책이 잘못되었다는 게 가장 중요한 원인인거 같습니다.

    성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개강이라서 이번주 내로 연재를 끝내야 할듯 합니다 ㅠㅠ
  • 2011/03/01 18:41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첫걸음 2011/03/02 09:26 #

    날카로운 지적 감사합니다,.^^
  • Rothschild 2011/03/04 11:22 # 삭제 답글

    한-당 태종 대 고작 1만-2만에 지나지않는군사로 사해에 위엄을 떨쳤던거에 비해서 오히려 당자체의 국력으로만 보자면 절정기라할수있는 현종대에 이렇게 위세를떨치지못했던것은 바로 기미주지배로인해서 중국문화와 제도등을 받아들이게되어 이민족들의 어느정도의 국가적인 조직을 갖추기시작하여 그 이민족들의 역량이 달라져서그렇지않나싶습니다. 대륙이 그 이전과 비교할수없을정도로 국력이 급팽창하기시작하던 명-청대 되면 이제 이민족들이 압도당하기시작하지만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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