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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자아비판 동아시아사


  송대 이후 중국의 황제권력은 절대적으로 인식되었다. 흔히 독재군주라는 말로 그러한 권력을 대변하기도 한다. 명청시대에 이르면 군주권은 제도적으로도 철저히 뒷받침 되어서 황제는 신성불가침적인 존재가 되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러한 명청시대의 절대군주들 중에서도 자기가 직접 '자아비판'을 한 황제가 존재하였다. 그것도 자아비판을 유서로 남겼다. 그 자아비판의 주인공은 바로 청조의 세조 순치제 아이신 기오로 푸린이다.

  1661년 1월. 자금성 양심전에서 순치제가 세상을 떴다. 나이는 24세. 사인은 천연두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훗날 무성한 소문들이 돌았다. 그가 사랑했던 후궁 귀비 동고(동악) 씨의 죽음에 상심하여 죽었다는 소문도 있었고, 그가 불교에 심취하여 권력에 회의를 느낀 나머지 아들인 현엽(강희제)에게 옥좌를 내어주고 출가해서 승려가 되었다는 소문도 있었다. 순치제의 죽음과 관련하여 많은 이야기가 만들어졌지만, 어쨌든 청의 공식 사서에는 순치제는 2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황제가 죽고 대신들이 모인 가운데 황제가 남긴 유조가 공표되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상당히 흥미롭다. <청실록>과 <청사고> <세조본기>에는 그 유조가 실려 있다.
 

"1. 짐이 덕이 부족하나 祖宗의 큰 기틀(丕基)를 이어받은 지 지금까지 18년이다. 친정한 이래로 기강과 법도, 용인과 행정을 함에 있어서 태조와 태종의 지모와 공업(謨烈)을 우러러 받들지 못하고, 머뭇거리며 세월만 한가하게 보내면서, 눈앞의 일만 미봉하였다. 또한 漢俗을 점차 익혀 순박한 舊制에서 나날이 점차 멀어져 갔다. 그리하여 국가의 다스림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민생도 이루지 못한 상태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짐의 죄 한 가지이다.



1.  짐이 어린 시절부터 皇考이신 太宗文皇帝께서 승하하시는 것을 목도하여, 가르치고 돌보는 것은 오직 성스러운 모친 皇太后의 자애로운 훈육에 의지하였다. 큰 은혜는 끝이 없고, 높고 두터움이 갚을 길이 없어 아침저녁으로 쫓아서 받들며, 孝養할 것을 바랐다. 이제 불행히도 자식의 도리를 다 하지 못하고, 정성스러움을 다 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짐의 죄 한 가지이다.


1,  皇考께서 하늘로 가셨을 때, 짐은 그저 6살이어서 상복과 질을 입고 3년 상을 행하지 못하여 평생토록 근심을 품었다. 오직 황태후를 시봉하여 뜻을 따르고 얼굴을 뵈면서, 또한 만년 후까지 오래 사시기를 바랐고, 자식의 직분을 다하며 전의 근심을 조금이나마 풀었다. 이제 슬하를 영영 떠나게 되어, 성스러운 모친께 겨우 애통함만 돌려드리니, 이것이 짐의 죄 한 가지이다.


1. 종실의 제왕과 버일러 등은 모두 태조와 태종의 자손으로 국가의 울타리가 되어, 이치로는 마땅히 도탑게 대우하여 친함을 드러내야 하였다. 짐은 제왕과 버일러에게 접견한 것이 이미 소홀하였고, 은혜는 거듭 희미했으며, 情誼는 떨어져서 멀었기에, 우애의 도리가 두루 미치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짐의 죄 한 가지이다.


1. 만주의 여러 신료들은 혹은 대를 거쳐 충성을 다하고, 혹은 해를 거듭하여 힘을 쏟았기에, 마땅히 더욱 의탁함을 더하여, 공적을 모두 드러내야 했다. 짐은 신임하지 못하여 재능이 있어도 펴지 못하게 하였다. 또한 명 말에 나라를 잃은 것은 문신만을 편중하여 기용한 것에 많은 이유가 있었다. 짐은 이를 경계로 삼지 않고, 한인 관료에게 위임하여, 部院印信도 요사이 또한 한인 관료에게 관장하게 하였다. 만주 신료들이 일을 맡는 데에 무심해졌고, 정력도 해이해졌으니, 이것이 짐의 죄 한 가지이다.


