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로그


吐蕃, 티베트 최초의 제국(7)-치송데첸의 시대 동아시아사

7. 치송데첸의 시대


  (1) 치송데첸의 즉위와 안록산의 난




△ 치송데첸


    755년 치데축첸 찬보가 귀족세력에 의해 암살되어 죽고 그 아들 치송데첸(赤松德贊, Khri-srong iDe-btsan)이 찬보에 오른다. 치송데첸의 시대는 토번 역사 상에서 가장 번성하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토번제국의 강역은 타림분지 전역과 네팔, 운남 일대까지 확장되었고 불교는 흥성하였고 문화사업 역시 활발히 진행되었다. 치송데첸은 송첸캄포와 비슷하게 귀족세력들을 제거하여 중앙집권화를 도모하면서 활발한 대외 원정을 벌이게된다. 이러한 치송데첸의 대외원정은 당시 국제적인 변화와 맞물려서 일어났는데, 특히 치송데첸 즉위 직후 터진 안록산의 반란은 토번과 대립하던 거대한 축인 당을 무너뜨렸다.

 

 △ 안록산 


  755년부터 763년까지 당을 휩쓴 안록산, 사사명의 난, 흔히 우리가 줄여서 안사의 난이라고 부르는 반란 사건은 당 왕조 뿐만이 아니라 중국 역사의 전체적 맥락에서 보았을 때에도 당송변혁기라는 거대한 변화를 이끈 사건이다. 안록산의 난을 통해 그동안 누적되었던 당왕조의 제도적 모순들이 한번에 노출되었고, 안록산의 난 이후 당이란 제국은 실질적으로 병권을 지닌 절도사들의 번진들로 분열되어 당의 황제는 장안과 낙양 일대만을 실질적으로 지배할 수 밖에 없었다. 안사의 난 이후 중국은 송이 재통일할 때까지 분열과 혼란의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 근위병들의 습격을 받고 당황하는 현종과 양귀비(드라마 <대당부용원> 중)


  토번은 안록산 난이라는 혼란기와 화려했던 당 왕조의 몰락을 직접 목도하였다. 안록산의 군대가 장안에 육박할 무렵, 토번은 치송데첸의 즉위를 축하하는 당의 사신단에 대한 답례차로 다시 사신을 파견하였다. 당시 현종은 안록산의 난을 피해 양귀비의 일족과 사천으로 피난을 떠나고 있었다. 토번의 회답 사절이 현종의 피난 행렬을 접한 곳은 바로 마외역이었다. 당시 토번 사신을 맞은 것은 양국충이었는데, 토번 사신을 맞는 도중 폭도로 변한 당의 근위대에게 살해되었다. 양국충을 죽인 당의 근위대들은 양귀비 일족을 모두 살해하고 현종에게 양귀비를 죽이라고 협박하였다. 현종은 근위대에 압박에 못이겨 양귀비를 죽이고 말았다. 토번의 사신단은 이러한 광경을 모두 목도하였을 것이고, 당 왕조의 몰락에 깊은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더불어 토번의 성장에도 좋은 호재가 될 것임도 깨달았을 것이다.

  사실 안록산의 난으로 인해 당의 국제적 위신은 약해졌고 외부세력이 당의 정치에 깊숙이 개입하는 경우도 있었다.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위구르 유목제국이었다. 위구르는 투르크 계 유목 세력으로 돌궐 제 2제국을 대신하여 8세기 중반 이후 몽골초원 일대를 통일하는 유목제국을 건설하였다. 안사의 난이 일어나자 당은 반란군을 토벌하는 데에 위구르 병력을 많이 의존하였는데, 위구르는 중국을 구원한다는 명분으로 중원까지 침투하여 약탈을 자행하고 당 조정을 압박하기도 하였다. 위구르와 함께 토번 역시 안사의 난을 이용, 그 세력을 확장하였다. 이러한 토번의 세력 확장을 당은 막아낼 여력이 없었고 급기야는 당나라 역사에서 충격적인 일이 발생하였다. 763년 토번 군대가 당나라 장안을 일시적으로 점령한 일이었다.


  (2) 토번의 장안 점령과 치송데첸 시대의 대외관계 

 


△ 장안성 복원도

  토번의 장안점령 징조는 이미 안록산의 난 초기부터 포착된다. 당은 안록산의 반군을 막기 위해 가서한에게 장안 주변의 군대를 주어 장안의 길목인 동관(潼關)을 방어하게 하였다. 장안 주변의 군대가 모두 동관 전선에 차출되었기 때문에 장안은 그야말로 무바입 상태였고 토번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장안 주변을 약탈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신당서>에 의하면 "가서한이 하, 농의 군사들을 동쪽으로 모두 데리고 동관으로 갔고 여러 장군들은 각 진의 병사들을 이끌고 반란을 토벌하러 가니, 이 때 처음 행영(行營)으로 불리기 시작했고 변경은 빈 땅이 되어 토번은 심하게 약탈할 수 있었다."라고 하였다.

  토번은 당 숙종 지덕 초반에 사천의 휴주와 위무성 등을 공략하고 현종 시기 당에게 점령당했던 청해 일대의 요충지 석보성을 다시 되찾았다. 당에서는 사신을 파견하여 토번의 공세를 막아보고자 했으나 실패하였다. 토번의 본격적인 공세는 762년에  개시되었다. 당시 당은 안록산, 사사명에 이어 반란군 수장이 된 사조의의 군대와 대립하고 있었는데, 토번은 이러한 대치 상태를 틈타서 장안 일대를 대대적으로 공략한다.

  762년 토번은 장안 서부의 임조, 진주, 성주, 위주를 함락시켰고 당은 토번에 사신을 보내지만 토번은 사신을 억류하기에 이른다. 이어 763년 토번은 하서회랑 일대를 장악하고 농우 일대까지 점령한 후 12만 대군으로 장안을 향해 진격하였다. 당 황제 대종은 장안을 빠져 나와서 섬주로 피난갔고 안사의 난에서 활약을 한 곽자의 역시 토번군의 기세에 압도되어 장안을 포기하고 상주로 퇴각하였다. 토번에 항복한 장수 고휘가 장안으로 토번군을 인도하였고 결국 토번은 장안을 점령하였다. 장안을 점령한 토번은 금성공주의 조카로 알려진 광평왕 이승굉을 황제로 세우고 괴뢰 조정을 세웠다. 이러한 토번의 장안점령은 보름 간 지속되었다. 



△ 곽자의

  수도 장안이 토번에 함락된 위기를 타개한 것은 장안 남쪽 상주로 퇴각한 곽자의와 장안에서 탈출하여 남전에서 흩어진 병사들을 모으고 저항하던 광록경 은중경이었다. 곽자의는 상주에서 군사들의 동요를 막고 전열을 재정비하였고 은중경 역시 남전에서 병사들을 모아서 대담하게 장안으로 진격하면서 성내의 백성들과 호응하였다. 토번 역시 장안을 점령하기는 했지만, 곽자의 군과 은중경의 군대와 맞붙고 장안의 민심을 수습하기도 힘들었고, 게다가 당시 당은 위구르와 연합하고 있었기 때문에 보름 만에 퇴각해야만 했다. 하지만 토번의 장안 점령 사건은 토번과 당의 관계에 있어서 토번이 당을 압도한 대표적인 사건이었고 토번인들도 자랑스럽게 여긴 사건이었다. 토번시대 세워진 <노공기공비>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찬보 치송데첸은 천부적 자질이 침착 의연하고 정령이 현명하여 당토의 성보 여러 곳을 공격하여 이기니 당의 군주 효감황제(숙종) 군신이 매년 채증 5만 단을 보내게 해달라고 빌어 당 왕실의 조공을 받았다.(....) 찬보는 진노하여(.......) 두 장수에게 명하여 경사로 진격하여 당나라 군사와(.......)싸워 당군을 패배시키니 당주 광평왕(대종)은 경사를 버리고 나와 섬주로 도망하여 마침내 경사를 함락시켰다."