1. 짐의 천성이 높은 것을 좋아하여, 자기를 비우고 남을 용납하지 못하였다. 사람을 쓸 때 힘써 그 덕을 자기와 같게 할 것을 구해야 하건만, 재능에 따라 중용하지 못하고 항상 사람이 부족한 것을 탄식하는 데에 이르렀다. 만일 단점을 버리고 장점을 기록했다면, 사람이 자질구레한 재주가 있어도, 발견되어 등용되는 기회를 얻었을 것인데, 어찌 세상을 들어도 인재가 없는 상태에 이르렀겠는가. 이것이 짐의 죄 한 가지이다.


1. 관원을 두고 직책을 나누는 데에 오직 덕만을 써야 하고, 관직의 진퇴와 파출은 소홀히 여기면 안 된다. 짐은 조정의 신하들에 있어서 그 불초함을 명확히 알면서도 물리치지 않았고, 거듭 관대히 받아들이면서 안일하게 있었다. 劉正宗 같은 자는 사사로움에 치우치고 조급하며 꺼려했는데, 짐은 이미 마음에서 통찰했음에도, 그가 오랫동안 정계에서 벼슬하는 것을 용납하였다. 이것은 현인을 보고서도 천거하지 않고 불초한 사람을 보고서도 물리치지 못한 것이니, 이것이 짐의 죄 한 가지이다.


1. 국가의 비용은 번다하고, 병량은 부족하였다. 그런데도 金花錢糧은 모두 궁중의 비용으로 공급되어, 일찍이 절약하며 베풀지 못하였다. 度支에서 재정이 고갈되었음을 알리는 것에 이르러서는, 그 때마다 諸王大臣에게 회의하게 하였으나, 별다른 기이한 계책을 가질 수가 없었고, 단지 봉록을 줄여 군량을 넉넉히 하자고만 의논을 하였다. 자기를 후대하고 남에게 박대하고, 위를 더하고 아래를 더하였으니, 이것이 짐의 죄 한 가지이다.


1. 殿宇를 짓고 器具를 만들면서, 지극히 정교한 작업에 힘썼다. 무익한 곳에 비용이 매우 많았음에도 스스로 살피지 않아, 체통을 잃고 백성은 어려워졌으니, 이것이 짐의 죄 한 가지이다.


1. 端敬皇后는 황태후께 효도를 다하고 짐을 보좌하며, 內政을 몸소 닦았다. 짐은 황후를 우러러 봉양하며, 현숙함을 쫓아 생각하면서 喪制典禮를 지나치게 두텁게 하였다. 예로써 정을 이기지 못하여 여러 일이 매우 지나쳤고, 넘치는 것을 다스리지 못했으니, 이것이 짐의 죄 한 가지이다.


1. 祖宗께서 창업하시면서, 일찍이 환관을 임용하지 않으셨고, 또한 明朝가 멸망한 것은 역시 宦侍들을 임용한 까닭이었다. 짐은 그러한 폐단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음에도 이를 경계로 삼지 않았다. 內十三衙門을 설립하여 일을 맡기고 부리는 것이 과 다름이 없었다. 사사로이 경영하며 폐단을 만드는 것에 이른 것이 과거를 훨씬 넘어섰으니, 이것이 짐의 죄 한 가지이다.


1. 짐은 천성 한가롭고 정적인 것을 탐하고, 항상 안일함을 도모하여 깊은 궁궐 안에서 편안히 기거하며, 조회에 임어하는 것이 매우 적었다. 조정 신료들과 만날 기회가 드물고 적어져, 상하의 정의가 막히는 데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짐의 죄 한 가지이다.


1. 사람이 일을 행하는 것에 누군들 과실이 없을 수 있겠는가? 짐이 날마다 萬幾를 다스리는 것에 있어서 어찌 잘못이 한 가지도 없겠는가? 생각건대 말을 듣고 간언을 받아들이면 과실이 있어도 반드시 알게 된다. 짐은 항상 스스로 귀가 밝다고 자만하면서 듣고 받아들일 수 없었다. 옛말에 이르기를, ‘훌륭한 상인은 깊이 숨기기를 빈 것과 같이 하고, 군자가 덕이 성하면 용모가 어리석은 것과 같다.’고 하였다. 짐은 이 말에서 크게 어긋났다. 그리하여 신료들은 함묵하며 진언하려고 하지 않으니 이것이 짐의 죄 한 가지이다.


1. 짐은 이미 과오가 있음을 알고 그 때 마다 스스로를 책망하며 뉘우쳤으나, 헛되이 공허한 문장만 숭상하고 반성하며 고치지 못하여 잘못의 실마리가 나날이 쌓여가서, 허물이 점점 많아졌으니, 이것이 짐의 죄 한 가지이다.