  장안에서 비록 물러났지만 토번의 기세는 압도적이었다. 장안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한동안 농우 지방을 장악하고 있었고 사조의의 난이 평정된 이후 투르크 출신의 장군 복고회은이 당에 반란을 일으키자 복고회은을 원조하여 대군을 파견하였다. 치송데첸은 이러한 군사적 우위를 바탕으로 784년까지 빈번하게 당의 변경을 교란시키고 회맹을 청하기를 반복하였다. 그러던 토번과 당의 긴장상황을 완화시킨 사건이 784년 일명 "청수회맹(淸水會盟)"이라고 불리는 사건이다. 당의 장일과 토번 귀족 대신이었던 상게첸이 청수에서 단을 쌓고 양, 소 등의 희생제물을 바치는 회맹의식을 치르고 당과 토번의 경계를 확실히 하였다. 이 청수회맹은 822년의 장경회맹과 함께 잘 알려진 회맹이다.

  여기서 회맹(會盟)관계에 대해서 잠시 알아보자. 회맹이란 것은 모여서 맹세한다는 의미로 중국에서는 춘추시대 제후국들 간의 회맹 전통이 있었고 티베트에서도 여러 부락 간의 회맹 전통이 있었다. 회맹이란 서로 동등한 위치에 있는 세력끼리의 관계이기 떄문에 당과 토번도 서로 동등한 입장에서 회맹관계를 맺은 것이지만 사실상 토번의 군사적 압도 속에서 이루어진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회맹관계는 당과 토번 간의 독특한 국제관계로 볼 수 있는데, 당과 토번은 706년 이후로 822년까지 총 8차례의 회맹을 하였다. 당과 토번이 이렇게 여러 차례 회맹을 가진 까닭은 아무래도 국경의 유동성이 심하고 요충지를 선점하려는 양국 간의 경쟁이 치열했기 때문이다. 특히 토번의 팽창정책이 강력히 추진된 치데축첸 혹은 치송데첸 시기에 회맹이 집중되었다. 822년 장경회맹이 이루어질 때까지 당과 토번은 회맹과 전쟁 속에서 일진일퇴를 거듭하였다.


△ 치송데첸을 묘사한 티베트 탱화

△ 토번제국 최전성기 영토

  치송데첸 시기는 대중국관계에서 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대외관계에 있어서 토번제국의 최전성기였다. 760년 대 감숙과 농우 일대를 장악한 것을 바탕으로 780년 대에는 탈라스 전투 이후 당이 주도권을 잃은 타림분지 전역을 장악하였다. 또한 고선지에게 탈취 당한 소발률을 다시금 회복하여 중앙아시아 일대로의 진출을 도모하는 한편, 히말라야 너머의 동북 인도 일대까지 그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물론 이러한 치송데첸의 영토 확장에도 한계가 있었다. 중국 본토에 대한 침입에서도 위구르의 견제를 받아야 했고 중앙아시아 일대에 대한 확장도 아랍 세력에 의해 저지되었다. 무엇보다도 큰 타격은 치데축첸 시기에 토번과 연합했던 남조가 토번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당과 우호관계를 맺은 사건이었다. 토번은 사천을 치기 위해 남조와 연합하였지만 당에게 패하자 남조왕을 일동왕으로 강등하고 남조에 조세를 요구하는 등 군신관계를 요구하였다. 이에 남조는 당과 다시금 조공책봉관계를 맺었다.

  하지만 이러한 한계점에도 불구하고 치송데첸의 시대 토번의 대외관계는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장안을 일시적으로 장악하는 등 중국을 압박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의 영향력에 있던 타림분지와 하서회랑을 성공적으로 장악하얐고 이를 바탕으로 동아시아에서의 토번의 국제적 위상을 높였다. 치송데첸의 치세가 의미가 있는 것은 비단 화려한 영토확장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안정되고 활발한 대외원정 속에서 토번만의 문화 중흥이 일어났다. 특히 치송데첸 시기 티베트의 불교는 그 독자적인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3) 산타락시타와 파트마삼바바: 티베트 불교의 발전



△ 치송데첸과 파트마삼바바, 산타락시타(왼쪽부터)

  치송데첸은 토번 역사 상 정복 군주로 평가되기도 하지만 후대 티베트 불교에서는 송첸캄포, 치축데첸과 함께 조손 삼대법왕(祖孫三代法王)으로 꼽히는 왕이기도 하다. 원래 송첸캄포 시기 중국과 네팔 일대에서 불교가 전파되고 최초의 사원으로 알려진 죠캉사원과 라모체 사원이 라싸에 건립되기는 하였지만 티베트 사회에서는 불교가 널리 전파되지 못했다. 티베트의 토착 종교인 본교가 워낙 티베트 사회에서 깊이 뿌린데다가 본교 승려들은 귀족들과 밀접하게 결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종교적인 분위기를 쇄신 시킨 것이 바로 치송데첸이었다.

  티베트 전승에 의하면 치송데첸은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불교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귀족들의 반대로 초기에는 불교를 제대로 후원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후 귀족들의 반발을 무마시키면서 불교를 후원하기 시작하였다. 종교적으로 치송데첸 시기의 불교가 본교에 대항하여 점차 세력을 넓혔다는 것은 중앙집권적인 찬보의 권력이 티베트의 지방분권적인 귀족세력을 압도했다는 의미와 같다. 치송데첸으로는 자신의 권력을 뒷받침해주고 티베트를 획일화할 수 있는 사상적 배경을 불교에서 찾았고 사미예 사원 등의 사원을 짓고 경전을 티베트 어로 번역하는 등 불교를 공식적으로 후원하였다. 이러한 치송데첸의 지원을 받으며 티베트 불교의 사상적 초석을 놓은 사람은 네팔 출신의 산타락시타(Santaraksita)와 인도 출신의 파트마삼바바(Padmasambhava)라는 승려들이었다.

 
△ 산타락시타

  산타락시타는 네팔 출신의 고승으로 치송데첸에 의해 토번으로 초빙되어 왔다. 하지만 티베트에서 산타락시타의 불교 전도는 순조롭지 않았다. 토번의 귀족들과 본교의 승려들은 산타락시타의 추방을 위해 그를 음해하였다. 설상가상으로 산타락시타가 건너온 이후로 티베트에서는 자연재해와 전염병이 연달아 일어났고 치송데첸까지 병에 걸렸다. 귀족들과 본교 승려들은 이를 빌미로 산타락시타가 귀신들을 노하게 했다고 강력히 주장하면서 그의 추방을 요구하였다. 사태가 이렇게 번지자 치송데첸 역시 이를 깨물며 산타락시타를 내쫓을 수밖에 없었다.



 
△ 파트마삼바바

  귀족들은 산타락시타를 내쫓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불교를 티베트 사회에 뿌리내리려는 치송데첸의 의지는 꺾지 못했다. 그는 카슈미르 출신의 승려 파트마삼바바를 초청하였다. 파트마삼바바는 치송데첸의 강력한 후원을 통해 사미예 사원을 창건하는 한편, 치송데첸의 주재 하에 본교 승려들과 대대적인 토론을 벌이게 된다. 이 토론에서 파트마삼바바는 이론과 논리에서 본교 승려들을 굴복시켜서 불교의 '우월함'을 증명해낸다. 파트마삼바바의 승리에 힘입어 치송데첸은 네팔로 추방당한 산타락시타를 다시 중용하고 791년 불교를 토번제국의 국교로 공식 승인하였다. 로마사로 비유하자면 치송데첸은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같다고 할 수 있겠다.

  산타락시타와 파트마삼바바는 티베트 불교의 종조(宗祖)로 추앙되고 특히 파트마삼바바는 '구르 린포체'라고 추앙받는다. 산타락시아와 파트마삼바바가 티베트 불교사에서 의미를 지니는 이유는 이들이 밀교, 즉 탄트라 불교의 승려였다는 점이다. 8~9세기 북인도에서는 마하보디 승원과 날란다 승원을 중심으로 탄트라 불교가 성행하고 있었고, 파트마삼바바는 카슈미르 지역의 유명한 탄트라 승려였고 산타락시타는 네팔 지역의 탄트라 승려로 이름이 높았다. 이들에 의해 티베트에 유입된 탄트라 불교는 본교를 융합, 흡수하면서 티베트만의 고유한 불교를 창출하게 된다. 우리가 티베트 불교라고 하면 탄트라를 떠올리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치송데첸 시기 티베트 불교사에서 일어난 중요한 사건은 일명 '돈점 논쟁'이라고 불리는 논쟁이다. 치송데첸 이전까지 티베트에는 다양한 지역의 불교가 들어왔다. 당, 네팔 뿐만 아니라 북인도, 타림분지 일대에서도 불교가 들어왔다. 돈점 논쟁은 이러한 다양한 불교 종단이 정리되는 논쟁이라고 할 수 있고, 인도, 네팔 지역의 불교가 중국 불교의 영향력을 압도한 계기가 되었다. 