태조와 태종께서 基業을 처음 드리우신 것은 지극히 중대한 것과 관련된 바이다. 원량이 제위를 잇는 것은 오래 비워둘 수 없다. 짐의 아들 玄燁貴妃 佟氏 소생으로 자라나는 모양이 높고 무성하고 총명하고 영특하여 종묘를 받들만 하니, 이에 황태자로 세우노라. 즉시 典制를 준수하여 상복을 27일 간 입고, 상복을 벗으면 皇帝의 자리에 즉위하라. 內大臣 소닌, 숙사하, 어빌룬, 오보이에게 특별히 명하여 輔政大臣으로 삼는다. 그대들은 모두 勳舊重臣들이니 짐이 腹心으로 부탁하노라. 힘써 충성을 행하여, 어린 군주를 보호하며, 정무를 도와 처리하라. 中外에 포고하여 모두가 들어 알게 하라."


  황제가 유서로 반성문을 쓴 것이다. 아니, 이것은 반성문이라기보다 거의 자아비판에 가까운 혹독한 반성문이라고 할 수 있다. 청대에는 대역죄를 저지른 경우, 궁정에서 대역죄에 처한 대상에 대한 자아비판이 이루어진 경우가 종종 있었다. 흡사 문화대혁명 당시 홍위병에 의해 집행된 인민재판 방식과 비슷한데, 어쩌면 청대의 전통이 현대까지 이루어진 경우가 있었다 대표적인 경우가 홍타이지 시대의 아민(누르하치의 동생 슈르가치의 아들, 정묘호란 때의 총대장)이나 강희제 때의 보정대신 오보이, 옹정제 때 연갱요, 가경제 때 화신 등이었는데, 이들은 대신들이나 군중들 앞에서 적게는 죄목이 16개, 많게는 70여 개나 나열되면서 단죄되었다. 그러한 자아비판은 청대 권신들의 비참한 말로를 대표하는 장면이었다. 황제의 입장에서는 통쾌한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순치제는 황제의 신분이었다. 요즘 전대통령들의 회고록이 세간이 화제가 되고 있지만, 자신의 정책을 완전히 부정하는 회고록은 정말 보기 드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당시 절대적 권력을 누리던 순치제의 경우 자신의 주요 정책들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유조를 남긴 것이다. 한인 관료의 중용, 만주 신료들의 권력 제한, 내십삼아문을 중심으로 한 환관 등용 등은 순치제가 중점적으로 진행한 정책들이다. 그것이 순치제 자신에 의해 철저히 부정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순치제의 유조가 순치제 자신에 의해서 작성된 것인가는 의구심도 든다. 만약 순치제가 직접 작성한 유조라면 그는 정말 겸손하고 권력 의지가 그다지 없는 황제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순치제가 죽은 앞뒤 정황을 살필 때 과연 그가 이러한 유조를 남겼겠는가? 순치제가 천연두로 죽은 것이라면 병중의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그러한 장황하고 논리적인 유서를 남길 수 있었을까도 의문이다.



  순치제 이후의 정치적 상황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순치제가 죽고 9살 나이의 아이신 기오로 현엽이 강희제로 등극한다. 순치제의 유조에도 언급됐듯이 숙사하, 소닌, 어비룬, 오보이(사진) 네 명의 보정대신이 정국을 운영하게 된다. 그런데 이 4명의 보정대신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순치제의 정책들을 부정하기 시작하였다. 내십삼아문도 철폐되었고, 만주인 중심의 정국운영이 이루어졌고, 한인관료들의 입지는 위축되었다. 이것은 순치제가 반성문에서 정책들을 비판한 방향들과 매우 일치한다. 오보이를 비롯한 보정대신들에게 순치제의 유조는 정치적인 절대 정당성을 부여하였다고 볼 수 있다.


  솔직히 지나치게 결과론적인 논의가 될 가능성이 농후하고 그래서 위험하지만, 전후의 상황을 볼 때 순치제의 유조는 순치제 이후의 권력을 장악한 만주 귀족들, 특히 네 명의 보정대신들과 깊은 연관성을 지니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황실의 최고 어른이었던 효장황태후의 암묵적인 동의 아래 순치제의 의지와 상관 없이 만주 귀족들의 입맛에 따라 작성되었을 가능성도 배재할 수는 없다. 물론 황제의 자아비판은 순치제가 죽기 직전 황제의 자리와 상관없이 개인적으로 진정한 참회를 하며 작성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당시의 황제와 만주 귀족들 간의 권력의 역학관계에서 생겨난 정치적 산물이라고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덧글

  • 2015/03/04 17:47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길공구 2015/03/06 11:46 # 답글

    흥미롭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꾸벅(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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