  당시 중국에서는 직관을 통한 깨달음(돈오)을 표방하는 선종 불교가 크게 유행했는데, 티베트에도 마하연이라는 승려를 중심으로 중국의 선종이 유입되게 되었고 이는 점진적인 수행을 통한 깨달음(점수)을 표방하는 인도 탄트라 불교와 마찰을 빚게 된다. 결국 돈오 측의 마하연과 점수 측의 카밀라시라 간의 이론 논쟁이 벌어졌다. 이론 논쟁에서 승리한 것은 카밀라시라의 점수파였고 치송데첸은 돈오파의 활동을 금지하였다. '돈오논쟁'을 계기로 티베트 불교에서 중국 불교의 영향력은 미미해지고 북인도의 탄트라 불교가 강력한 영향력을 끼치면서 티베트는 불교에서도 중국의 대승불교와는 독자적인 방향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4) 치송데첸 시대의 역사적 의미

 

△ 치송데첸의 상

  8세기가 끝나가는 797년 치송데첸은 사망한다. 치송데첸의 시대는 8세기의 반세기를 차지하는 시대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시대는 토번 제국의 역사 뿐만이 아니라 티베트 전 역사를 걸쳐 황금시대라고 할 수 있다. 티베트 역사상 가장 광활한 강역을 차지했을 뿐 아니라, 동아시아 패권을 두고 자웅을 겨루던 당을 압도하며 토번 제국 나름의 국제질서를 형성하였고, 문화적으로도 불교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되 독자적인 선택에 따라 수용하면서 티베트의 종교와 문화적 기틀을 마련하였다. 즉 치송데첸의 시기는 송첸캄포 시기 티베트에 뿌려진 정체성의 씨앗이 싹으로 튼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치송데첸의 시대는 토번 제국 몰락의 신호탄이 된 시기이기도 하다. 특히 치송데첸 시대 때 후원받은 불교가 기존 티베트 사회에 깊숙이 뿌리 박힌 본교의 기반을 흔들고 본교와 대립한 사건은 토번의 몰락을 가속화시킨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불교를 중심으로 한 찬보 권력과 본교를 중심으로 한 귀족 세력은 치송데첸이라는 구심점이 없어지면서 날선 대립을 하였다. 이러한 종교를 기반으로 한 토번정권의 분열은 결국 제국의 몰락을 가져왔다. 토번의 황혼기가 도래한 것이다.

<계속>- 다음 회가 완결
  
 

덧글

  • 들꽃향기 2011/03/03 00:56 # 답글

    1. 그러고보니 구당서 등의 당의 사서에서는 토번군이 장안까지 밀고오는 동안 환관들이 그걸 숨겨서 황제와 군신들이 대비를 하지 못했다는 식으로 서술하지만, 당이 중시하던 농우지방 전역의 방어선이 붕괴되고 장안이 위협받는 상황이 단순히 환관 몇의 은폐로 숨겨질 것은 아니겠죠. ㅎㅎ

    2. 사실 복고회은의 난에서는 위구르와 공동출자(?)를 한 샘인데, 결국 위구르가 배반을 때려버렸으니 ㄷㄷ 이때부터 위구르는 오히려 당이 아닌 중앙아시아의 패자가 새롭게 된 토번을 제압해야한다는 것을 일찍부터 간파한 것 같습니다.
  • 첫걸음 2011/03/04 00:02 #

    1. 맞습니다. 역사란 학문은 너무 지엽적으로만 보면 안됩니다. 그 사건이 왜 일어났나의 상황의 흐름 속에서 봐야한다고 생각합니다.

    2. 당은 위구르나 토번 모두에게 무시당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하여튼 안사의 난 이후 당왕조는 폭풍눈물의 역사입니다.
  • 고리아이 2011/03/03 13:48 # 답글

    잘보고 갑니다영^__^))
  • 첫걸음 2011/03/04 00:03 #

    한결같은 성원에 감사합니다*^.^*
  • 고리아이 2011/03/04 01:29 #

    ㅋㅇ 걍 공부열심히 하시는 님이 부러울 뿐이람다^___^))
  • 만슈타인 2011/03/03 14:46 # 답글

    흠.. 본교에 대해서 좀 더 자세하게 알고 싶은데 혹시 포스팅을 해 주실 수 있으신지요?

    간만에 시간 날때 정주행 해보겠습니다
  • 첫걸음 2011/03/03 23:59 #

    제가 토번제국 전반을 다루기 때문에 본교 등은 소홀하게 다룬면이 있어서 송구스럽습니다.
    어쩌면 본교에 대해서 좀더 알고 싶으시다면, 저의 포스팅 보다도 제가 다음에 참고 문헌을 올릴테니 그것을 통해 선학들의 글을 읽으시면 이해하시기 쉬울 것입니다.
  • 유유자적 2011/03/03 15:17 # 삭제 답글

    저기.. 치축데첸의 업적덕분에 치송의 즉위가 가능했다고 적었지만 일단 치축데첸의 공세는 사천지방을 제외하면 거의 100% 실패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고 이 완벽한 증명은 그가 숨파출신의 귀족에게 살해당함으로 증명됩니다. 뭐 그래서 승리의 치송을 한번더 왜쳐야지만.. 참 송첸캄포같죠? 13살에 부왕 살해당하고 즉위하고 귀족들에게 열받아서 싸그리 다쳐죽이고(이후로 '상슝,숨파,토욕혼의 왕족'이라는 말이 실종된걸로 보아 아주 멸족시킨듯?) 그후에는 당나라 심심하게 약탈시키고...


    다음편이 완결인건 장난이겠죠? 하하 최소 두편정도는 되야하는데. 에필로그따위로 만족이 될까..
    그리고 여기 토번이야기는 심심하면 몇십년 공백이야....

  • 첫걸음 2011/03/03 23:54 #

    역시 토번사 전문가 답게 저보다 많이 아시는 군요 ^^ 좋은 지적 감사합니다. 제가 미처 짚어내지 못한 치데축첸과 치송데첸 시기의 귀족 세력 간의 대립을 짚어주셨군요. 글을 쓰면서 수정하겠습니다.

    제가 이제 학부생으로써 개강이다 보니 바빠져서 이제 연재를 할 시간이 부족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사료를 조사하다보니 내용이 방대해지고(특히 당과 관계의 경우는 지지부진한 내용의 연속입니다.) 그로 인해 읽는 독자 분들도 지루해 질까봐 토번제국 사에 있어서도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만을 서술하려다 보니 수십년의 공백이 생길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화가 마지막 이지만 바로 에필로그 따위로 마무리를 지으려는 무책임함은 저지르지 않습니다. 다만 2~3파트를 한 포스트에 담으며 끝내고자 합니다. 마지막 화는 조금은 길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유유자적 님의 실망이 크시리라 봅니다. 저 역시 황새 앞에서 뱁새가 다리찢는 격과 같아서 송구스럽군요. 제 자신도 이 글을 쓰면서 부족하고 공부해야할 점이 많다는 것을 절실히 느낍니다. 저는 학부생으로 제가 최대한 접근할 수 있는 자료 내에서 제 나름대로 토번제국사를 정리하고 그를 통해서 어떻게 역사를 봐야하는지 경험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한 성과를 내었다고 봅니다. 이 글을 쓰면서 유유자적님께 많은 것을 배웠으니 그걸로도 저는 매우 큰 소득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도 배움의 한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유유자적 님께 바라는 점은 사실 한국에서는 티베트 역사, 고대 티베트 역사에 대해서 잘 알려지지 않았고, 저같은 일반인들이 좀더 깊이 공부하기에는 너무 간략하고 정리되지 못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토번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하시는 분이시라면 저를 비롯한 티베트 역사에 관심있는 한국인을 위한 고대 티베트사 개설서를 서술하셨으면 하는 작은 바람입니다.

    언제나 아낌없이 지적해 주시는 유유자적 님께 감사드립니다.
    만약 이 글을 보시면 답글 부탁드립니다.
  • 유유자적 2011/03/05 23:23 #

    저야말로 그저 국내출판된 극소수의 개념책들과 수십권의 여행기와 소설까지..(신빙성에 문제가 있는것을 알지만 하도 자료가 빈약하니..)을 짜집기해서 얻은 지식에 불과하는데 칭찬해주시니 오히려 제가 부끄럽습니다. 개강이니 당연히 바쁘신데 중국쪽 사료(?)로 인한 티벳의 지식은 오히려 제가 더욱더 많은것을 배웠습니다.

    첫걸음님의 자세야말로 제가 많은것을 배웠습니다. 항상 현재에서 안주하지않고 더욱더 나은것을 위해 노력하고 정진하시는 분이 저에게 감사하시다는 말을 드리니 할말이없습니다.

    현재 국내의 티벳관련 사료가 없는건 사실이지만(티벳책의 70%이상이 불교관련..) 어쨋든 수많은 사람들이 모이다보면 하나의 거대한 사료가 완성되리라 믿어의심치를 않습니다. 항상개념글을 적어드려 감사드립니다.
  • ㅇㅅㅇ 2011/03/04 22:44 # 삭제 답글

    굉장히 잘 쓰셨군요.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언제나 국사책에서는 국내질서만 다루고 중국을 제외한 국제질서를 다루지 않아서 불만이 많았는데 돌궐이나 토번 등의 역사를 보니까 반갑기도 하네요.
  • 첫걸음 2011/03/05 08:56 #

    감사합니다. ^^ 부족한 저의 글을 보시고 큰 도움이 되셨다니 뿌듯합니다.
  • 여소제 2011/03/06 00:53 # 답글

    치송데첸 시기는 말씀하신대로 토번의 전성기라고 칭할 수 있겠는데 서쪽으로는 카를룩과 함께 페르가나 인근까지 갔음을 위구르 비문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서방 정벌에서 카를룩의 도움은 매우 중요한데 위구르를 견제하기 위해 키르기즈와 카를룩은 토번에 협조합니다.)

    『구성회골가한비문(九姓回骨(?)可汗碑文)』
    카를룩과 (도와준) 토번(군)을 공격해 정벌했다. 깃발을 찢고 목을 베었다. 도망한것을 쫓아갔다. 서로 페르가나까지 이르렀다. 인민과 가축을 얻었다. 야브구가 교령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 땅을 버렸다.

    토번의 성장은 주변국들에게 매우 위협적이었는데 이로인해 당, 우이구르, 팔라, 압바스, 남조는 연계하여 토번을 압박하지요.(물론 이중 가장 토번에게 큰 위협을 받은 국가는 당나라) 재미있게도 토번이 전성기를 맞이하는 치송데첸 시기에 압바스에서도 압바스 전성기를 이끈 하룬 알 라쉬드(Haroon al Rasheed)가 칼리프에 오르죠.

    주변 국가들과의 관계를 보면 이 시기 토번은 속된 말로 '다굴'을 당한다는 느낌이 나는데 서쪽으로 압바스, 동으로 당나라, 동남으로 남조, 남으로 팔라, 북으로 위구르를 상대하게 됩니다.(이러한 각 국의 연계를 통한 토번 견제를 주장한 것은 당의 재상이었던 이필이었지요.) 반대로 토번을 도운 국가들은 주로 위구르의 성장을 저지하기 위해 토번과 동맹을 맺은 유목 부족들이었죠.(백복돌궐, 키르기즈, 카를룩 등 뭐 결국 이들은 위구르에게 복속되고 맙니다.) 이러한 주변국들의 연계 공격은 토번 팽창 저지에 성공합니다.(토번 팽창 저지에서 가장 많은 이익을 본것은 역시 위구르인데 당에게서 단물-비단-을 쪽쪽 빨아냈고 토번이 당에게서 빼앗었던 땅들-예를 들면 북정-을 토번에게서 빼앗아 점령하지요.)

    이러한 토번에 대한 당시 각 국가의 연계는 토번의 국력이 얼마나 강력해졌는지를 보여주는 일이기도 합니다.
  • 안녕하세요 2011/06/12 15:47 # 삭제 답글

    학교 수업에서 토번에 대해 배웠는데 기말고사 준비를 하려다 보니 모르는 부분이 많아서 인터넷 검색하다가 이 블로그를 찾았는데요!!! 내용이 정말 잘 정리되어 있어서 정말 큰 도움 받았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역사 공부하시는 분인가봐요? 많이 배워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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